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 정치가 우수한 의학을 만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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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정치가 우수한 의학을 만났을 때
  • 문정주
  • 승인 2022.11.03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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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주의 공공의료 다시 읽기-5] 에밀리아로마냐주의 동네의료
볼로냐시 전경(제공=문정주)
볼로냐시 전경(제공=문정주)

이탈리아에서 주(州, Regione)는 저마다 사회경제적, 문화적 차이가 뚜렷하다. 고대 로마가 사라진 뒤 제각기 다른 환경 아래 다른 길을 밟으며 천 년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주와 주가 다르고 주 안에서도 도시와 도시 사이에 색깔이 다르다. 그렇게 서로 다른 20개 주에 이탈리아 헌법은 자치권을 보장한다. 이른바 준(準)연방제 국가인 것이다.

국영의료 또한 주별 분권과 자치로 운영된다. 중앙정부 역할은 국영의료의 목표, 원칙, 필수 서비스의 범위를 정하고 필요한 재정을 배분하는 데 그치고 의료 시행에 관한 모든 책임과 권한을 주정부가 갖는다. 체계와 조직 구성, 인력 고용과 배치, 일차의료 강화, 첨단 시설 도입, 병원 간 기능 연결 등은 온전히 주정부 몫이니 정확히 말해 이탈리아 국영의료는 20개의 ‘주영’의료라 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주별로 차이가 난다. 적극적으로 체계를 만들고 운영해 수준 높은 의료를 제공하는 주가 있는가 하면 뒤떨어진 채로 변화가 더딘 주가 있고, 중장기적으로 미래를 내다보며 예산을 효율적으로 투입하는 주가 있는가 하면 ‘염불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어’ 의료사업 이권을 둘러싼 추문만 무성한 주가 있다.

우수한 의학과 좌파 정치

에밀리아로마냐주는 이탈리아 북부를 가로지르는 포강 유역 평야에 있다. 주 전체 면적이 우리나라 전라남북도를 합친 것만큼 넓고 인구는 약 445만 명이다. 풍요로운 곡창 지대로서 농업과 축산업이 발달했으며 20세기 초부터는 기계 공업 또한 크게 발달해 세계적인 스포츠카 페라리와 람보르기니를 만드는 회사, 모터사이클을 만드는 업체 두카티가 모두 이 주에 있다. 우리에게는 주로 협동조합이 활발한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주의 수도인 볼로냐는 학문의 도시다. 1088년에 유럽 최초 대학인 볼로냐 대학이 문을 열어 로마법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대학의 명성이 유럽 전역에 퍼져나가 각 지역에서 몰려든 학생 수가 13세기에 이미 1만 명이었다. 신곡을 쓴 단테,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도 여기서 공부했다. 설립 초기부터 의학 분야에 교수들이 있어 고대 그리스와 라틴 의학, 아랍 의학, 히브리 의학 등을 가르쳤다. 말피기(해부학), 발살바(해부학), 모르가니(병리학) 등 걸출한 학자를 배출한 이 대학 의학부는 18세기까지 유럽 의학계를 주도했다.

문디누스(Mundinus, 1270~1326)의 해부학 교과서에 실린 삽화. 그는 볼로냐 대학 교수로서 해부학을 복원한 학자로 인정받는다. (제공=문정주)
문디누스(Mundinus, 1270~1326)의 해부학 교과서에 실린 삽화. 그는 볼로냐 대학 교수로서 해부학을 복원한 학자로 인정받는다. (제공=문정주)

한편으로 볼로냐는 ‘빨갛다’. 애초에 이 이미지는 도시를 뒤덮은 붉은 기와 지붕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이곳에 뿌리내린 좌파 정치 이념을 상징한다. 과거 중세에 볼로냐를 포함한 에밀리아로마냐 지역은 교황령이었다. 가톨릭교회의 수장인 교황이 세속적인 왕 역할까지 겸해 통치하는 교황령은 어떤 면에서는 일반 왕국보다 더 억압적이었다. 19세기 중반, 북동부를 오스트리아가, 남부를 스페인이 차지해 지배하던 이탈리아에 통일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자 이곳 시민들도 합세해 마침내 1860년에 교황청 지배를 벗어나 통일 이탈리아왕국의 일원이 되었다. 이어 20세기 초에는 토리노와 밀라노를 중심으로 격하게 타오르던 사회주의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파시스트와 나치스에 저항하는 시민군의 본거지가 되었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는 저항을 이끌었던 공산당을 강력히 지지하는 지역이 되었다.

