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전태일, 우리 역사 도덕의 두 좌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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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전태일, 우리 역사 도덕의 두 좌표
  • 송필경
  • 승인 2024.01.16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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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시론] 송필경 논설위원
마석 모란공원에서 열린 '문익환 목사 30주기'에 참석한 (사)전태일의친구들 (제공=송필경)
마석 모란공원에서 열린 '문익환 목사 30주기'에 참석한 (사)전태일의친구들 (제공=송필경)

지난해 4월 29일 ‘전태일 재단’에서 주최한 ‘전태일 퇴근 길 걷기’에 참여했다.

전태일 열사가 집에 돌아갈 차비로 아침을 굶은 ‘어린’ ‘여성’ ‘노동자’에게 풀빵을 사주고 자신은 밤 10시에 약 12km 거리를 걸어서 간 길이 ‘전태일 퇴근 길’이다.

지난해 걷기 행사는 아침 9시에 시작해 쌍문동 옛 집터에서 평화시장 전태일 다리까지 걸었다. 걸으며 생각했다. 그 때의 퇴근 상황에 맞춰 이 길을 전태일 다리에서 쌍문동 옛 집으로, 밤 10시에 그것도 추운 겨울에 걸어 보자고 마음먹었다.

(사)전태일의친구들은 올 1월 말 낮에 마석 모란공원을 참배하고 난 뒤 밤 10시에 걷기 행사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마침 1월 13일 ‘문익환 30주기 기념문화제’가 마석 모란공원에 있다는 소식에 행사를 앞당겼다. 준비 기간이 짧아 다소 서둘렀다.

부족한 준비에도 ‘민족통일 선구자 문익환’과 ‘노동해방 선구자 전태일’을 동시에 만날 수 있다는 기대만은 한껏 부풀었다.

무박 2일 긴 버스 이동이기에 28인승 버스로 이동하기로 했다. 힘든 내용의 행사이기에 짧은 기간에 버스 정원 절반이라도 모을 수 있을까가 가장 큰 걱정이었다.

다행히 거창에서 한 분, 안동에서 한 분, 영천에서 두 분이 오셔 21명이 대구서 출발했다. 올 때는 서울서 3명이 합류하여 24명이 대구로 왔다.

지난 13일 아침 9시 반 마석 모란공원으로 출발하려 했으나 점심 도시락이 늦어 9시 50분에 출발했다. 시간이 늦을까 휴게소 1곳에서만 10분밖에 쉬지 않고 버스는 달렸다. 운전 기사분의 노련한 솜씨로 1시 20분에 모란공원 행사 시간에 딱 맞춰 도착했다. 묘지를 찾아 올라가니 문목사님 추도식이 막 시작하고 있었다.

이어 2시부터 모란공원 주차장에서 기념문화제가 있었다. 5백 명은 넘고 천 명에는 못 미치는 많은 분들이 오셨다.

이름 난 민주인사들이 자리를 메웠고, 오랜 만에 귀한 분들을 많이 만났다.

함세웅 신부님은 추모사에서 대충 이런 내용의 말씀을 하셨다.

“제사에나 절에서 문익환 목사님은 예를 갖추고 큰 절을 하셨어요. 기독교인으로 의아해서 묻자 ‘이것은 우리 문화의 일부예요.’하시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저는 여기서 문 목사님에게 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나는 함세웅 신부의 추모 증언에서 종교 독단을 배제한 민족민중 친화적인 문 목사 삶의 진정성을 느꼈다.

늦봄 문익환, 선생님은 호처럼 늦은 봄의 따사로운 햇볕으로 우리 민중사에 이름을 남긴 분이다.

환갑이 다 될 무렵 민족민중운동에 뛰어들어 특히 통일운동에 전념하시면서 위대한 발자취를 우리 역사에 깊이 남기셨다.

거침없는 정의의지 실천, 열정적인 연설 그리고 천의무봉한 맑은 글과 시로 민중에게 정말 따사로운 햇볕을 선사하셨다.

그 외 많은 분들의 추도사 내용 역시 따뜻한 햇볕 같은 기억이었다.
마석 모란공원에서 문익환 목사님을 만나다니 참으로 행운의 날이었다.

