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히로시마 ‘합천’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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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히로시마 ‘합천’을 아십니까?
  • 이인문 기자
  • 승인 2023.05.12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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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경전단협 인권투어①] 합천원폭자료관 &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대경지부와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대경지부, 대구경북민주화교수협의회, 대구경북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대구사회연구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대구지부 등 6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는 대구경북전문직단체협의회(이하 대경전단협)가 지난달 30일 합천과 거창으로 제4차 인권투어를 다녀왔다.

대경전단협 인권투어는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이후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거나 인권이 유린된 역사현장 방문을 통해 인권의식을 고취하고 아직 미해결된 문제들에 대해 토론함으로써 향후 대응방안을 모색하고자 지난 2017년부터 시작됐으며 코로나19로 인해 약 4년만에 재개된 것이다. 이에 본지에서는 대경전단협 제4차 인권투어 방문지인 합천원폭자료관·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 및 거창사건추모공원 등을 소개하는 기사를 2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경전단협 제1차 인권투어는 지난 2017년 9월 17일 경산코발트 광산, 2018년 4월 28일 대구 10월항쟁 유적지, 2019년 4월 21일 문경 석달마을 등에서 진행된 바 있다.

- 편집자 주

대경전단협 회원들이 지난달 30일 합천원폭자료관을 방문했다.
대경전단협 회원들이 지난달 30일 합천원폭자료관을 방문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1억 총옥쇄를 외치며 미국에 저항했고 이 저항의 정점에 이른 전투가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였다. 2차례의 전투에서 예상외의 피해를 입은 미국은 일본인의 완전한 소멸, 또는 국가의 존속이 위협받아야만 일본이 항복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맨해튼 프로젝트의 결과물인 핵(원자폭탄)투하를 결정했다. 

우선 원자폭탄의 효과를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는 목표도시들을 정하고 그 도시들에 대한 일반공습을 금지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정찰기 3대가 히로시마 상공을 지나갔고 몇 시간 후 B-29 폭격기 1대가 단독으로 날아와 ‘리틀보이(우라늄235)’를 히로시마에 떨어뜨렸다. 

‘리틀보이’가 터지면서 발생한 거대한 폭발의 충격파는 수많은 건물들을 붕괴시켰고 동시에 발생한 밝은 빛은 사람들의 시력을 앗아갔으며 그 고열로 인해 온몸에 화상을 입게 되었다. 그 후 히로시마에서는 원자폭탄으로 인해 모든 것이 타버렸고 남은 재가 비와 섞여 수증기로 변해 ‘검은비’가 내렸다.

1945년 8월 9일 오전 B-29 폭격기는 ‘팻맨(플루토늄)’을 싣고 고쿠라로 날아갔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 나가사키로 기수를 돌렸다. 나가사키 역시 구름이 많이 껴 지상이 보이지 않았지만 한 순간 구름이 30초 가량 걷히면서 나가사키가 보였고 그 순간 ‘팻맨’을 공중에 떨어뜨렸다.

효과는 리틀보이보다 몇 배나 되는 위력이었지만 완전 평지인 히로시마와 달리 산지로 둘러싸인 나가사키는 폭심지에서 발생하는 고열과 폭풍이 산과 계곡에 가로막혀 멀리 확산되지는 않았다. 핵폭탄이 터진 이후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종전하였다.

- 합천원폭자료관, 「원폭의 역사」 중에서

미국의 2차례에 걸친 원폭투하로 피해를 입은 피폭자수는 일본 내무성 경보국 발표에 따르면 히로시마 74만, 나가사키 30만 등 총 74만여 명에 달한다. 하지만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일본인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의 강압적인 수탈로 인해 생계가 어려워지거나 혹은 강제징용 등으로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살고 있었다. 특히 당시 일본 군국주의의 군사기지 요새인 히로시마에는 강제징용된 많은 한국인들이 강제 배치돼 인권조차 유린당한 채 굷주림과 혹독한 고생에 내몰려 있었다.

