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유산』… 새로운 5월의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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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유산』… 새로운 5월의 ‘광주’
  • 이인문 기자
  • 승인 2023.05.22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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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치, 광주에서 ‘5월 행사’ 개최… 윤상원 열사 생가와 월봉서원 등 ‘탐방’
건치가 지난 20일 광주독립영화관에서 ‘5월 행사’를 개최했다.
건치가 지난 20일 광주독립영화관에서 ‘5월 행사’를 개최했다.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공동대표 김의동 이금호 이하 건치)가 지난 20일 5·18 광주민주화운동 43주기를 맞아 건치 광주전남지부(공동대표 김명규 정태술)와 공동으로 광주광역시 동구 소재 광주독립영화관에서 ‘5월 행사’를 개최했다.

건치 이금호 공동대표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행사는 ‘일제 강제동원 문제와 역사정의’라는 주제 아래 ▲광주mbc 다큐멘터리 『금주의 유산』 시청 ▲김의동 공동대표 인사말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국언 이사장 & 『금주의 유산』 홍진선 PD와의 간담회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문근영 배우가 내레이션을 맡은 『금주의 유산』은 지난 1942년 갓 낳은 아들을 두고 일제의 태평양전쟁에 끌려갔던 남편이 싸늘한 전사통지서 1통으로 돌아오고 유골조차 받을 길이 없었던 故 이금주 할머니가 1988년 광주 자신의 집에서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를 발족, 이후 강제동원 피해자와 가족 등 1,200여 명을 직접 만나 피해사실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기록하고 80여 차례나 일본을 오가면서 이른바 '광주 1,000인 소송' 등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들을 상대로 30년 넘게 투쟁을 이어온 과정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로 광주mbc에서 지난 2월 3일 방영된 바 있다.

『금주의 유산』 중에서
『금주의 유산』 중에서

이금주 할머니는 지난 1998년 일본 관부재판 1심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인권침해를 일본 사법부로부터 부분적으로 인정받기는 했으나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의 청구는 기각되는 등 일본 사법부에 제기한 ▲광주 천인 소송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소송 ▲관부재판 소송 ▲B·C급 전범 소송 ▲나고야 미쓰비시 여자 근로정신대 소송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소송 ▲한일협정 문서공개 소송 등 총 7건의 소송에서 17건의 기각을 받았다.

하지만 이금주 할머니의 노력으로 지난 2018년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의 한국 대법원 승소 판결의 밑거름이 됐다. 1920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나 우리 나이로 69세가 되던 해인 1988년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싸움을 처음으로 시작한 이금주 할머니는 지난해 12월 세상을 떠나 현재 손녀가 살고 있는 전라남도 순천 시립공원묘지에 묻혀 있다.

이금주 할머니의 유지를 이어가고 있는 이국언 이사장은 이날 간담회에서 “이금주 할머니가 일본에서 7번 소송을 기각당하면서도 굽히지 않고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의 피해회복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온 덕분에 지난 2018년 양금덕 할머니가 한국 대법원에서 승소할 수 있었다. 지금 양금덕 할머니가 대법원 승소에도 불구하고 가장 어려운 상황 속에 처해 있는 것은 모두 윤석열 정부 때문”이라며 “일본 정부가 아니라 우리나라 정부 때문에 모든 것이 다 무용지물이 돼버리고 다시 힘겨운 싸움을 해나가야 하는 이 현실이 참으로 기가 막히다”고 한탄했다.

아울러 그는 “이북 순천에서 태어나 이남 순천에 안장된 이금주 할머니는 지난 1940년 결혼을 해 광주에서 홀로 아들을 끼우며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민족의 고난사와도 같은 100년이 넘는 삶을 살아오셨다”면서도 “69세의 나이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이금주 할머니는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들을 대상으로 한 싸움이 ‘지는 싸움’이 될 것임을 알면서도 이 싸움을 시작하셨다. 처음부터 이 싸움이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라는 점을 전제하고서도, 또한 강제동원 피해자나 유족들에게도 ‘지는 싸움’이 될 것이라 말하면서도 그들을 설득해나갔던 이금주 할머니의 배포와 용기, 그리고 뚜렷한 자기 소신을 이제 우리들이 배워나가야 할 것만 같다”고 당부했다.

