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살 경상도 대학생이 본 ‘광주민주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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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살 경상도 대학생이 본 ‘광주민주항쟁’
  • 송필경
  • 승인 2023.05.15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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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시론] 송필경 논설위원
(사진제공= 송필경)
(사진제공= 송필경)

나는 1955년 대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공중보건의 복무를 마치고 1985년부터 대구에서 치과 개업의로 살았다.

1918년 생 아버지는 칠곡 북삼에서, 1919년 생 어머니는 구미 상모동에서 태어나셨다. 1917년 생 박정희 역시 구미 상모동에서 태어났고 어머니와 상모초등학교 동기생이었다. 박정희는 2년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 칠곡 북삼과 구미 상모동 사이의 지도상 직선거리는 약 3km이다.

아버지는 대구고보(현 경북고) 출신으로 당시 시골 지역에서는 드문 학력이었다. 박정희의 셋째형인 1905년 생 박상희는 일제강점기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 후 좌익활동의 지도자였다. 1946년 미군정에 최초로 저항했던 ‘대구 10월항쟁’을 주도했다가 경찰에 총살당했다. 김종필이 바로 박상희의 사위이다.

아버지는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진학에 실패한 뒤 일제강점기 때부터 대구경북지역에서 초등교원과 교육공무원으로 지내시다 퇴직하셨다.

짧았던 해방공간 시기에 아버지는 박상희의 포섭대상이었다. 구미 인근 지역 지식인 대부분이 박상희에게 동조를 했다가 곤혹을 치렀다. 아버지는 박상희의 인격을 존경했으나 정치·사회 활동을 같이하기는 단호히 거부하셨다. 때문에 한국전쟁 전후 좌익검거 올가미에서 벗어나 공무원 생활을 지속할 수 있으셨다.

아버지는 전통 권위의식과 우익적 힘의 논리를 따르셔서 자랄 때 나는 그런 가정분위기에 얼마간 절어 있었다.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선은 1969년의 3선개헌 토대 위에서 박정희의 영구집권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선거였다.

어머니는 김대중 연설회에 가고 싶다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들은 아버지가 공무원 가족이 야당 유세에 갔다가 들키면 ‘모가지’가 달아난다고 노발대발하셨다.

어머니는 군의관이었던 큰 형님과 상의를 하시더니 스카프로 얼굴을 가리고 형님은 민간인 복장을 하고 수성천변 연설장에 가셨다. 다녀오시더니 김대중이 똑똑하게 말 잘하더라고 칭찬하셨다. 경상도에서 김대중에게 호의적인 평이 꽤 많았다. 부산의 어느 노인이 경상도에는 김대중 같은 인물이 없음을 한탄했다는 말이 언론에 오르내렸다.

그 때 대구 인구가 약 1백만 명이었지 싶은데 수십만 명(?)의 인파가, 어쨌든 박정희의 인원동원 못 지 않은 사람이 김대중 연설회에 모였다고 한다. 물론 대구에서는 박정희가 67%:33%로 압승했다. 전국적으로는 53%:45%였다.

그 대선은 무지막지한 권력을 휘두른 중앙정보부가 간여한 부정선거란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군인들 60만 표를 모두 박정희가 가져갔다고 했다.

대선이 끝난 뒤 한 달 만인 1971년 5월 25일에 제8대 국회의원 총선이 있었다. 중앙정보부는 야당인 신민당이 개헌저지선 확보를 못하게 체계적인 공작을 계속했다. 여당인 공화당이 전국적으로 과반확보는 했으나 야당에 민심이 쏠려 개헌선 확보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여당과 야당의 의석수는 113:89, 득표율은 48.7%:44.3%였다.

대구에서는 완전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당시 대구에서는 5개의 총선 선거구가 있었는데 4개 선거구에서 박정희의 공화당이 아니라 야당인 신민당 후보가 당선됐다. 낙선한 공화당 후보 4명은 인지도가 매우 높고 박정희와 매우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이효상은 당시 국회의장이었으며 박정희 3선 당선에 앞장서 ‘경상도 대통령론’을 외친, 지역 분열을 조장한 원조이다. 이만섭 후보는 동아일보 기자 출신으로 박정희의 총애를 받는 젊은 정치인이었다. 나중에 국회의장(2000〜2002)까지 역임했다. 박찬 후보는 대구에서 가장 유명하고 돈 많은 변호사였다. 이원만 후보는 현역 의원이었으며 한국나이론(현 코오롱 그룹의 전신) 창업자로 이른바 재벌이었다.

