민간인 학살… 왜 기억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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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학살… 왜 기억해야 하는가?
  • 송필경
  • 승인 2023.06.27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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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경전단협 인권투어②] 거창사건추모공원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대경지부와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대경지부, 대구경북민주화교수협의회, 대구경북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대구사회연구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대구지부 등 6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는 대구경북전문직단체협의회(이하 대경전단협)가 지난 4월 30일 합천과 거창으로 제4차 인권투어를 다녀왔다.

대경전단협 인권투어는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이후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거나 인권이 유린된 역사현장 방문을 통해 인권의식을 고취하고 아직 미해결된 문제들에 대해 토론함으로써 향후 대응방안을 모색하고자 지난 2017년부터 시작됐으며 코로나19로 인해 약 4년만에 재개된 것이다. 이에 본지에서는 대경전단협 제4차 인권투어 방문지인 합천원폭자료관·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 및 거창사건추모공원 등을 소개하는 기사를 2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경전단협 제1차 인권투어는 지난 2017년 9월 17일 경산코발트 광산, 2018년 4월 28일 대구 10월항쟁 유적지, 2019년 4월 21일 문경 석달마을 등에서 진행된 바 있다.

- 편집자 주

1. 학살

박산골 희생자 묘역에서 본 거창사건추모공원. 우뚝한 위령탑 뒤에 ‘그날의 사건’을 담은 조각상 벽면이 있고 그 위로 희생자 묘비를 조성해 놓았다.(사진제공= 송필경)
박산골 희생자 묘역에서 본 거창사건추모공원. 우뚝한 위령탑 뒤에 ‘그날의 사건’을 담은 조각상 벽면이 있고 그 위로 희생자 묘비를 조성해 놓았다.(사진제공= 송필경)

지난 2001년 베트남 방문 이후 약 20여 년 동안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학살지역을 어지간히 찾아다녔다. 베트남을 다녀온 뒤로는 해방공간의 남한에서 일어난 학살지역도 웬만한 곳은 거의 다 다녀왔다.

학살(虐殺)은 참혹하게 사람을 마구 죽이는 경우를 말한다. 학살당한 사람 처지에서는 참으로 어이없는 죽음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일은 두려운 행위이며 결코 가볍게 처리할 일이 아니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지만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을 모아놓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이는 학살행위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범죄다.

일제는 만주와 백두산 일대에서 조선 민중에게 함부로 그렇게 했다. 해방 후 친일파들은 일제에게 배운 대로 민중을 함부로 그렇게 했다. 한국전쟁에서 반공을 빌미로 민중을 함부로 그렇게 했다.

한국전쟁을 경험한 한국군은 베트남전쟁에서 베트남 민중에게 함부로 그렇게 했다. 베트남전쟁을 치른 참전 베테랑들은 광주에서 민중에게 함부로 그렇게 했다.

2. 거창 학살사건

그날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 닥쳐 주민을 끌어 모아 마구잡이로 총질을 했다. 엄마는 죽고 어린 아이가 살아 울자 총알이 아까워 군화발로 아이를 웅덩이에 차 넣었다.(왼쪽의 삽화사진은 ‘Sapiens studio’가 제작한 영상 ‘거창양민학살사건’에서 캡처했다) 이 모습은 제주4·3을 다룬 강요배 화백의 슬픈 그림 '젖먹이'를 연상케 한다.(사진제공= 송필경)
그날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 닥쳐 주민을 끌어 모아 마구잡이로 총질을 했다. 엄마는 죽고 어린 아이가 살아 울자 총알이 아까워 군화발로 아이를 웅덩이에 차 넣었다.(왼쪽의 삽화사진은 ‘Sapiens studio’가 제작한 영상 ‘거창양민학살사건’에서 캡처했다) 이 모습은 제주4·3을 다룬 강요배 화백의 슬픈 그림 '젖먹이'를 연상케 한다.(사진제공= 송필경)

다음은 한국전쟁 당시 거창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사건의 대강이다.

1950년 12월 5일 빨치산 5백여 명이 거창의 신원면 경찰지서를 습격했다. 이 일로 경찰관 10여 명이 죽거나 다쳤고 거기에 주둔했던 경찰관들이 거창읍으로 달아났다.

