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憐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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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憐愍)
  • 송필경
  • 승인 2023.03.03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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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깊이 알기②: 호세 마르티와 전태일

1. 호세 마르티(José Martí; 1853-1895)

아홉 살 소년은 쿠바의 사탕수수 밭에서 힘든 노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오가야 했다. 더러운 움막에서 무더기로 지내는 흑인노동자, 곧 노예를 보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그들의 슬픈 눈빛과 탄식 같은 노래가 마음 아팠다.

흑인 노예에게 폭력을 가하는 양심도 없는 감독을 볼 때는 몸서리쳤다. 갇힌 소년 노예의 눈동자와 마주치기도 했다. 능력이 없는 소년 마르티가 어린 흑인노예를 옹호할 수단이 없다고 느낀 그 순간, 그의 어린 영혼엔 분노가 스며들었다.

나중에 '나의 흑인들'이라고 부르게 된 연민이 그 당시부터 마르티의 가슴 속에서 싹을 텄다. 시간이 지날수록 연민을 지울 수 없었고 글로 쓰면서 연민의 싹은 정의감으로 자랐다.

“누가 흑인들에게 채찍질 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늘 그들에게 빚진 자인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는 어릴 때였습니다. 아직도 치욕으로 물든 뺨들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 중략 … 나는 그것을 보았고, 당시부터 흑인들을 옹호하기로 맹세했습니다.”

'그들에게 빚진 것'을 생각하는 삶, 그것이 9살 마르티가 '평등'이라는 신념을 갖게 한 동기였다. 그들의 치욕을 잊지 않는 것, 그 연민과 분노는 내성적이었던 마르티를 혁명을 꿈꾸는 시인으로 성장하게 했다.

억압받는 존재의 발견은 마르티를 고뇌하는 시인으로, 독립운동의 아버지로, 다재다능한 사상가로 만들었다.

마르티는 유년시절 두려움이 가득한 자기 또래 노예의 눈동자를 잊을 수 없었다. 또한 마탄사스에서 지내면서 자신에게 자연의 비의(秘儀 비밀스런 종교의식)를 가르쳐준 늙은 노예의 순수함을 사랑했다.

그 사랑이 마르티가 백인이면서도 아프로쿠바노(afrocubano 아프리카계 쿠바 사람)라는 정체성을 확신하는 힘이 아니었을까? 소년은 이 잔혹한 억압 앞에서 맹세했다.

“내 삶을 바쳐 이 죄악을 씻겠노라고!”

- 김수우 산문집 『쿠바, 춤추는 악어』에서 발췌 인용

2. 전태일(1948-1970)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 『전태일의 수기』에 있는 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50년 3월 전태일 가족은 부산으로 이사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옷 만드는 기술자인 태일이의 아버지는 전쟁 통에 일감이 많은 하야리라 미군부대에 취직했다. 형편이 나아져 꽤 큰 마당이 있는 널찍한 방에 세 들었다.

부산에는 피난민이 밀려들어 집집마다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형편이 못한 이들에게 베푼 태일이의 동정은 놀랄 만했다. 자기가 먹을 밥을 피난민 아이들에게 나눠주는가 하면, 엄마가 집에 없을 때는 밥을 할 줄 모르니까 쌀을 볶아서 아이들을 불러모았다.

하루는 엄마가 밖에서 일을 보고 돌아와 보니 태일이가 옷을 홀랑 벗은 채 방안에 가만히 있었다. 마당을 보니 피난민의 아이가 태일이 옷을 입고 놀고 있었다. 태일은 그 아이에게 자신의 옷을 다 벗어주었다.

“엄마 쟤가 옷이 없어 내 옷을 줬다. 나는 아버지 옷을 잘라서 나한테 맞게 만들어주면 되잖아.”

불과 5살 남짓한 아이가 한 말이다. 구두닦이, 신문팔이같은 길거리 비렁뱅이와 다름없었던 전태일은 18살 즈음부터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옷 만드는 노동자로 일했다. 봉제 가게에서 같이 일하는 자신보다 서너 살 어린 여성노동자의 처지를 이렇게 수기에 적었다.

“함께 일하는 열두어 살 먹은 소녀들은 대부분 누렇게 뜬 얼굴에 못 먹어서 퀭한 눈동자를 한 채 기관지염, 안질, 빈혈, 신경통이나 위장병을 앓고 있었다. 그들은 먼지 구덩이 다락방 작업장에서 주린 배를 안고 온종일 햇빛 한 번 못 보고 쏟아지는 졸음을 막으려 타이밍약을 먹으며 뾰족한 바늘끝으로 제 살을 찍어냈다.