그렇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2곳에서 피폭을 당한 한국인들은 히로시만 7만, 나가사키 3만 등 총 10만여 명에 달한다. 그중 절반이 즉사했고 절반이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5만의 생존자 중 해방후 귀국한 이들은 모두 4만3천여 명이었고 약 7천여 명이 일본에 남았다. 그리고 총 10만여 명에 달하는 한국인 원폭피해자 중에서 합천 사람들은 약 70∼80%에 달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피해 현황(원폭자료실 자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피해 현황(원폭자료실 자료)

왜 유독 합천사람들이 많았을까? 합천원폭자료관(이하 원폭자료관) 김희영 자료실장은 “일제강점기 시절 합천은 오지 중에 오지였다”고 설명한다. “먹을 것이 없었지만 산이 워낙 많아 산에 가서 송진같은 것을 뜯어먹고 살다가 몇몇이 강제동원 등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일본에서는 그래도 먹고살 수 있다는 연락을 받고서 합천에는 먹을 것이 없으니까 죄다 일본으로 건너갔던 것이다.”

그렇게 합천사람 7∼8만여 명이 원폭피해를 당했다. 이 숫자는 현재 합천군 인구가 약 4만 명 정도 되는 것을 감안해본다면 정말로 엄청난 숫자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해방후 지금까지 대한민국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합천이 ‘한국의 히로시마’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한국원폭피해자협회(이하 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 심진태 지부장은 “한국인들은 일본에 원폭이 투하되면서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했고 결국 우리나라가 해방된 것이라고만 알고 있다”며 “하지만 그 피해가 유전돼 10대 후손들까지 피해를 입게 된다는 원폭 피해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고 피력했다.

지난 2001년부터 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장이 돼 2017년 지금의 원폭자료관을 만들고 더 나아가 합천에 비핵세계평화공원(이하 평화공원)을 조성하려고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고 있는 그는 일본 히로시마에서 1943년 1월 9일 태어난 제1세대 원폭피해자이다. 그가 당시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원폭이 투하된 폭심지에서 약 3.5km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원자폭타의 피해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심진태 지부장(오른쪽).
원자폭탄의 피해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심진태 지부장(오른쪽).

“피해자 분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책만 읽어도 눈물이 나요. 피해를 당하신 분들의 당시 사진을 보면 초등학생들에게는 컬러사진을 못 보여줄 정도로 정말 참혹합니다. 지금도 원폭자료관에서는 컬러사진이 아니라 흑백사진으로 전시해놓고 있습니다. 컬러사진으로는 너무 끔직해서 보여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김희영 자료실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이들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지만 그 지옥같은 곳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 평생 지울 수 없는 장애를 달고 살아가야만 했다. 심진태 지부장처럼 큰 장애가 없는 이들조차 자손들에게 병이 유전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야만 한다.

김 실장은 “원폭 피해자들이 처음 합천으로 돌아와서는 치료를 받지 못해 그냥 된장이나 송진 등을 바르다가 고름이 흘러내려도 치료할 수가 없으니까 그냥 그대로 두고보다가 피부가 곪아 썩어서 그대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해요. 현재까지 생존해 계신 분들은 그나나 지부장님처럼 큰 피해를 당하지 않으셨던 분들 뿐”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2013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원폭피해자들의 경우 일반인들에 비해 뇌와 심장질환 발병률이 약 3∼5배나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김희영 실장은 “최근 합천군에서는 머리털만이 아니라 온몸의 털이 빠지는, 원인 모를 탈모현상과 원인 모를 뇌질환과 심장질환, 원인 모를 소화기질환 등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며 “어려서부터 병원을 자주 다니면서도 왜 그러는지 원인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원폭피해자 분들의 경우 그것을 밝혔을 때 결혼을 하기 힘들어 자신이 원폭피해자라는 사실을 숨기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사실을 밝혔을 때 가정이 파탄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원폭자료관 자료실 중 일부.
원폭자료관 자료실 중 일부.