1951년 2월 8일 국군이 신원면을 수복했다. 2월 9일 빨치산이 다시 습격하자 접전을 벌이고 청연마을 주민을 중화기로 무차별 학살했다. 이어 10일과 11일 국군은 공산군에게 협력한 주민을 가려낸다고 하면서 주위 마을사람들을 신원초등학교에 모두 모이게 한 뒤 박산골 골짜기로 몰아넣고는 총질을 했다.

이렇게 희생당한 사람이 총 719명이다. 젖먹이 아기에서 15세 어린이까지 어린 사람이 희생자의 절반이 넘는 364명, 61세 이상 노인이 60명,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부녀자였다. 심지어 90세 노인까지 있었다. 희생자 가운데 전투를 치를 수 있는 건장한 남자는 거의 없었다.

국군은 총살한 민간인들의 사체 위에 장작을 쌓아올리고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박산골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됐다.

3월 29일 참혹한 사건을 거창 출신 국회의원 신중묵 씨가 세상에 드러냈다. 온 나라가 벌집 쑤셔놓은 듯 들끓었지만 정부에서는 아무런 공식 발표도 하지 않았다.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자 영국의 신문들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논평할 정도였다.

4월 7일 국회 조사단이 현지로 왔다. 그러나 조사단이 신원면에 채 닿기도 전에 빨치산의 습격을 받았는데 사실은 학살사건을 감추려고 국군이 빨치산 복장을 하고 숨어 있다가 국회의원들에게 총질을 한 것이다.

4월 24일 일이 복잡하게 돌아가자 이승만 대통령이 담화문을 발표했다. 신원면 지구의 공산군 소탕을 위해 그 지역주민들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소개령을 내렸지만 따르지 않았으므로 국군이 공비에게 협조한 주민 187명을 적법한 절차에 따라 처형한 것이라고 강변했다.

5월 14일 국회에서는 거창학살을 규탄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결국 학살 관계자 3명이 군법회의에서 중형을 받았으나 몇 개월 후 모두 사면을 받고 복권돼 오히려 영전했다.

이에 유족들은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마을주민들이 나서 유골을 모아 안장하고 위령비를 세웠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 언급을 금지하고 피해자와 가족들을 탄압했으며 위령비를 부수고 희생자들의 묘지까지 파헤쳤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희생자 유족들과 유족회 간부 18명을 반국가단체 조직 혐의로 구속했다. 1988년에서야 희생자 위령 궐기대회를 갖고 위령비를 다시 세울 수 있었다.

박산골 학살터 인근에 조성된 합동묘. 희생자 유족이 세운 위령비는 잘려 쓰러져있다. 그들의 무덤에서 대경전단협 회원을 대표해서 경북대학교 법과대학 채형복 교수가 사죄의 절을 올렸다.(사진제공= 송필경)
박산골 학살터 인근에 조성된 합동묘. 희생자 유족이 세운 위령비는 잘려 쓰러져있다. 그들의 무덤에서 대경전단협 회원을 대표해서 경북대학교 법과대학 채형복 교수가 사죄의 절을 올렸다.(사진제공= 송필경)

3. 학살은 ‘묻지마’ 살인이다.

거창학살의 작전명은 ‘堅壁淸野(말썽의 소지가 있는 곳은 초토화시킨다)’였다. 견벽청야란 ‘성에 들어가 지키며 들판을 비운다’는 뜻으로 적이 이용할 인적·물적 자원을 모두 없애버리는, 고대부터 써온 야만적인 전술이다.

이런 ‘묻지마’ 살인의 대표적인 예는 몽고의 칭기즈칸이 자신에게 저항한 지역에 자행한 무자비한 보복이 있다. 일제가 만주에서 독립군이 출몰한 마을에 저지른 보복성 학살도 칭기즈칸의 작태와 다를 바 없었다.

한국전쟁 당시 청장년들은 군경 아니면 인민군에 징집됐다. 산간 마을에는 노약자·부녀자·어린아이들만 남아 있었는데 거창군 신원면도 그런 지역이었다.

정부는 빨치산을 ‘공비(共匪)’라 불렀다. 거창학살 문제가 밝혀지자 정부는 공비와 내통한 통비분자(通匪分子) 187명을 처형했다고 허위 발표했다.

거창학살과 거의 똑같은 학살이 한국전쟁 직전에 있었다. 1949년 12월 24일 경북 문경 석달리에서 있었다. 공비가 출몰했다는 핑계로 경찰과 국군이 석달마을에 들어가 초가집을 불태우고 논두렁으로 마을사람들을 끌고가 86명을 총살했다.