이런 쟁쟁한 후보들이 우수수 떨어져 박정희의 공화당은 야당 신민당에 대구에서 1:4로 참패했다. 유신 전 마지막 선거에서 보듯 대구 민심은 박정희에게 맹종하지 않고 반기를 들었다.

박정희는 광범위한 부정선거를 했음에도 김대중과 힘겹게 겨루었고 특히 대구 총선결과에 경악했다. 

“박정희가 1년 뒤인 1972년 10월 국회를 해산하고 10월유신을 단행한 것은 바로 이 선거 결과, 특히 대구에서의 결과에 놀라 더 이상 선거에 의한 정권유지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대구 운동권에서 활동했던 치과의사 송필경씨는 유신의 배경을 이처럼 설명한다.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이다.(손호철. 2022. 『키워드 한국현대사 기행Ⅰ』 이매진)

1972년 내가 고2 때 헌법을 정지시킨 유신쿠데타가 일어났다. 한참 동안은 여러 선생님들이 수업 대신 유신의 당위성을 어설프게 설명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던 모습이 고등학생 눈에 빤히 보였다.

교련 선생은 누구보다도 유신지지에 광분하듯이 열을 올렸다. 한 친구가 짓궂게 물었다. “천재지변이 있어야 헌법을 정지시킨다고 배웠는데, 무슨 천재지변이 있었심니꺼?” 교련 선생의 답변은 유신의 속성에 관한, 내가 이제까지 들은 그 어떤 설명보다 명확했다. “야 이눔들아, 쪼매만 있으면 천재지변이 있을끼다!”

그랬었다. 유신은 천재지변을 만들기 위해 단행됐다. 정치적 반대자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고문과 투옥, 사형을 함부로 자행하는 민주주의 말살이란 천재지변 말이다. 그렇게 보면 1980년 5월 18일 0시에 발령한 전두환의 비상계엄 확대도 광주항쟁을 유도하기 위한 내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진제공= 송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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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봄, 나는 자유를 철없이 만끽하던 대학교 신입생이었다. 술을 자유롭게 마셔 마냥 즐거웠다. 그 봄에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알지 못했고, 한참 뒤에 ‘의식’을 갖추고서야 그해 봄, 참담한 진실의 실체를 알게 됐다.

하나는 4월 9일 이른바 ‘인혁당 사건’ 관계자 8명을 대법원선고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했던 사건이다.

박정희는 유신을 반대하는 자신의 고향 ‘대구’의 인사들을 희생양으로 골라 무지막지한 고문을 가해 간첩으로 몰았다. 졸속 재판을 거쳐 대법원 확정판결 18시간 만인 4월 9일 아침에 사형을 집행했다.

국제사회에서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정했을 만큼 국제적으로도 치욕스러웠으며 유신의 폭압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다른 하나는 4월 30일 베트남이 민족해방통일을 이룬 사건이었다. 박정희에게는 자신의 체제와 너무나 비슷한 ‘월남의 패망’이었다.

박정희는 불안에 이성을 잃고 헌정사상 가장 악법인 긴급조치 9호를 5월 13일 발령해 민주주의 자체를 노골적으로 압살했다. 대학에는 백골단이란 깡패와 다름없는 폭력배를 버젓이 상주시켜 대학생들이 모이기만 해도 무자비하게 두드려패곤 했다.

민주주의는 진흙탕 속으로 빠져 들어갔고 박정희는 스스로 판 폭압의 구렁텅이 속에서 자신의 참혹한 무덤을 일구고 말았다.

1975년 4월 말, 나는 ‘기독교개론’ 시간에 서남동 교수 강의를 들었다. 서남동 교수는 우리나라 민중신학을 개척한 분이었다. 2개월에 불과했던 그 강의에서 “희망이 있기에 투쟁을 한다”는 마지막 말씀을 남겼다.

이 ‘희망’이란 말은 당시에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나의 의식화 과정에서 끝없이 여운을 울린 소중한 말이었다.

서남동 교수는 20세기 최대의 신학자 본회퍼(Bonhoeffer; 1906-1945)의 정신적 계승자였다. 본회퍼는 목사였지만 히틀러 암살모의에 가담했다가 사형을 당한 인물이다. 그의 여러 저서는 20세기 신학의 주춧돌이었으며 그의 정신은 라틴아메리카에서 ‘해방신학’을, 우리나라에서는 ‘민중신학’을 낳았다.

