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한 사랑의 ‘숭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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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한 사랑의 ‘숭고함’
  • 송필경
  • 승인 2023.04.10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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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깊이 알기④: 전태일과 윤동주의 ‘서시’

계란 알레르기가 심한 친구가 있었다. 계란이 조금만 들어 있는 먹거리에 예민하게 반응하기에 계란이 들어가는 과자나 빵 종류를 입에 댈 수 없었다.

어느 날 짜장면을 먹다가 계란 알레르기가 심하게 왔다. 상식적으로 짜장면에는 계란이 들어가지 않는다. 주인에게 항의를 했다. 주인은 그럴 리가 없다 했지만 이 친구가 주방장을 불러 추궁하자 솔직한 대답을 들었다. 너무 바빠 우동 그릇을 대충 씻고 짜장면을 담았다고 했다. 우동 그릇에 붙어 있던 아주 작은 양의 계란에도 예민한 알레르기를 일으켰다.

예민한 느낌 또는 반응은 여러 가지다. 알레르기 같은 신체반응의 증상이 병적으로 날카로울 때 예민하다고 한다. 무엇을 느끼는 능력이나 무엇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빠르거나 뛰어날 때도 예민하다고 한다.

계란 알레르기의 예에서 보듯 신체에 과도하게 예민한 증상은 개인에게 고통을 주지만 학문적인 지성 또는 예술적인 감성에 예민한 반응은 천재의 무기일 수 있다.

서양음악은 도레미파솔라시도까지 일정한 음정의 순서로 늘어놓은 7음 음계를 기초로 한다. 그런데 모짜르트는 도와 레 사이에서도 8개 음으로 구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모짜르트의 예민한 음감은 그의 음악을 그리움과 환희에 가득찬 천상의 감미로운 소리로 만들었다.

르누아르나 고흐같은 화가가 지닌 예민한 색감, 도스토옙스키나 톨스토이같은 문학가가 지닌 예민한 문학 감수성은 그들을 그림과 문학의 분야에서 대가의 지위를 누리게 했다. 과학계나 사상계에서도 그 분야에서 특출한 예민한 재능으로 불멸의 업적을 쌓아 인류의 삶에 크게 기여한 사람이 수두룩하다.

가치 있는 재능으로 위대한 삶을 이끌어가는 사람은 다양하다. 문학, 예술, 과학, 사상, 학문, 운동 등 어떤 한 분야에서 특별히 예민한 재능을 지닌 인물. 돈, 명예, 권력 획득에 예민한 본능을 발휘한 인물. 정의에 예민한 양심을 헌신한 혁명가 등등.

인간이 예민한 재능으로 추구하는 가치 가운데 모든 인류에게 가장 숭고하게 기여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타인을 배려하는 윤리적 가치가 으뜸이라 나는 생각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불쌍하고 가난하고 무시당하는 약자를 위한 '사랑'이 아닐까? 모든 이웃들과 나아가 모든 인류를 위한 '사랑'말이다.

유대인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에게 선택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비로 충만해 있으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계율을 어긴 자에게까지도 똑같이 베풀므로, 계율을 지키는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듯이 우리 또한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의 이런 예민한 사랑은 비기독교인 나에게도 엄청난 윤리적 가치로 다가왔다.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모순에 가득한 교리 해석으로 악행을 저질렀으면서도 인류에게 가장 영향력이 있는 종교로 자리잡은 원천은 예수가 이런 윤리적 가치를 인류에게 간곡히 호소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진=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약기 화면 캡처)
(사진=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약기 화면 캡처)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生)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위 글은 전태일이 분신하기 약 3개월 전인 1970년 8월 9일 일기의 일부이다. 예민한 감성을 담은 이 일기는 마치 윤동주의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를 읽는 듯하다.

전태일의 불쌍한 노동자 형제와 나약한 ‘어린 여성 노동자’의 동심을 향한 예민한 사랑은 단순한 말(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졌다. 구체적인 실천이란 완전한 헌신이었다. 자신을 버리고 자신을 죽이고 가야 하는 사랑의 헌신이었다.

비기독교인인 나에게는 전태일의 분신이 마치 가난한 자에게 사랑의 ‘복음(기쁜 말씀)’을 실천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오늘 우리 땅에 오신 듯한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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