1970년에 주별 자치가 시작되자 에밀리아로마냐주에서는 공산당이 압도적인 다수 의석을 차지했다. 집권당이 된 공산당은 주정부를 혁신하고 행정 정보를 공개하며 경제・노동・토지・주택・사회보장・대중교통 전반에서 시민의 요구를 채워나갔다. 1980년대 말 소련이 해체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이탈리아 공산당은 당명을 민주당으로 바꾸되 좌파 노선은 고수했다. 이와 같은 변화를 에밀리아로마냐주 시민들은 받아들였고 이후 지금까지 좌파 집권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 하바드 대학교 정치학 교수인 로버트 퍼트넘(Putnam)은 이탈리아의 20개 주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를 관찰해 「사회적 자본과 민주주의」(2000)를 썼다. 25년에 걸친 비교 연구 결과, 에밀리아로마냐주는 의료를 비롯해 거의 모든 분야에서 다른 어떤 주보다도 뛰어난 성취를 보였다. 이는 집권한 좌파 정부가 행정 전반을 쇄신하고 개혁한 결과이며, 또한 기업들이 지역 특유의 공동체적 전통 아래 서로 경쟁하면서도 협력하는 경제 구조로 이뤄낸 결과라는 것이 퍼트넘의 분석이다. 좌파 정치와 자본주의 경제가 안정적으로 결합한 이 주를 그는 ‘제3의 이탈리아’라 했다.

의료는 의학과 사회적 제도가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해 형성된다. 여기서 제도는 정치적인 힘의 균형에 따라 결정되니, 에밀리아로마냐주의 뛰어난 ‘주영’의료는 지역적 자산인 우수한 의학과 시민들이 선택한 좌파 정치가 어우러져 빚어낸 결실인 것이다.

도시 한복판에서 볼로냐를 대표하는 광장 한쪽 벽면에 설치된 사진이다. “볼로냐 1943년 9월 - 1945년 4월. 자유와 정의를 위한, 이 땅의 명예와 독립을 위한 저항군의 희생”이라는 글귀 아래 수많은 사람의 얼굴 사진이 촘촘히 붙어 있다. 파시스트와 나치스에 맞선 항쟁에서 죽어간 2,059명을 추모한다. 사진 속 남녀 얼굴은 대부분 젊고 강한 신념을 느끼게 하는데 밝게 웃는 사진도 간혹 보인다. 흑백 사진이지만 마치 붉은 피가 뚝뚝 듣는 듯하다. (제공=문정주)
도시 한복판에서 볼로냐를 대표하는 광장 한쪽 벽면에 설치된 사진이다. “볼로냐 1943년 9월 - 1945년 4월. 자유와 정의를 위한, 이 땅의 명예와 독립을 위한 저항군의 희생”이라는 글귀 아래 수많은 사람의 얼굴 사진이 촘촘히 붙어 있다. 파시스트와 나치스에 맞선 항쟁에서 죽어간 2,059명을 추모한다. 사진 속 남녀 얼굴은 대부분 젊고 강한 신념을 느끼게 하는데 밝게 웃는 사진도 간혹 보인다. 흑백 사진이지만 마치 붉은 피가 뚝뚝 듣는 듯하다. (제공=문정주)

동네의료

에밀리아로마냐주에서는 시민이 건강을 기본적인 권리로 누릴 수 있게 주정부가 책임진다. 의료 정책의 중점은 동네의료(assistenza territoriale)에 있다. 이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일상에서 이용하기 쉽도록, 동네 구역 안에서 필수의료를 제공하는 활동이다. 가족상담실, 일차의료 의원, 전문의가 진료하는 외래진료센터, 노인과 장애인이 이용하는 요양시설 등이 동네의료의 기반이다.