서남동 교수의 사자후 ‘희망’이란 말은 내가 민족해방통일을 이룩한 베트남의 호찌민과 사회주의혁명을 이끈 쿠바의 카스트로를 공부하게끔 이끈 말이었다.

서남동 교수는 긴급조치 9호가 발령할 즈음 해직당했고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과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조작’ 사건에 엮여 옥살이를 하다가 1982년 형집행정지로 미국에 강제 망명됐다가 귀국 후 1984년에 돌아가셨다.

1970년 11월 3일,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22살 젊은이의 고독한 행동은 한국노동운동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었다. 자신의 몸을 불꽃으로 만들고 난 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면서 목숨을 바쳤다. 이 외침은 천박한 남한자본주의에 경종을 울렸고 후배 노동자들이 희망의 저항의식에 눈뜨게 했다.

1979년 3월, 가발제조업체인 YH무역이 위장폐업을 하자 여성 노동자들이 농성을 벌였다. 전태일이 뿌린 씨에서 싹이 돋아난 셈이었다. 1979년 8월 9일, 노동자 172명은 도시산업선교회의 알선으로 신민당사에 들어갔다. 이때 대구 출신 서울대 운동권 김문수가 많은 역할을 했다.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은 노동자를 격려했다.

8월 11일 새벽 2시 경찰 폭력단이 당사에 난입,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고 농성을 강제해산했다. 그 과정에서 21살 여성 노동자 김경숙이 2층에서 추락 사망했다. 10월 4일 해고노동자를 격려한 김영삼 총재는 결국 박정희의 명령에 따라 의원직 제명을 당했다.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5일 동안, 김영삼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해 박정희는 탱크를 동원해 진압했다. 이른바 1979년의 ‘부마민주항쟁’이다.

10월 중순 무렵, 신촌거리를 걷고 있는데 버스의 차창에서 누군가 한 뭉치 삐라를 뿌렸다. 주워서 읽어보니 경악할 내용이었다. 단순히 정권퇴진 정도가 아니라 10월 30일 서울역에 모여 폭력으로 박정희를 박살내자는 내용이었다.

소름이 확 끼치며 삐라를 대충 읽고 얼른 길가에 버렸다. 그때는 그런 유인물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경찰의 폭행과 검거 대상이었다. 부마항쟁 이상의  대규모 폭력 충돌이 떠올라 와락 겁이 났다.

10월 말 서울역 광장에서 시민의 저항이 폭발하기 전에 10월 26일 김재규의 총탄이 유신의 심장 박정희를 결딴냈다. 12월 12일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참모총장 정승화를 끌어내리고 군권을 장악했다. 돌이켜보니 유신 이상의 시커먼 폭력이 남한사회에 드리우고 있었다.

(사진제공= 송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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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은 내 나이 만 25살, 본과 3학년이었다. 군사정권이 들어서겠느냐는 ‘설마’하는 심정으로 ‘서울의 봄’을 맞으면서 데모에 열중했다. 5월 15일 대규모 서울역집회에 참가하고서도 심각한 기류를 못 느끼고 해산했다.

5월 18일 계엄령이 확대되고 휴교령이 떨어지면서 전두환 군부의 속셈이 드러났다. 아니나 다를까, 5월 20일 무렵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는 보도가 조선일보 지면을 매웠다. 나는 대구 집에 내려가지 않고 하숙을 계속하고 있었다.

5월 25일쯤 친한 친구가 광주에서 온 유인물이라며 들고 내 하숙집에 찾아왔다. 군인들에게 당한 여성들의 참상에 읽는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친구 외 아무도 없는 하숙방이었지만 혹시나 누군가 볼까 싶어 둘이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손전등을 켜고 유인물을 읽었다. 나는 그렇게 광주의 참상을 알기 시작했다.

역사에 있을 수 없는 만약을 가정한다면, 김재규의 총탄이 없었다면 서울에서도 분명 대규모 항쟁이 일어났을 것이다.

베트남 중부에 선미 마을이 있다. 미군들은 이 지역을 작전명으로 ‘미 라이’라 불렀다. 1968년 3월 16일, 미군 80여 명이 건장한 남자 1명도 없는 선미 마을에 들어가 약 3시간 만에 노인과 아녀자, 어린아이 등 504명을 학살하고 모든 집을 불태웠다. 이를 ‘미 라이 학살’이라 부른다.