목수이자 목각공예사이자 전태일 문학상 1회 수상자인 시인 조기현(필명 조선남)님이 정성스레 목각한 문익환 목사님의 초상을 문성근 배우님께 전달하였다. 이 작품을 모두들 멋지다고 표현했다.

(제공=송필경)
(제공=송필경)

4시 반 추모제가 끝나고 (사)전태일의친구들은 안양에서 오신 조영래 시인, 여기서 합류한 안철택 교수와 함께 전태일 열사, 이소선 어머니, 조영래 변호사의 묘소를 참배했다.

‘전태일 재단’의 이사장 이덕우 변호사, 사무총장 한석호, 그리고 재단의 전 이사장 이수호 님이 우리를 안내하고 단체 사진을 찍어 주시며 같이 다녔다.

5시에 모란공원 행사를 끝내고 그 분들과 청계천 전태일 기념관으로 향했다.

전태일 기념관에 도착한 뒤 바로 인근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이덕우 이사장님이 40여 명 식비를 지불하셨다. 식사 후 전태일 기념관을 관람했다.

토요일 오후 7시 넘어 인데도 기념관 해설사 임도창님이 나오셔 약 40분에 걸쳐 전태일의 일생과 전태일이 남긴 의미를 친절하게 해설하셨다. 여기 3층 전시실에서 두 시간 가량 해설 과 

영상 그리고 전시물을 꼼꼼히 관람한다면 전태일의 깊이를 수준 높게 알 수 있으리라.

여기서 대구의 동료 천광호 화백과 최광태 사장을 만나 걷기에 합류했다.

전태일 다리에서 10시에 출발하려 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30분 앞당겨 9시 반에 출발하기로 했다. 오시기로 했던 몇몇 분에게 조기 출발 한다고 연락을 했다.

‘전태일의료센터’ 건립을 맡고 있는 임상혁 녹색병원장님과 이상혁 사무처장님과 일행들 그리고 치과후배인 대한치과의사회 부회장 홍수연 원장이 걷기에 참여했다.

9시 반,  12.5km 예상 시간 3시간 반 걸리는 '전태일의 퇴근 길' 걷기를 시작했다. 1월 중순 밤인데도 날씨는 초봄같이 약간 쌀쌀했다. 걷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선도는 기념관 해설하신 임도창 교육센터장님, 후미는 장경순 해설사님이 맡으셨다.

10시 30분 즈음 대학 민주동문회 최병현 후배가 전화가 왔다. 예정했던 10시에 전태일다리에 도착해서 기다려도 사람이 없어 연락이 왔다. 아차차, 이미 출발했다고 하니 지하철로 와서 성신여대역 입구에서 만나자고 해서 최덕희 후배와 같이 합류했다.

40여 명이 단체로 걷기에 가장 애로점은 화장실 문제였다. 몇 사람이 화장실을 찾으면 모두가 일단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토요일 늦은 밤인데도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과 자동차의 불빛이 번잡했다. 죽 늘어선 빌딩의 많은 불들이 꺼지지 않았다.

하늘을 쳐다봤다. 구름이 없는 것 같은데도 하늘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전태일이 60년대 다녔던 옛길 지도를 보면 혜화동을 지나 길음동부터는 거의 논밭인 시골길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 당시 하늘에는 별이 틀림없이 총총 수를 놓았을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칸트는 자비로운 동정심은 도덕적 행위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인간은 여유로울 때 마음이 이끌려 동정심을 발휘하다가 자기 처지가 어려워지면 동정심을 거두기 때문이다.

어려운 처지에서 하기 싫어도 그것이 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일을 할 때, 그 행위는 참으로 도덕적일 수 있다.

선이란 ‘어떠한 경향성(마음의 이끌림)이 없이 오직 의무로부터’ 어떤 일을 행할 때 발생한다고 칸트는 말했다.

전태일이 어린 여성 노동자들에게 차비를 털어 풀빵을 사 준 동정심은 아름다운 일이었다. 나아가 어린 여성 노동자의 환경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려 사회에 경종을 울린 행위는 칸트도 감탄할 만한 도덕적인 숭고함, 바로 그것 이었다.

