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을 되찾고 자유를 돌려받아야 낫는다
상태바
존엄을 되찾고 자유를 돌려받아야 낫는다
  • 문정주
  • 승인 2022.12.27 16: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정주의 공공의료 다시 읽기-6]
이탈리아 카타냐에서 환자, 가족, 정신건강센터 직원과 자원봉사자들이 성탄 축하 행사를 열었다.(2019. 12. 20.) (제공=문정주)
이탈리아 카타냐에서 환자, 가족, 정신건강센터 직원과 자원봉사자들이 성탄 축하 행사를 열었다.(2019. 12. 20.) (제공=문정주)

2015년 가을,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건강의집(Casa della Salute)에 견학 갔던 첫날이다. 키 큰 나무 사이로 현관이 보여 들어가려다 지나쳤다. 어쩐지 정문이 아닌 듯해서였다. 모퉁이를 돌아가니 역시 더 넓은 현관이 보이고 대표 의사인 루카가 마중 나와 있었다. 인사를 나누며 농담 삼아 저쪽 문으로 들어갔으면 당신을 만나지 못할 뻔했다고 하자 그가 말했다.

"이 건물에 현관이 5개랍니다"

5개나? 현관이 그렇게 여럿 있어야 하는지 묻자 빙긋 웃는다.

“이 안에 정신건강센터가 있거든요. 정신과 진료실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 12시간씩 여는 센터예요. 환자가 쉽게 이용하려면 가까이에 현관이 있어야 하는데 그쪽에만 따로 출입구를 두면 정신질환자를 분리하고 차별한다는 느낌을 받겠지요. 그래서 아예 현관을 더 많이 만들었어요. 어느 쪽에서든지 쉽게 들어올 수 있고 누구도 차별받지 않으니 좋아요.”

아. 순간 마음이 복잡해졌다. 예전에 나는 수도권 한 지역의 보건소장이었다. 8년간 일했던 보건소에 정신건강센터가 있었는데 건물 끝에 따로 출입구가 있어 센터 환자들이 이용했다. 환자에게 편리할 거라고만 여겼지, 그게 차별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는.

그날 루카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현관문 5개’가 그냥 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탈리아가 이룩한 정신의료에 관한 근본적인 개혁, 그걸 가능케 한 강력한 사회운동의 역사가 배경에 있었다. 그 운동에 불을 붙인 사람이 프랑코 바살리아(1924~1980)다. 

가두거나 격리할 대상이 아닌 도와야 할 사람

프랑코 바살리아는 정신과의사가 인도적인 의료인이 아니라 억압적인 감옥 간수에 더 가깝다고 느꼈다. ⓒ MLucan/Wikimedia Commons
프랑코 바살리아는 정신과의사가 인도적인 의료인이 아니라 억압적인 감옥 간수에 더 가깝다고 느꼈다. ⓒ MLucan/Wikimedia Commons

바살리아는 베네치아에서 태어나 자랐다. 당시 이탈리아는 무솔리니를 우두머리로 하는 파시스트 집단이 독재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에 대해 반항하며 고등학생 때부터 반파시스트 운동에 참여하던 그는 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4년에 체포되었다. 공포와 고통, 빈대, 오물, 질병과 함께 지내야 했던 감옥 생활은 전쟁이 끝나며 6개월 만에 끝났다. 그 뒤 바살리아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정신의학을 전공하는 한편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등 철학을 공부했다.

1961년에 대학을 떠나 정신병원 원장직을 맡았다. 당시 정신병원은 환자를 사회와 분리 수용하는 보호소였다. 1904년에 제정된 법에 따라 정신 이상으로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위험하거나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을 강제로 수용했다.

그가 일하게 된 북동부 국경 도시, 고리치아시 정신병원은 여느 정신병원과 다를 바 없었다. 높은 담에 창살이 있고 출입구를 철저히 통제하며 사방에 자물통이 채워져 있었다. 환자들은 입소하는 동시에 머리카락과 소지품을 모두 빼앗겼다. 세상과 단절돼 누구와도 연락할 수 없으며 언제 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병동에는 울부짖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감정에 북받친 환자가 난폭해지면 침대에 묶이거나 신체를 결박당하거나 전기쇼크 ‘치료’를 받았다. 사회는 사라진 존재인 환자에게 무관심했다. 장기간 수용이 예사였고 퇴원해도 정신병원 입소 기록이 낙인처럼 남았다. 