베트남인들은 '선미 학살'이라고 한다.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의 제국주의 잔인성을 가장 잘 드러낸 대표적인 학살사건이다.

베트남의 국민시인으로 추앙받는 탄 타오의 부모 고향이 이 지역이었다. 1954년 베트남이 남북으로 분단됐을 때 탄 타오 가족들은 북으로 올라갔다. 베트남전쟁이 일어나자 하노이대학 인문학부를 졸업한 탄 타오는 북베트남군에 자원입대, 게릴라활동을 하기 위해 남베트남으로 내려왔다.

탄 타오는 ‘미 라이 학살’이 일어나고 얼마 뒤에 고향인 이 지역에 도착했다. 마을 모습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탄 타오는 1979년 베트남전쟁을 소재로 한 『초원을 건너는 발자국』이란 대서사시로 베트남작가회의 최고 문인상을 받았다.

다음은 이 서사시에서 '선미 학살'을 다룬 「망루에서 호소」란 시의 일부분이다.

바다에서 달무리가 떠오른다.
마을 쪽에서 어린아이들이 날아오른다.
달과 아이들이 만난다. 하늘 가운데서.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래 둥근 달아 이리 내려와 놀자
술래잡기 숨바꼭질 모두가 다시 살아와 이리저리 모래 위를 뛰논다.
손에 든 나무총 한낮에 주운 막대기로 달무리를 끌어내린다 열매를 따듯.
… 중략 …
이 아기가 내게 오는 총탄을 막아주었다.
이른 아침 내가 선미에 다다르기 전에
이 아기가 그대의 총탄을 막아주었다.

2001년 베트남 학살지역 의료활동단원으로 가서, 탄 타오 시인이 직접 낭독하고 구수정 선생이 번역한 이 시를 들었을 때 무엇보다도 먼저 광주학살이 떠올랐다. 그리고 속으로 광주항쟁을 되새김했다.

“오, 광주의 영령들이여! 그대들이 다른 민중들에게 올 총탄을 대신 막아주었구나.”

광주항쟁 이후 같잖은 소문이 대구에서 있었다. '경상도 번호를 단 차는 전라도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어주지 않는다.' 이같은 말이 흉흉하게 떠돌았다. 당시 번호판에는 ‘대구 가 1234’ 식으로 지역 이름이 있었다. 나는 이를 얼토당토않게 여겼지만 대구사람들에게는 꽤 그럴싸하게 퍼졌다. 지역감정은 이렇게 싹을 내밀기 시작했다.

유신 이후와 전두환 체제에서 민심을 가늠할 선거는 없었다. 1971년 이후 첫 의미 있는 선거는 14년 만인 1985년 2월에 있었던 ‘2.12 총선’이었다. 국민은 그동안 자유선거에 목이 말라 있었기에 2.12 총선에서의 투표율은 무려 84.6%에 달했다. 망명 중 미국에서 돌아온 김대중은 김영삼과 합심해 신한민주당을 급히 만들고 창당한지 1달 만에 선거를 치렀다.

선거 결과는 그야말로 파란이었다. 신민당은 전국 합산 29.3%의 지지율로 지역구 50석에다가 전국구 17석을 얻어 총 67석으로 제1야당으로 등극하는 것은 물론 서울과 부산, 대구, 인천 등 대도시 지역에서 전두환의 민정당과 호각을 다투는 성과를 올렸다. 대구에서 민정당은 28.3%, 신민당은 29.8%, 민한당은 18.6%를 얻었다.

신민당은 선거 후 전두환이 만든 관제 야당인 민한당을 흡수해 1987년 6월항쟁의 발판을 만들었다. 이렇게 보면 1985년까지 선거는 지역감정에 따른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1988년 13대 국회는 여소야대가 되었다. 야당은 11월 5공비리 청문회를 개최했다. 정권비리 청문회는 헌정사상 처음이었다.

나는 5공 청문회를 매우 관심 있게 지켜봤다. 많은 증인들 중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은 전라남북도 계엄분소장이었던 윤흥정 중장이었다. 윤흥정은 매우 늦은 시간에 증언을 했다. 계엄분소장으로서 5.18에 대해 묻자 증언 내내 매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내 기억에 따르면 요지는 이렇다.