석달마을학살 진상규명도 비슷했다. 정부는 ‘국군이 저지른 학살’이 아니라 ‘공비가 저지른 학살’로 둔갑해 발표했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자 ‘피학살자 유족회’를 만들고 국회에서도 진상특위가 출범했으나 1961년 5·16 쿠데타로 물거품이 됐다. ‘피해자 유족회’는 ‘이적단체’로 몰렸다.

천인공노할 학살의 진상규명이 우리 사회에서 결국 흐지부지되는 이유는 “빨갱이는 다 죽여야 해”라는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는 분위기 때문이다. 이런 극단적인 반공은 친일부역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해방 후 미국에 기댄 친일부역자들의 음모였다.

남한의 지배자였던 미국은 반공만 외치면 어떠한 범죄도 용납하고 두둔했다.

4. 베트남에서 저지른 미군과 한국군의 ‘학살’

베트남전쟁(1964-1975)이 본격적으로 불붙기 전인 1961년부터 미국은 베트남 문제에 깊숙이 개입했다. 남베트남에서 북베트남과 상관없는 ’민족해방전선‘의 군사조직(일명 베트콩)이 날로 커지자 미국은 ‘평정작전(Pacification Operation)’을 남베트남 정부에 지시했다.

이에 따라 남베트남 정부는 베트콩과 주민을 분리하기 위해 ‘전략마을정책(Strategic Hamlet)’을 시행했다. 일정 지역을 철조망으로 둘러쳐 바깥과 고립되게 만들어 전략마을이라 부르고 주민을 여기에 강제로 이주시켜 베트콩과 분리시켰다.

마을밖은 모두 베트콩이라는 발상을 하고 마을밖에서는 마음대로 총질할 수 있게 허용했다. 학살을 일상화할 수 있는 길을 전쟁 전에 이미 열어놓은 것이다.

이런 가혹한 조치에도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이 헤어나지 못하자 미군은 민간인 마을에 들어가 대놓고 학살을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미 라이’ 학살사건이다.

1968년 3월 16일 아침 미군 80여 명은 미 라이라 부르는 마을에 들어가 3시간 동안 마을을 붙 태우고 남녀노소 총 502명을 학살했다. 희생자는 젊은 남자 한 명도 없이 어린이와 노인, 그리고 부녀자들뿐이었다.

미 라이 사건 기념관에는 미군이 저지른 참혹한 그날의 사진자료가 있다. 건장한 남자 1명도 없는 마을에 들어가 3시간 동안 마구잡이로 학살하고 집을 불태웠다.특히 어린 소녀부터 웬만한 여자에게는 성폭행을 하고 난 뒤 살해했다.(사진제공= 송필경)
미 라이 사건 기념관에는 미군이 저지른 참혹한 그날의 사진자료가 있다. 건장한 남자 1명도 없는 마을에 들어가 3시간 동안 마구잡이로 학살하고 집을 불태웠다.특히 어린 소녀부터 웬만한 여자에게는 성폭행을 하고 난 뒤 살해했다.(사진제공= 송필경)

한국군도 그와 같은 학살을 베트남에서 저질렀다. 1966년 2월 빈딘성 떠이선현에 있었던 학살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응우옌 떤 런’의 중언을 2013년 나는 직접 들었다. 그 학살은 거창학살과 한치도 다를 바 없었다.

제가 15살 때였습니다. 새벽 5시 쯤 우리 마을 사방에서 폭격소리가 들렸어요. 당시 워낙 폭격이 많아서 집집마다 땅굴을 판 방공호가 있었어요. 우리 식구도 땅굴로 들어갔어요.

점차 폭격소리와 총소리가 우리 마을로 가까워오면서 엄청나게 커졌어요. 동시에 아기 울음소리, 여인들의 고함과 비명소리가 땅굴로 들려왔어요. 그러다가 총소리는 우리 마을을 지나면서 점점 멀어졌어요.

오후 4시쯤 멀리 있는 마을에서 다시 총소리가 들려왔어요. 그러면서 점차 우리 마을 쪽으로 다가 오기에 우리는 다시 땅굴에 들어갔어요. 땅굴로 다가오는 군인들이 “여기 비씨(VC 베트콩)가 있다”고 소리를 쳤어요.