바살리아는 강압적 시설인 정신병원, 수용을 강제하는 사회제도 모두 도덕적 파산 상태라 판단했다. 환자는 사람이었다. 가두거나 격리할 대상이 아닌 도와야 할 존재였다. 갇히고 억압되고 무시당하는 상태에서 정신건강은 오히려 더 나빠졌다. 치료는 환자가 존엄을 되찾고 자유를 돌려받는 데서 시작한다고 그는 믿었다.

이미 1960년대 초부터 기존 정신의학을 비판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었다. 어빙 고프먼(1922-1982), 미셸 푸코(1926-1984) 등은 정신 이상이 대부분 개인이 받는 심리적・환경적 압박 또는 사회적 모순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며 정신질환자를 위험한 존재로 몰아 감금하는 제도를 비판했다. 이탈리아 사회도 변하고 있었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제조업이 번성하며 경제가 부흥했다. 사람들의 직업이 달라지면서 농촌 인구가 도시로 이동해 마을이 비고 교회가 문을 닫았다. 바뀌지 않을 듯 하던 것들이 바뀌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 바살리아는 병원 개혁에 착수했다. 무엇보다 병원 내부 권력구조를 허무는 일이 중요했다. 직원과 환자 간에 수직적인 구조를 수평으로 바꿔 인간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살리아는 환자에 대한 신체적 학대를 중단하고 간호사와 직원 전체를 재교육・재훈련했다. 환자를 진단명이 아닌 사람으로 보고, 자신을 권력을 휘두르는 간수가 아닌 치료자로서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교육이었다. 병원 안 곳곳에 둘러쳐 있던 울타리를 걷고 병동 문도 열었다. 그의 뜻과 노력이 알려지며 찾아온 젊은 의사들과 함께 힘을 모아 몇 년에 걸쳐 작업을 해나갔다.

결과는 경이로웠다. 환자 스스로 자기들을 위한 공간(주점, 클럽 등)을 만들었으며 경내에서 축제도 열었다. 소식지도 펴냈다. 환자로 입소해 감금 상태로 살아야 했던 고통, 지금 병원 공원을 산책하며 느끼는 즐거움, 퇴원을 기다리는 마음이 글로 인쇄되어 실렸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전체 집회였다. 환자, 간호사, 의사, 심지어 환자 가족까지 누구든 참석해 환자 삶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것이든 말할 수 있었다. 환자들이 직접 운영하고 회의록까지 작성하는 이 회의는 매일 오전마다 열렸다. 여기서는 음식, 담배, 작업에 대한 보수, 소풍, 병동 개방 등 소소하고 중요한 문제가 논의 되었다.

시일이 갈수록 참석자가 많아지고 발언이 늘었다. 자기 정체성을 부정당하고 침묵을 강요당하던 ‘정신 이상자’들이, 공개된 자리에서 발언하며 삶에 대한 지배력을 얼마간이나마 되찾아 민주주의를 실행하는 모습에 외부 방문객들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존 풋, 정신병원을 폐쇄한 사람, 권루시안 역, 2020.).

1968년 3월 『시설을 거부하다(L’istituzione negata)』가 출판되었다. ‘어느 정신병원에서 보내는 보고서’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고리치아 병원의 과거와 현재, 정신질환에 관한 이론, 환자 인터뷰, 전체 집회 회의록을 엮은 문집이다. 때는 바야흐로 68혁명 초기로 일상 삶에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학생・노동자의 거대한 에너지가 화산처럼 폭발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대중에게 정신병원의 잔혹한 실상과 그중 한 곳에서 벌어지는 변화를 보여주며 관련 제도에 근본적인 개혁을 호소하는 이 책은 대번에 큰 관심을 끌었다. 정신병원뿐 아니라 가족, 학교, 공장 등 권력구조 전반에 대한 저항에 동력을 제공하면서 엄청난 부수가 팔렸다.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

1971년에 바살리아는 고리치아에서 멀지 않은 트리에스테 산조반니 병원으로 일터를 옮겼다. 산간벽지인 고리치아와 달리 트리에스테는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주 수도이며 대학교와 시민운동과 국제 교류가 있는 곳이다.

