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윤의 미국 견문록] 멜라니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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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윤의 미국 견문록] 멜라니 3
  • 이상윤
  • 승인 2004.09.21 00:00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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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발치를 해야만 하는 이유

요즘 멜라니가 상악동염으로 고생하고 있다. 워터스뷰를 보지는 않았지만 치과에서 찍어본 파노라마 상에서만 봐도 상악동이 허연 것으로 꽉 차 보인다. 증상을 들어보면 더 심하다. 내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각종 상악동염의 불편한 증상과 더불어 수시로 녹색 드레인(green drainage)이 있다고 한다. 여기 와 있는 한국 이비인후과 선생에게 물어보니 역시 상당히 심한 수준이라고 한다.

근데 문제는 얘가 병원에 가기를 두려워 한다는 거다. 그 이유는 물론 돈 때문이다. 회사에서는 의료보험에 가입할 자격을 주었지만 한달에 300불 정도 내는 보험료가 부담되어 의료보험에 가입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비인후과 의사를 만날 때 약속당 최소 일 이백불씩 치료비를 내야 할 것이 뻔하고 수술이라도 하게 되면 기본적으로 수천불을 예상을 해야하니 병원에 갈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보험이 있다고 해서 다 백프로 치료비가 커버되는 것은 아니다. 보험에 따라 다르지만 80프로 이상 백프로까지 커버되는 것도 있고 반이상을 본인이 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보험이 있어도 웬만큼 좋은 것이 아니면 병원에 자주 가고 싶은 생각은 안들지만 그래도 마음이 든든하다. 물론 얼마만큼 좋은 보험인가 하는 것은 보험료를 얼마나 내는 가에 달려 있다. 미국의 복잡한 보험제도는 나도 아직 완전히 파악하고 있지 못하지만 언젠가 따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멜라니가 기껏 할 수 있는 것은 같은 교회 다니는 아는 간호사를 통해서 처방전을 구해 페니실린계 항생제를 사먹는 것이었다. 근데 별로 나아지는 기색은 없는 것 같았다. 병원에 가 보라고 몇 번 얘기는 해주었지만 내가 치료비를 내줄 수도 없고 별로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없다보니 나중에는 내가 너무 무책임하게 하나마나한 소리만 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멜라니가 병원가야 하는 줄 몰라서 안가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나의 또 다른 어시스트인 19세 백인 청년 제이콥에게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저런 기본적인 치료를 받을 수 없다니 it is sad 라고 했더니 제이콥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자기도 만약에 다치거나 해서 무슨일이 생겨도 병원에 가지 못할 거라고 한다. 제이콥의 그런 반응이 또 한번 나를 놀라게 했다.

이것참 슬픈일이 아닐 수 없다. 앞서 병원비로 파산지경에 이른 로리도 마찬가지이지만 멜라니나 제이콥의 경우도 일주일에 40시간 이상 일하는 사람들이다. 흔히 말하는 일하기 싫어한다고 인식되는 흑인이나 라틴계 무학력자들이 아니라 미국인의 절반이상을 차지하는 고등학교 졸업 학력을 갖추고(이 지역 통계를 보니 작년의 경우 고등학교 졸업자의 40퍼센트가 칼리지 이상의 상급학교로 진학했다고 한다) 풀타임으로 일주일에 40시간이상을 일하는 백인들이다. 그것도 제이콥의 경우는 작년에 졸업했으니 경력이 일년도 안되지만 로리는 30년 이상을 같은 직종에서 종사했고 멜라니의 경우도 9년을 어시스트로 일해왔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이런 기본적인 치료조차 받지 못하는 사회는 뭔가 크게 잘못돼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런 문제가 사회적으로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돈이 없으면 치료를 못 받는다는 인식은 너무도 당연히 받아들여지는 느낌이다.

내가 치과에서 환자를 볼 때도 한국같으면 발치는 전혀 치료계획으로 생각할 수 없는 그런 환자들이 발치를 하러 온다. 물론 치료비 때문이다. 얼마전에도 20대 초반의 잘 생긴 백인 청년이 상악 좌측 제일 대구치를 발치해 달라고 나한테 의뢰되어 왔다. 원래 임플란트와 상관없는 발치는 구강외과 의사에게 의뢰되지만 당시 회사에 구강외과 의사가 파트타임으로 일해서 2주인가 3주에 한번씩 오는 상황이어서 나한테 보내졌다.