비씨하는 발음을 듣고 한국군인줄 알았어요. 그들은 우리 가족을 발견하고는 땅굴밖으로 나오라고 했어요. 나갔더니 우리를 논두렁쪽으로 끌고 갔습니다. 논두렁에는 우리 마을 25가구 가족들이 이미 끌려나와 있었습니다.

한국군은 우리에게 조용히 엎드려 있으라고 했어요. 그러고 나서 우리를 빙 둘러쌌어요. 좀 있다가 한 사람이 고함을 치자 총소리가 들려오고 수류탄이 날라왔습니다. 요란한 소리와 더불어 안개가 낀 것처럼 포연이 자욱했어요.

자욱한 포연 사이로 머리가 깨져 뇌수가 흐르는 사람, 배가 터져 창자가 나오고 팔과 다리가 잘려나가 널브러진 모습이 보였어요. 그 가운데서도 노인들은 자식을 찾고 특히 엄마들은 아이의 이름을 불러대고 살아있는 아이들은 공포의 울음을 울어대는, 차마 인간으로서는 들을 수 없는 참혹한 소리들이 포연 속을 채우고 있었어요.

그때 내 발목 쪽에 수류탄이 떨어졌어요. 순간적으로 일어나 세 걸음 정도 뛰어나갔을 때 수류탄이 터졌어요. 파편이 온 몸에 박히고 나는 기절을 했습니다.

한밤에 깨어났어요. 살아남은 사람들이 우리 가족을 집으로 옮겼더군요. 주위를 둘러보니 어머니는 하반신이 절단됐고 누이동생은 머리가 깨져 있었습니다. 누워 있는 데 밤 12시까지 여동생의 비명이 너무나 끔찍이 이어졌습니다. 얼마 있다가 비명이 멈추자 살아남은 마을사람들이 동생을 거적에 둘둘 말아 나갔습니다.

그들이 다시 우리집에 되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도 거적에 둘둘 말려 나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다시 기절했습니다. 깨어나니 나는 가족이 없는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마을사람들이 나를 거두어 키워주었습니다.

1966년 2월 중순, 3일 동안 우리나라 면 정도의 따이빈사 15개 마을에서 1,700여 명의 주민들이 한국군에게 목숨을 잃었다. 한 마을에서는 1시간 만에 380명 전원이, 다시 말해 생존자가 단 한 명도 없는 곳도 있었다.

고자이 마을 위령비(왼쪽)와 1966년 학살 당시 그날을 증언하며 눈가에 회상의 눈물이 조용히 맺힌 런 아저씨.(사진제공= 송필경)
고자이 마을 위령비(왼쪽)와 1966년 학살 당시 그날을 증언하며 눈가에 회상의 눈물이 조용히 맺힌 런 아저씨.(사진제공= 송필경)

생존자 런 아저씨는 온 몸에 파편이 박혀 기절한 다음 살아남았다. ‘그 일’ 이후 47년간 누이와 어머니의 비명은 자신의 귀에서 떠나지 않았고 수없이 많은 파편 가운데 어떤 것은 살과 뼈 속에 파묻혀 있고 어떤 것은 핏줄 안에서 맴돌며 통증을 멈추지않게 하고 있어, 런 아저씨는 ‘그 일’을 도저히 잊지 못하고 있었다.

현장인 고자이 마을에는 큰 위령비가 있고 그 뒤에는 모자이크로 만든 그림 벽면이 있다. 마을사람들은 한국군이 저지른 ‘그 일’의 기억을 담아 놓았다. 특히 여자를 윤간한 후 불태우고 있는 장면도 있다.

2004년 거창사건 추모공원을 신원면에 건립했다. 희생자 묘역 앞 공원 중앙에 위령탑이 있고 그 뒤엔 화강암으로 학살 당시의 모습을 새긴 조각벽면이 있다. 그 조각 벽면에는 학살 희생자들을 불태우는 장면이 있다.

거창사건추모공원 위령탑 뒷면에 있는 화강암 조각상 중 사체를 구덩이에 던져 넣고 휘발유를 뿌리는 장면(위쪽)과 고자이 마을 위령탑 뒤의 모자이크 형상 중 여자를 윤간한 후 사체를 태우는 장면.(사진제공= 송필경)
거창사건추모공원 위령탑 뒷면에 있는 화강암 조각상 중 사체를 구덩이에 던져 넣고 휘발유를 뿌리는 장면(위쪽)과 고자이 마을 위령탑 뒤의 모자이크 형상 중 여자를 윤간한 후 사체를 태우는 장면.(사진제공= 송필경)

미국 대외정책의 으뜸은 반공이다. 이 반공정책을 가장 성실하게 잘 따르는 나라는 남한 정부다. 반공은 극단의 혐오와 증오를 담고 있다. 반공을 외치면 함부로 사람을 죽이고 불태울 수도 있다.