손발이 마비되도록 일하는 데도 늘 하루 생계가 위태롭기만 하고, 병든 부모님께 약 한 첩 해드릴 수도, 자라는 동생의 학비를 댈 수도 없었다. 같은 또래 아이들의 돈 잘 버는 부모들을 위해, 청계천 어린 여공들의 꿈은 좁고 어두운 다락방에서 싹둑싹둑 잘려나갔다.”

전태일은 어린 여성노동자를 ‘부한 자의 더 비대해지기 위한 거름으로’ 또는 ‘사랑스러운 동심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어린 동심들은 일찍 출근해서 얼마 일하다 곧 졸았다. 태일이는 어린 동심들이 아침을 굶어 힘이 빠져있다는 걸 알았다.

태일이가 퇴근 후 12km 떨어진 집에 돌아갈 차비로 어린 동심에게 풀빵을 사준 사실은 결코 우연하거나 일회성 동정심이 아니었다. 차비가 없어 서너 시간을 걸어 밤늦게 집에 가는 걸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진제공= 송필경)
(사진제공= 송필경)

3, 연민(憐愍)

연민은 다른 사람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상대의 슬픔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감정이기도 하다. 연민은 동정심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보여주기식의 구원의 손길이 아니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가장 인간적이면서 순수하고 숭고한 감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연민을 비극을 경험하는 요소이며, 인간의 내면에 연민이 일어나 카타르시스(정신정화)를 느낀다고 했다.

불교의 화엄사상에 따르면, 이 세상은 거미줄의 씨줄과 날줄처럼 촘촘히 짜여 있어 거미줄의 한 편에서 신음하는 괴로움이 다른 반대편 거미줄에도 그 고통을 전한다고 한다. 세상일은 그 어느 하나라도 홀로 있거나 저 혼자 일어나는 법이 없다. 모두가 연관돼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의 원인과 결과가 얽히고 설켜 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악을 선택하기보다는 서로 연민을 갖고 선을 행하면 우리 모두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게 화엄사상이다. 주역(周易)에서는 남을 위한 선한 행동으로서의 연민을 언급하고 있다. 이른바 선을 쌓는 적선(積善) 행위다.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인류사에서 지극하고 온전한 연민으로 보고 있다. 십자가가 상징하는 사랑의 의미는 상대방의 감정을 같이 느끼는 공감능력이다. 예수의 생애는 그야말로 이타적인 연민의 감정을 최고조로 보여준다.

성경 시편 82편의 8절 가운데 3절과 4절은 연민을 행동으로 옮기라고 명령한다. “약한 자와 고아를 보살펴주고, 가난한 자와 고통받는 자의 권리를 찾아 주어라.” “약한 자들과 어려운 자들을 구해주고, 악한 자들의 손에서 그들을 구해주어라.”

4. 숭고한 자질

위 시편의 말씀이 기독교가 인류에게 요구한 핵심교리 가운데서도 핵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종교에서 이보다 더 숭고한 교리가 어디 있겠는가? 타고난 선한 덕성의 능력이 약한 자와 어려운 자에게 향할 때 역사는 진보한다고 나는 믿는다.

호세 마르티는 흑인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스페인 제국주의에 반대하다 체포당했다. 불과 16세에 강제노역형 6년을 선고받은 정치범이 됐다. 발목에 사슬을 감은 채 강제노역하면서 우여곡절을 겪다가 6개월 만에 감형을 받고 감옥에서 나왔다.

그 후 스페인으로 추방당해 거기서 대학을 다녔다. 미국으로 건너가 신문을 만들고 시를 쓰며 쿠바혁명당을 조직하고 군대를 모집해 쿠바로 가서 독립전쟁을 하다가 전사했다. 쿠바의 인민들은 카스트로나 체 게바라보다 호세 마르티를 훨씬 더 높이 받들고 우러러본다.

호세 마르티는 쿠바 독립의 아버지였다. 마르티의 시와 문학은 라틴 아메리카 전체 근대문학을 앞장서 이끌었다. 쉽게 이해하자면 호세 마르티는 쿠바의 호찌민이었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에서 분신한 만 22세의 젊은이 전태일의 고독한 행위는 한국노동해방의 이정표였다. 몸이 불꽃이 된 삶은 인류에게 던진 영원한 사랑의 사자후였다.

호세 마르티의 흑인 소년노예를 향한 맑은 영혼! 전태일의 노예에 다름없던 어린 여성노동자들을 향한 맑은 영혼! 두 사람은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 고통받는 사람의 진정한 벗이었다. 두 사람의 연민에 따른 위대한 실천은 인류가 가야 할 양심과 용기의 길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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