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喜怒哀樂] 소장님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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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喜怒哀樂] 소장님 안녕~
  • 장현주
  • 승인 2007.12.20 15: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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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서울경기지부 2007 가을 소식지에 기고한 글의 전문이다.(편집자)

우리 사무실이 들어있는 건물의 관리인이자 주차원인 허명철 할아버지가 오늘부로 그만두셨다.

임대 자영업자들이 한 모퉁이씩 차지하고 있는 조합건물의 관리인 자리란 게 있으면 있는지, 없으면 없는지, 바뀌었는지 그대로인지 눈여겨보지 않으면 알 수 없게 마련이다. 하지만 20세기 끝자락인 1999년도에 신축건물이던 이 자리에 입주한 나와, 부하직원 하나 없는 관리소장으로 취직한 소장님은 말하자면 이 건물의 입주동기인 셈이다.

그동안 이 건물의 임대인들은 여러 차례의 물갈이를 거쳤다. 남아있는 입주동기라고는 단 세 명.

회의한번 소집하지 않은 말뿐인 번영 회장이자  헬스장주인인 5층의 대머리 아저씨와  나. 그리고 오늘 그만두시는 허명철 소장님뿐이다. 

임대인들이 바뀔 때도 송별회 비스무리한 것 한번 없었지만, 입주동기의 8년 인연이 아니더라도 소장님을 그냥 보내기는 좀 섭섭한 마음이었던 오늘. 맛난 것 사드리마고 팔을 붙들었다.

허명철 할아버지는 올해로 72세. 그야말로 꽉 찬 할아버지임에 분명하다. - -:; 하지만 그분을 그 연세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소장님의 민증이 까인 것은 몇 년 전. 몸에 심한 두드러기가 돋아서 3개월의 휴직신청을 내셨을 때다.

용역업체인 율산에서 파견된 알바생은 역시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지.

얼핏 보기에 허명철 소장님보다 십년은 형님으로 보이셨는데 이분, 출근 첫날 그만 사고를 내고 만다. 좁아터진 주차장에 손님차를 대다가 그만 벽을 박아버린 것.

이분은 한달치 월급을 몽땅 차 수리비로 꼴아 박고 그날 부로 해고를 당했다. 건물주차장에는 아직도 그날의 사고흔적이 남아있다.

알바생의 무능과 소장님의 유능함에 대한 뒷담화가 건물전체에 수런수런 번질 무렵, 소장님의 연세가 알바할아버지와 같은 70세라는 것이 비로소 밝혀진 것이었다.

8년 동안 한 건물에 있으면서 난 한번도 소장님이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시는 걸 본 기억이 없다. 30살도 넘는 연하인 내가 출근할 때 마다, 과장인 듯싶을 정도로 활기찬 목소리에 웃는 낯으로 "어서 오십쇼~"를 외치는 할아버지. 거기다가 15도 각도의 품위 있는 목례까지 덧붙이실라 치면 받는 쪽이 되려 민망해질 정도가 된다.

어느 날은 군복에 빨간 목도리를 하고 출근해서 목례대신 경례를 올려붙이시는 바람에 깜짝 놀란 적도 있다. 어쩐 일이냐고 여쭤봤더니 하시는 말.

"어~~ 기분을 좀 바꿔보려고 말이지. 껄껄"

우리 엄마는 가끔 점심도시락을 싸서 치과에 들르시곤 했는데, 둘만 있을 때 소녀처럼 키득대며 하시던 말이 기억난다.

"얘, 그 소장님은 참 사람이 좋아. 멋있잖니? 연애 걸고 싶어~ 얘."

물론 엄마는 남편이 살아있는 유부녀고 게다가 그 남편이 나의 아버지였던 관계로 난 엄마의 그런 고백( - -:;)을 농담으로라도 소장님께 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엄마는 뇌경색 때문에 이제 혼자 운전도 못하시고 아버지와 동반하지 않고는 사무실에 오실수도 없기 때문에, 난 오늘 안심하고 그 비밀을 폭로했다.