수년간 고리치아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바살리아는 빠른 속도로 일을 진전시켰다. 이미 탈시설에 관한 사회적 인식이 높았고 뜻을 같이하는 의사, 학자, 활동가들이 전국에 있었다. 바살리아와 의사들은 흰 가운을 벗고 평상복 차림으로 환자 곁에 머무르며 대화했다. 직원에게 재교육과 재훈련을 제공했고 병동 문과 대문을 모두 열어 누구나 드나들게 했다. 환자와 직원이 모두 참석하는 회의를 열어 주요 사항을 결정하며 경제 활동을 위한 협동조합도 설립했다. 환자 60명이 만든 첫 조합이 병원과 계약을 맺어 청소를 담당하고 돈을 받게 되자 잇따라 조합이 결성됐고 이는 환자가 사회로 복귀하는 발판이 되었다.

68혁명이 추구한, 탈권위적이고 개방적인 사회를 이루려는 예술가들이 산조반니 병원으로 찾아와 문화 활동을 벌였다. 음악회와 파티가 열리고 여기에 시민도 참가해 병원 정원을 거닐며 환자와 어울렸다. 그림, 조각, 연극, 글쓰기 교실에서 시민과 환자가 공동으로 작업했다. 공연, 전시회, 토론회, 국제적인 모임이 열려 트리에스테에서 일어나는 역동적인 변화를 세상에 널리 알렸다.

바살리아의 개혁 목표는 정신병원 개선이 아닌 폐지였다. 환자가 시설이 아닌 지역으로 돌아가 입소자가 아닌 시민으로, 자기 정체성과 존엄을 회복해 사는 것이었다. 이를 위한 첫 단계로 1972년에 ‘병동’을 폐지했다. 질병명을 기준으로 환자를 분류하는 병동을 없애고 대신에 고향이 같은 환자끼리 병원 안 일정 장소에 거주하게 해 퇴원 뒤 살아갈 방법을 찾을 수 있게, 서로 버팀목이 될 수 있게 하는 조치였다. 다음으로는 병원 바깥에 환자를 위한 주택 확보와 정신건강센터 설치에 나섰다. 지방자치단체가 취약계층에 제공하는 공공주택을 환자가 받을 수 있게, 주택에서 생활하다가 상담이나 보호가 필요하면 가까운 센터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준비였다.

점차 병원 환자 대부분이 퇴원해 1971년에 1,182명이던 환자가 1975년에 470명이 되고 1977년에는 132명만 남았다. 다른 정신병원으로 간 환자는 한 명도 없고 모두 고향 집으로 돌아가거나 트리에스테 시내에 거처를 정했다.

개혁에 대한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지방 법원이 문제를 제기했고 지역 언론도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젊고 힘 있는 정치인인 미켈레 자네티가 모든 공격과 비판에 보호막이 되어주었다. 개혁이 진행되던 시기 트리에스테 광역권 의장을 맡은 그는 우파인 기독교민주당 소속으로서 사회당 당원 경력을 지닌 바살리아와 정치적 방향은 달랐지만, 개혁의 동반자로서 한결같은 협력 관계를 끝까지 유지했다.

(제공=문정주)
수용소에 감금된 정신질환자 사진. 제목은 “죽어가는 계층” (European Youth Parliament Italy. Out of mind, out of sight - How Franco Basaglia revolutionised the treatment of mental illness. 2020-05-13.https://eypitaly.medium.com/out-of-mind-out-of-sight-5b91a4ba9d65) (제공=문정주)

민주 정신의학(Psichiatria Democratica)

1973년에 바살리아를 비롯해 이탈리아 곳곳에 있던 정신의학자, 사회학자, 시민 활동가들이 ‘민주 정신의학’이라는 이름으로 그룹을 만들었다. 정신질환자를 배제하는 사회규범과 구조에 대항해 투쟁하고 자유, 독립, 존중 등에 기초한 의료 개혁을 추구하는 그룹이다. 투쟁의 첫걸음이 정신보건법 개정 운동이었다. 독립 좌파(Sinistra Indipendente)라는 소수 정당이 이를 지원하면서 운동은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의회에 보내는 개정 탄원서에 당시로는 엄청난 숫자인 75만 명이 서명했다. 이에 집권 연합의 정치인들이 움직여, 마침내 1978년 법이 개정되었다. 이로써 이탈리아에서는 정신질환자에 대한 강제수용이 금지되고, 정신병원도 더는 설립할 수 없으며, 기존 병원은 환자가 퇴원하는 대로 폐쇄하도록 했다. 정신질환자도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시민권을 회복하게 된 것이다.