5. 무자비하고 비겁한 ‘반공’에 대한 반성

‘베트남평화기행단’의 일원으로 2015년 7월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이 무자비하게 학살을 자행한 ‘푸옌성’을 찾은 적이 있다. 베트콩으로 활약하면서 고향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로 어머니를 잃은 ‘찐 아저씨’의 소감을 들었다.

“한국의 참전군인들은 아군과 적군이 구별이 안 돼 민간인 피해자가 났다고 말합니다. 나도 군인이었습니다. 진정한 군인이라면 내가 싸워야 할 대상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군인은 싸워야 할 대상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찐 아저씨의 말 한마디에서 나는 우리 군, 나아가서 우리 사회가 저지르고 있는 악폐의 근원을 찾을 수 있었다.

이승만은 반민족 친일인사를 척결하지 않고 오히려 독립군을 토벌하던 자들에게 군 지휘를 맡겼다. 그 군인들은 민족적 인사를 빨갱이로 올가미 씌워 대구에서, 제주에서, 여수와 순천에서 학살했다. 한국전쟁에서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박정희의 군대는 베트남에서 미국의 용병을 자처해 다른 민족을 학살했다. 이는 홍익인간을 주장한 단군의 후손인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남의 나라 민중을 학살한 첫 사건이었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바 있는 전두환은 베트남에서 배운 못된 버릇을 광주 민중에게 저질렀다.

“진정한 군인이라면 싸워야 할 대상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70, 80세 노인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어린이에게 총질한다면 군인이 아닙니다.” 쩐 아저씨의 일갈은 우리를 몸둘 바 모르게 부끄럽게 했다.(사진제공= 송필경)
“진정한 군인이라면 싸워야 할 대상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70, 80세 노인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어린이에게 총질한다면 군인이 아닙니다.” 쩐 아저씨의 일갈은 우리를 몸둘 바 모르게 부끄럽게 했다.(사진제공= 송필경)

‘찐 아저씨’의 지적처럼 대한민국 군인들은 싸워야 할 정확한 대상하고 싸우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권력은 주권자인 민중을 위해 척결해야 할 적폐와 싸우지 않았다.

6, 왜 기억을 다시 불러내야 하는가?

국회에서는 1996년 거창학살사건의 사망자와 유족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조치법이 통과됐지만 보상 관련 조항은 제외되고 말았다.

정부는 당시 이미 시효가 지나 국가배상 의무가 소멸했다는 입장을 내세웠으나 유족들은 공소시효를 특별법 제정 이후부터 산정해야 한다며 2001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2002년 일부 국회의원들이 거창사건 특별조치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2003년 10월에는 서울대 법대 교수들이 명예회복만 규정한 현행 특별조치법을 개정해 인권침해에 대한 보상도 해야 한다고 촉구하며 법률개정안을 내놓았다.

2021년 2월 제주 4·3사건 특별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한국전쟁 당시 국가가 무고한 국민에게 가한 폭력을 인정하고 유족들에게 위자료 지급을 명시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아픈 상흔으로 남은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아직껏 진정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대구 10월항쟁과 여순항쟁, 문경 석달리 등에서 희생된 유족들에게도 제주 4·3특별법과같은 특별법이 제정돼야 한다.

1985년 나치 독일 패망 40주년에 독일 대통령 바이츠제커는 다음과같은 말을 남겼다.

“우리는 나치의 범죄를 받아들여야 한다. 현재 젊은이들은 40년 전의 일에 책임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앞으로 일어날 일에는 책임이 있다. 기억을 생생히 간직하는 것이 왜 그리 중요한 것인가를 젊은이들은 이해해야 한다.”

지금도 적폐세력들은 적폐를 지적하는 이들을 ‘빨갱이’로 몰고 있다. 개혁을 외치면, 종소리만 듣고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어김없이 ‘빨갱이’란 소리가 튀어나온다. 우리가 반공의 악폐를 잊어버린다면, 반공의 탈을 쓰고 반복되는 악폐에서 근원적으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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