그런데 상황을 보니 근심-교합면쪽의 치아 우식으로 초기 치수염 정도 되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 내가 수백번을 신경치료하고 크라운을 씌웠던 그런 전형적인 경우였다. 엑스레이 상으로 우식증은 펄프 혼정도에 닿아있고 남아 있는 치질도 충분해서 도저히 발치를 생각할 수 없었지만 환자는 아프다고 하고 신경치료와 크라운을 할 경우 예상되는 2000불 정도의 비용은 지불 할 능력이 안되니 뽑겠다고 하는 것이다. 결국 나는 환자의 얼굴처럼 잘 생긴 제일 대구치를 뽑아 주고 이백불 정도 charge 했다.

또 얼마전에는 12살짜리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흑인 소녀가 엄마손에 이끌려 발치를 하러 왔다. 하악우측 제2대구치였다. 엑스레이 상에서 아직 치근단도 완성되지 않은, 소녀처럼 싱싱하고 뿌리가 긴 치아가 아프지만 돈이 없다는 이유로 뽑히게 된 것이다. 나에게 의뢰를 한 제너럴 덴티스트나 소녀나 그 엄마나 너무나 당연하게 발치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엄마에게 물었다. 지금은 돈이 없어서 치료를 못하지만 나중에 돈이 생기든지, 아니면 좋은 의료보험을 가지게 되면 치료를 해주고 싶냐고. 그랬더니 엄마가 당연히 그렇게 한다고 한다. 그럼 꼭 그렇게 해주라고, 이 치아는 얘가 앞으로 수십년을 사용할 치아니까 꼭 치료해 주라 하고 학교에서 배운대로 우식상아질을 긁어내고 다이칼로 캐핑을 해주었다.

다행히 우식증은 교합면 쪽에만 있어서 긁어내기도 좋았고 아이알엠으로 템포러리 필링만 했지만 실링에도 별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환자에게는 6개월 후에 다시와 엑스레이 찍어보자고 하면서 보냈다. 그랬더니 엄마가 너무 고마워하는 것을 보고 참 우울했다. 십수년전 한국에서 치과대학다닐 때 무료진료나가면서나 보던 일들이 세계의 최선진국이라는 미국에서 일상적으로 있는 일이라니 말이다.

이상윤(미국 케이스웨스턴리저브대학 치주과 임상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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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co 2004-09-30 14:51:17
정말 너무 리얼한 미국의료보장 제도의 허실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만 보기 넘 아깝다는 생각...오마이뉴스...보건의료단체연합...인의협..
건강연대...참여연대 홈 페이지에도 마구~ 띄웠으면 좋겠슴다...씨리즈루해서
나중에 책도 만들고..헉 ^^; 이상윤 샘은 치과 뿐만 아니라 메디칼 쪽의 리얼한
얘기도 수고로우시겠지만 구체적인 예를 쬠 조사하셔서 써주시면 정말 좋곘다는
생각 해 봅니다...아참 글구 치수염때 발치 마시고 Emergency Pulpotommy(5분
technic)해주면 발치 안해도 되지않을까여?...^^ 좋은 기사 감사~ *^^*

김지연 2004-09-24 11:40:51
이상윤 샘께서 계속 연재하시는거 같은데, 이 글을 오마이뉴스나.. 한겨레나.. 뭐 그런데에도 보내면 어떨까요? 가상시나리오와 같이~!
의료시장개방 투쟁을 하면서 국민들에거 그 심각성을 알리는 것이 참 중요한데
이런 글을 통해서는 좀더 리얼하고 쉽게 다가갈수 있을것 같습니다.

ddaock 2004-09-23 15:35:31
앞서 신짱이 쓴 민간의보 가상체험이 그대로 이미 재현되고 있네요...ㅉㅉㅉ
진료의 선택권때문에 불소도 포기하자고 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신이철 2004-09-21 18:55:33
가상체험이 아니라 이런일이 실제로 존재하는군요.
지구상에 그것도 유일강대국의 의료현실이라니...
대한민국의 미래가 될까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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