늦은 밤부터 이른 새벽까지 ‘전태일의 퇴근 길’을 걸으며. 아무리 목적의식이 있어도 한번 걷기도 힘든 길이란 걸 나는 체험했다.

전태일은 단 한번 동정심을 발휘하려고 걸은 길이 아니었다.

전태일은 ‘어린’ ‘여성’ ‘노동자’의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며 어제도 오늘도 걷고 그리고 내일도 걸을 마음을 가졌으리라…

아무리 걷고 걸으며 생각해도 무지렁이 전태일의 처지에서는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리라.

자기 몸을 불살라 사회에 경종을 울려 여론을 환기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의무를 ‘살신성인’ 정신이 아니라 ‘살신성인’으로 실천했다면 대철학자 칸트도 감탄할 숭고한 도덕이 아니었을까.

우리 일행 약 40여 명과 ‘전태일 퇴근 길’ 12.5km를 한 밤에 걸을 때, 나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름이 끼어 있지는 않은 것 같은데 별이 보이지 않았다.

휘영청 밝은 가로등과 쉴 새 없이 다니는 자동차 불빛 그리고 밤이 되어도 끄지 않는 건물의 빛이 신비로운 별빛을 보이지 않게 한 게 아닐까?

전태일이 걷던 그때 별빛은 밝았으리라. 아마 총총한 별빛에서 어떤 영성(靈性)을 얻지 않았을까?

(제공=송필경)
(제공=송필경)

칸트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경탄하게 하고 존경하게 하는 두 가지. 하늘에 반짝이는 별과 내 마음 속의 도덕률”
전태일은 아마 그 당시 반짝이는 별 아래 걸으며 자신의 마음 속 도덕을 깊이 가슴 속에 새겼으리라.

대철학자 칸트도 전혀 예상치 못했을 그 숭고한 도덕을 말이다.

숭고한 연민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인은 많다.

아프리카에서 처참하게 압박받은 원주민에게 연민의 활동을 한 슈바이처가 그랬다.
인도에서 처참한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한 주민들에게 연민의 활동을 한 데레사 수녀가 그랬다.

두 분은 위대한 연민으로만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전태일은 아침 굶은 ‘어린’ ‘여성’ 노동자‘에게 퇴근길 차비를 털어 늦은 밤 12km 걸어가는 연민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을 처절하게 옥죄는 제도를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노동청, 서울시, 언론사에 호소했다. 심지어 대통령에게까지 절절한 편지를 보냈다.

무지렁이가 사방이 꽉 막힌 콘크리트 방에서 소리를 지른 셈이었다.

무지렁이는 단호히 결심했다. 소리가 아니라 자신이 불꽃이 되어 세상에 빛으로 호소하기로 했다.

전태일이 교회에서 그들의 처지를 개선해 달라고 그토록 기도를 올렸으니 아마 하늘평화상을 하나님께 받았으리라.

소리는 하늘에 닿지 않을지 몰라도 숭고한 빛은 저 먼 하늘에 넘어 하나님께 다다랐으리라.』

14일 새벽 1시 10분 쯤, 옛지명 도봉구 쌍문동 208d0 전태일 열사 옛집터 도착했다.

12.5km 3시간 40분 걸었다.

옛집터 표지판에서 ‘전태일의료센터’ 건립 추진위원장인 임상혁 녹색병원장님에게 의료센터 건립 의의와 취지 설명을 들었다. 이 역시 무척 숭고한 작업이다.

대구 회원 24명은 28인승 리무진을 타고 대구로 내려오니 새벽 5시쯤 이었다.

내려서 모두 해장국집에 갔다. 얼큰한 해장국에 약간의 술을 곁들이며, 행사 소감을 모든 이가 말했다. 모두 숙연한 감동을 말했다.

힘듦의 크기에 따라 감동의 크기가 달라진다.

감동이 밀려온 모두의 20시간이었다.

문익환! 전태일!

우리는 두 분의 이름인 민족해방과 노동해방을 가슴에 언제나 간직하며 실천의 걸음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행사에 참여한 모든 분,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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