환자를 퇴원시키기에 앞서 지역 정신의료 기반을 마련해야 했으므로 전국 정신병원이 완전히 문을 닫는 데는 20년이 필요했지만, 결국에 모든 ‘수용소’가 없어졌다. 바살리아가 일했던 산조반니 병원도 1980년에 문을 닫았다. 그 터에는 지금 낡은 건물 사이로 장미 공원, 극장, 찻집, 환자 협동조합, 트리에스테 권역 국영의료본부 사무실이 들어서 있다.

이제 이탈리아에는 정신병원이 없다. 법 개정 뒤 정신의료의 중심 역할은 정신건강센터(Centro Salute Mentale)에 맡겨졌다. 내가 볼로냐에서 보았던 것처럼 동네 한복판에 있는 센터로, 누구라도 언제든 찾아가 상담하고 정신과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장소다. 이 센터는 또한 지역에서 데이케어센터(정신질환자가 대인관계 등 생활 기술을 익히고 직업 훈련을 받는 곳), 낮병원(정신요법을 받거나 약 처방이 변경될 때 환자가 몇 시간씩 머무르는 곳), 요양원(밀착 관리가 필요한 환자가 간호사의 도움을 받으며 거주하는 곳)과 연결된다. 요양원은 작은 규모의 거주시설로 반드시 시가지 안, 환자와 가족이 드나들기 편리한 데에 설치한다. 때로는 건강의집 안에 설치하기도 한다. 이 외에도 지역 시민단체들이 있어 정신질환자와 사회를 연결하며 활동한다. 혹시 갑자기 상태가 나빠져 긴급히 입원해야 할 환자가 있으면 종합병원에 있는 소규모 정신병동에 7일 이내로 입원해 치료받는다.

바살리아는 1980년 갑자기 뇌종양으로 사망했다. 나이 56세, 정신보건법이 개정된 지 겨우 2년이 되던 때였다. 이후로는 그의 부인, 작가이자 고리치아 시절부터 활동가로서 함께한 프랑카 옹가로 바살리아(1928-2005)가 전면에 나섰다. 독립 좌파당 소속 상원의원이 된 그는 과거로 되돌리려는 저항 세력의 움직임을 막아내며 중앙정부가 관련 예산을 확보하게, 주정부가 개혁을 실행하게, 민주 정신의학이 현장에서 실현되게 다른 활동가들과 함께 투쟁했다. 긴 시간의 노력 끝에 이제 ‘민주 정신의학’은 그룹 명칭에 그치지 않고 이탈리아 정신의료 전반을 가리키는 별칭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1975년 9월 16일, 바살리아는 “저항하는 100명의 항공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정신질환자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트리에스테 상공을 돌아 착륙하는 행사를 벌였다.(https://ilbolive.unipd.it/it/news/manicomio-colorno-esperienza-rivoluzione) (제공=문정주)
1975년 9월 16일, 바살리아는 “저항하는 100명의 항공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정신질환자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트리에스테 상공을 돌아 착륙하는 행사를 벌였다.(https://ilbolive.unipd.it/it/news/manicomio-colorno-esperienza-rivoluzione) (제공=문정주)

함께 살아야 할 우리

혁명이라 해야 할 역사였다. 이탈리아가 이루어낸 변화도 놀라웠지만. 이처럼 놀라운 사실을 그 나라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는 것 또한 내게 충격이었다. 보건소장으로서 여러 해 동안 지역 정신건강사업을 감독하는 위치에 있었건만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디서 정보가 막힌 것일까. 미국, 영국, 일본에 치우친 우리나라 지식 수입체계 때문일까. 그런데다 이탈리아와는 대조적인 우리나라 정신건강센터, 소수 직원을 불안정한 신분으로 고용해 간신히 사업 명맥을 이어가는 열악한 센터 현실이 떠올라 괴롭기까지 했다.

조현병, 양극성장애 등 정신질환은 결코 드문 병이 아니다. 환자 수가 가장 많은 조현병 경우에는 ‘누구나 일생에 한 번 이상 걸릴 확률이 1%’라 할 만큼 환자가 많다. 이 환자들을 그저 손쉽게 입원시켜 격리하는 방식으로 ‘처리’해왔다는 점에서 우리나라는 예전의 이탈리아와 비슷하다. 물론 변화를 위한 움직임은 있다. 2016년에 정신건강복지법을 탄생시켜 강제 입원을 까다롭게 하는 등, 입원 중심 정신의료에서 지역사회 중심 정신의료로 방향을 옮긴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환자가 시민으로서 권리를 유지하며 지역에서 치료하고 살아가려면 사회에 더 많은 준비가, 지역에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는 과연 어떤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가? 어떻게 노력하고 있는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