“5월 18일 밤부터 광주계엄사령관인 나에게 19일 새벽까지 항의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주로 시장과 교육감, 언론사 사장 같은 광주의 유력자들이었다. 군이 시민을 어찌 그토록 무자비하게 두드려 패느냐는 당혹스런 분노의 항의였다.”

나는 이 증언이 광주항쟁의 발발 기원을 가장 정확히 나타냈다고 본다.

5공 청문회에서 두각을 나타낸 스타는 노무현이었다. 변호사 노무현을 정치판에 발탁한 인물은 부마항쟁시 배후에서 활약한 김광일 변호사였다. 영화 『변호인』에 잘 나타나 있다.

노무현 의원이 격정적인 정의감이 특징이라면 김광일 의원은 차분한 논리가 특징이었다. 윤흥정 청문회 다음날 김광일은 땅을 치며 후회했다고 한다. 연이은 증인심문에 피곤했던 김광일은 밤늦은 그날 윤흥정의 증언이 있기 전에 집에 잠을 좀 자러 갔다고 했다. 만약 자신이 조금만 더 버텨 윤흥정을 심문했다면 청문회 최상의 증언을 얻어낼 수 있었다고 말이다. ‘의원들과 언론들이 윤흥정을 왜 더 파고들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 나는 지금도 의문이다.

(사진제공= 송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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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말 콜롬비아 시에나가(Ciénaga)에서 미국자본 소유인 바나나대농장 노동조합 파업이 한 달간 일어났다. 미국에 고분고분한 콜롬비아정부는 헌법을 중지하고 계엄을 선포, 파업진압에 군대를 동원했다.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은 파업과 항의 차원에서 시에나가 광장에서 열리는 예배에 참석하려고 모였다. 5분 안에 구역을 깨끗이 비우라는 명령에 군인들은 기관총으로 민간인들에게 무차별 사격했다. 이날 미국대사는 군인들이 1,000명 이상을 사살했다고 보고했다. 실제는 노동자 3,000명이 학살당했고 한다. 이 사건을 ‘바나나 대학살(Masacre de las bananeras)’이라 부른다.

마르케스(Gabriel Garcia Marquez 1927~2014)는 1982년 노벨상 수상작인 소설 『백년의 고독』에서 바나나 대학살을 이렇게 묘사했다.

“희생자 가족들은 군 사령부에 찾아와 소식을 물었다. 군사당국 관리들은 말한다. ‘꿈을 꾸신 게 틀림없습니다. 마콘도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현재도 일어나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여긴 살기 좋은 곳이니까요.”

유일한 생존자 세군도의 학살 목격담은 미친 소리로 취급했다. 그 후 사람들은 법적인 증거와 교과서 등을 인용하며 마콘도에는 바나나회사가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한다. 마콘도는 시에나가를 빗댄 도시다. 소설의 마콘도 사건은 1980년 광주학살을 떠올리게 한다.

광주항쟁의 발발은 너무나 단순하다. 더 이상 긴 말이 필요 없다. “군이 미쳐 날뛰면서 시민들을 무차별하고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니 시민 모두가 저항했다.”

1987년 대선에서 양김 분열로 6월항쟁의 성과를 까먹고 1988년 5공 청문회에서도 광주항쟁 의 뒤처리를 못한 점이 그 후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큰 짐이 되었다.

그렇다면 정치적인 지역감정의 기원은 무엇인가? 먼저 1987년 대선에서의 양김 분열이었다. 아직 우리 정치가 성숙하지 않았다는 걸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다음은 멋대로 날뛰며 왜곡을 일삼는 조선일보다. 1970년대 말까지 판매부수 1위 신문은 동아일보였다. 그 다음이 한국일보, 그리고 조선일보였다.

전두환의 임기가 끝나고 노태우 때 판매부수 1위는 조선일보였다고 한다. 다른 신문 판매부수를 합한 것보다 조선일보가 더 많았다. 조선일보는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을 영웅으로 부추기고 광주항쟁의 호남을 끊임없이 비하한 덕분에 전두환의 지원을 듬뿍 받았다.

현재 정치적인 지역감정의 기원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는 게 내 확고한 주장이다. 양김의 정치세력과 영향력은 이제 사라졌다. 적폐를 일삼으며 갈수록 커지고 있는 조선일보의 영향력은 마치 암세포마냥 한반도를 병들게 하고 있다.

적폐청산과 지역감정 극복의 제1과제는 바로 조선일보의 폐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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