"저희 어머니 있잖아요. ㅎㅎ 소장님한테 연애 걸고 싶다고 그랬었어요. 요새는 아파서 못 오시지만 ^^"

"뭐! (껄껄껄) 근데 이제 하는 말이지만. 난 있잖아~ 이 건물에 8년 있으면서 한번도 여자 손목잡거나 그런 적 없어. 절~대로!"(누가 여쭤봤나요 ^^:;)

사실 소장님이 그만두시게 된 이유는 아픈 부인을 돌보기 위해서다. 할머님은 20년 동안 당뇨를 앓으셨다는데 가까이 사는 시집간 딸이 돌보고 있었지만 이제 해산과 산후조리 때문에 친정엄마를 돌볼 형편이 못되는가 보았다. 그리고 아마도 이제는 죽음을 준비해야할 시간이기 때문에 소장님 당신이 곁을 지키기 위해서인 듯 하다.

그만두겠다고 말씀 하시던 날, 배부른 딸이 거동 불편한 어머니를 모시고 화장실에 가다가 둘이 다 일어나질 못하고 결국 앉은 자리에서 볼일을 보고 말았다는 말을 하시면서 눈시울이 문득 붉어지시는 걸 보았다.

병원에서도 더 해줄 것이 없다며 퇴원을 권유했다고 한다. 3개월 정도 쉬어야 할 것 같다고 하셔서 그럼 휴직처리하고 복귀하시라 했더니, 사람구해다 앉혀 놓고 내가 일해야겠으니 다시 그만두란 소릴 어떻게 하느냐, 또 3개월이 될지 얼마가 될지 모르고..라고 말꼬리를 흐리실 때 이분이 배우자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아주 좋은 사람이란 느낌에 잠시 가슴이 흔들렸다.

정종 도꾸리라도 시켜서 한잔 대접하고 싶었는데 당신은 술도 담배도 못하는 분이라며 도리질을 치셔서 결국 밥만 시켰다. 부인은 소주 대여섯 병 정도는 거뜬할 정도로 술을 즐기는 분이라 병 때문에 비싼 한약을 먹는 중에도 술 생각이 나서 약을 끊었을 정도라 하신다. 이 정도면 거의 알콜중독에 가까운 듯한데 소장님은 당신이 술을 못하는 거 때문에 부인이 속상해 할까봐 술 마시는 걸 말리지 않으셨다 한다.

참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자꾸자꾸 든다. 우리 엄마가 이런 사람과 결혼했으면 좀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문득 떠오르고...(그럼 나는 태어나지 못했겠지 - -)

소장님의 풍채가 너무도 훌륭해서 과연 건물 관리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무슨 일을 하셨을 지가 참으로 궁금했는데, 해군을 제대하고 미군부대 피엑스에서 수송 일을 하다가 배도 타보고 카센터도 했었다고 하신다. 카센터 일이 하향곡선을 그으면서 아들이 그만두시라고 하는 바람에 60대들어서 한 5년은 놀러만 다니셨다고 한다.

지적이거나 사무적인 노동을 해본 적이 없는 분인데도 몸에 밴 듯한 이런 품위가 어떻게 풍겨나는 것일까?

꼬맹이 환자들이 고등학생 대학생이 되어 치과를 찾을 때마다 문득 문득 난 어떤 모습으로 나이 들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혹은 어떤 모습으로 나이 들고 싶은지를...

소장님은 쉽게 만나기 힘든 내 노년의 역할모델 중 한사람이다. 이제 더 이상  적다고 할 수 없는 내 나이를 의식해야하는 순간. 그것은 경험에서 우러난 관대함과 현명함이 필요한 때뿐이다.

30년 후에도 지금처럼 삶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지금처럼 여전히 나 자신과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남아있기를. 치과가 쫄딱 망해서 어느 맞벌이가정의 애보는 할머니로 취직하는 인생 대반전이 일어난대도 빨간 립스틱으로 기분을 바꾸고 흔쾌한 웃음 지을 수 있기를. 아니 다가올 내일이 매일 매일 그러하기를...

소장님 안녕히 가세요! 건강하세요! 늙지 마세요!!

장현주(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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