이국언 이사장 및 홍진선 PD와의 간담회 장면.
이국언 이사장 및 홍진선 PD와의 간담회 장면.

『금주의 유산』을 제작한 홍진선 PD도 “많은 분들이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한 펀딩을 해주셨기 때문에 『금주의 유산』을 제작할 수 있었다. 이금주 할머니가 30년이 넘게 직접 수기로 작성해온 자료들을 자리를 옮겨 영상으로 하나하나 찍어가면서 이금주 할머니의 삶과 내몸이 하나로 육화됨을 느꼈다”며 “먹고 사는라 잠시 잊고 있었는데 오늘 이 자리에서 당시의 그 육화된 느낌을 되살릴 수 있어 너무 감사하다”고 소감을 전했다.

건치 김의동 공동대표는 이날 인사말을 통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1980년 광주에서 시작된 것같다. 적어도 광주의 5월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고향이 아닐까 한다. 5월의 광주는 항상 정권의 부당함에 굴하지 않고 정말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해준다”면서 “앞으로도 5월의 광주가 우리들에게 축제보다는 민주주의를 꽃피우고 민주주의를 향해 더 나아가게 해주는 그런 다짐의 광주가 돼주길 바란다”고 피력했다.

이튿날에는 5·18 광주항쟁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했던 윤상원 열사의 생가와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8년간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논한 고봉 기대승의 위패를 모신 월봉서원 등을 탐방했다.

윤상원열사 생가 탐방 장면.
윤상원열사 생가 탐방 장면.

1950년 8월 전라남도 광산군 임곡면 천동마을에서 태어난 윤상원 열사는 1971년 전남대학교(이하 전남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 군 제대 후 1978년 10월 들불야학을 설립한 박기순의 요청으로 강학으로 참여했다. 당시 전남대 박관현 총학생회장도 들불야학 강학 출신으로 윤상원 열사와 함께 활동했으며 5월 18일 광주항쟁 발생 후에는 들불야학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투사회보’를 발행했다. 이후 계엄군이 물러난 후 도청항쟁지도부 대변인 직을 맡아 끝까지 전두환 군부에 항거하다 5월 27일 광주도청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현재 광주 광산구 천동마을에 마련된 윤상원열사 생가에는 윤상원 열사뿐아니라 그와 영혼결혼식을 올린 박기순 열사의 자료가 함께 전시돼 있다. 윤상원 열사도 당시 광주항쟁이 계엄군에 의해 곧 진압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윤상원 열사는 당시 계엄군의 광주도청 진입을 앞두고 도청에 남은 청소년들을 모아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기억할 것이다. 이 자리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비록 살아남지 못할 것이나 여러분들은 살아남아 역사의 증인으로 내일부터 싸워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고봉 기대승은 조선시대 중종부터 선조 시대의 문인으로 성균관대사성, 대사간, 공조참의 등을 역임한 학자이다. 전라남도 나주 출신으로 이황과의 서신교환을 통해 조선유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칠논변(四七論辨)을 전개한 바 있다.

월봉서원 탐방 장면.
월봉서원 탐방 장면.

월봉서원은 기대승 사후 7년만인 1578년 호남의 유생들이 지금의 망천사라는 사당을 세우면서 시작돼 임진왜란때 피해를 입어 지금의 산원동인 동천으로 옮겼으며 1654년 효종이 ‘월봉’이란 서원명을 내리면서 사우와 동서재, 강당을 갖추게 됐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월철폐령으로 문을 닫았다가 1941년 현재 위치에 빙월당을 새로 짓고 1978년 사당과 정판각, 내삼문, 외삼문을 건립해 1991년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날 역사탐방에는 고봉학술원 강기욱 원장이 해설사로 나서 윤상원열사 생가와 월봉서원 등을 소개했다.

건치 이금호 공동대표는 “다시 5월이 왔고 그날이 왔다. 43년 전 5월 그날의 희생은 우리 민주주의의 초석이 됐다”며 “그날의 5월 광주정신은 지금도 광주지역 곳곳에 서려 있다. 윤상원 열사의 생가부터 고봉 기대승을 모신 월봉서원, 그리고 이금주 할머니의 다큐멘터리 영상 등을 되새겨보면서 어제의 광주정신만이 아니라 오늘과 내일의 새로운 광주정신을 찾아보고자 이번 5월행사를 기획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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