이렇게 큰 피해를 당했음에도 한국의 원폭피해자들은 그 어느 곳으로부터도 피해보상을 받지 못했다. 민간인들이 대규모로 살고 있는 도시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던 미국은 지금까지 피해보상은커녕 사과조차 않고 있다.

김 실장은 “미국이 원폭 실험을 했던 먀살군도에서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했지만 당시는 전쟁 중이었다는 이유로 모두 패소했다. 원자폭탄을 제조하는데 관여했던 기업들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일부 승소한 적은 있으나 미국정부를 대상으로 한 소송에서는 모두 패소했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김희영 실장은 “합천의 원폭피해자들이 치료를 받기 시작한 것은 1960대 일본의 의사들이 속죄의료단을 꾸려 합천으로 넘어온 것이 처음이었다”면서 “합천이 ‘한국의 히로시마’라 불리기 시작한 것도 이들 중 1명이 왜 합천에 원폭피해자들이 많은지 등에 대한 것을 조사해 책으로 발간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그는 “일본의 시민단체들은 지금도 한국의 원폭피해자들을 도와주고 있다. 현재 한국의 원폭피해자 1세들이 일본 정부로부터 치료비와 사망했을 때 장례비 등의 보상을 받고 있는 것도 모두 일본의 시민단체들이 일본 정부에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라면서 “하지만 일본 정부는 원폭 1세대들만 피해자로 인정할 뿐, 2·3세대들은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는 어떨까? 김 실장은 “아무런 도움을 주고 있지 않다”고 울분을 토했다.  그 이유는 놀랍게도 “일본 정부에서 원폭피해자들에게 지원을 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지난 2016년 원폭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기는 했지만 김 실장은 “특별법의 골자는 일본에서 1세대들에게 의료지원을 해주고 있기 때문에 한국 정부에서 따로 해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면서 “대상자는 1세대만으로 한정했고 추모공원도 설립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아니라 설립할 수 있다고만 명시했다”고 비판했다.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 전경.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 전경.

지난 1990년 한국과 일본 정부는 한국인 원폭피해자 지원에 합의를 하고 기금을 마련해 그 기금사업의 일환으로 1996년 10월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이하 복지회관)을 설립했다. 복지회관은 현재 원폭자료관 위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총 82명의 원폭피해자 분들이 물리치료사, 요양보호사 등 28명의 직원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복지회관 경내에는 일본 태양회의 모금으로 지난 1997년 건립돼 원폭피해 사망자 1,161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위령각이 있으며, 복지회관과 원폭자료관 사이에는 원폭피해자 2세대로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결성해 피해자들의 인권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운동에 앞장섰던 인권운동가 故 김형률의 추모비가 함께 서있다.

김형률 추모비.
김형률 추모비.

“일본은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지 않았더라도 항복을 했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미국이 왜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는지 의문이다. 미국은 사전에 원자폭탄 투하를 실험해봤던 만큼 그 피해가 그야말로 엄청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심진태 지부장은 한서린 목소리로 열변을 토했다.

심 지부장은 지금 합천에 평화공원을 설립하기 위해 동분서주 뛰어다니고 있다. 합천군에서는 현재 6억 원의 설립예산을 편성해놓은 상태이지만 총 310억여 원에 달하는 조성기금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중앙정부(기획재정부)의 예산편성이 반드시 뒷받침돼야만 한다.

김희영 실장은 “원폭피해자 분들의 바람은 단지 그들의 후손들이 피해자로 인정받아 마음껏 치료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대학에 가서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의 이야기를 해도 요즘 대학생들은 전쟁의 참상이나 평화의 중요성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 여러분들은 ‘한국의 히로시마’라는 이야기들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인권투어를 온 여러분들이 합천의 이 슬픈 이야기들을 잊지 말고 많은 사람들에게 해줘야만 한다”고 당부했다.

위령각 전경.
위령각 전경.

부끄럽다. 해방후 벌써 80년이 넘었는데도 왜 나는 한국의 원폭피해자들이 이렇게나 많이 '합천'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평화공원을 조성하기 위한 심진태 지부장과 김희영 실장의 노력이 꼭 결실을 이루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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