건강의집 안내대. 방문객이 안내 담당자에게서 도움을 받고 필요한 정보를 얻었음을 감사하며 사진과 메모를 남겼다. (제공=문정주)
건강의집 안내대. 방문객이 안내 담당자에게서 도움을 받고 필요한 정보를 얻었음을 감사하며 사진과 메모를 남겼다. (제공=문정주)

그렇게 동네마다 있는 의료시설 중 한국인이 이해하기 특히 어려운 것이 ‘외래진료센터’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개인의원, 큰 병원, 보건소 중 어느 것에도 들어맞지 않는다. 겉에 드러난 생김새로는 과목별 진료실과 검사 시설 등을 갖춘, 큰 병원 건물에서 외래진료 공간만 따로 떼어낸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곳 환자들은 자기 일차의료 의사에게 진료를 이미 받았고 그 의사가 의뢰한 대로 전문과목 진료나 검사를 받으러 온다는 점에서, 그리고 어떤 것에든 환자가 내는 돈은 국영의료가 정한 약간의 부담금(2018년 기준으로 최대 36유로, 한화 4만6천원)에 그친다는 점에서 우리가 아는 큰 병원 외래와 성격이 다르다. 더욱이 이 센터는 주정부가 동네마다 설치한, 다시 말해 주민을 위한 동네 공공 진료시설이라는 점에서, 그처럼 가깝고 친숙하게 공공의료를 이용해본 적 없는 우리에게는 이래저래 생소하다.

2000년대 초, 이와 같은 동네 외래진료센터를 에밀리아로마냐주는 혁신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이탈리아 인구 중 고령층 비율이 20%로 늘어나 초고령 사회에로 들어서며 만성질환을 앓는 환자가 급속히 많아졌기 때문이다. 만성질환은 급성질환과 달라서 환자에게 다양한 문제가 일어나고 합병증도 드물지 않아, 단순히 진료하고 검사하는 것으로는 환자의 건강을 지킬 수 없다. 그러므로 초고령 사회에 적합한 새로운 방안이, 동네의료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할 획기적인 대안이 필요했다.

건강의집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건강의집(Casa della Salute)이다. 기존 외래진료센터를 계승하되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핵심 기능을 일차의료와 정보 교류에 두었다. 이 ‘집’에는 우선 모든 방문객을 환대하는 안내대가 있고, 넉넉히 자리 잡은 일차의료 진료실, 전문의가 진료하는 과목별 진료실, 검사와 치료가 시행되는 채혈실・영상의학검사실・간호사진료실・물리치료실・심리상담실, 분야 간 협동을 위한 회의실, 시민들의 건강활동에 쓰이는 다목적실 등이 있다. 동네 인구나 환경에 맞춰 규모를 조정하며 큰 규모에는 내부에 가족상담실, 정신건강센터, 노인과 장애인을 위한 데이케어센터, 요양원을 포함한다. 가히 종합 의료시설이라 할 만하다. 중간급 규모라 해도 서울시 구별 보건소보다 더 크다.

볼로냐 시내에 있는 보르고 레노 건강의집. 중간급 규모다. (제공=문정주)
볼로냐 시내에 있는 보르고 레노 건강의집. 중간급 규모다. (제공=문정주)

건강의집에서 일하는 직원은 공무원이다. 간호사와 조산사를 비롯해 의료 관련 여러 인력과 사무행정 직원 모두가 주정부 소속 공무원이다. 다만 일차의료 의사와 전문의는 자영업자로서 주정부와 협약 관계로 활동하므로 직원들과는 신분상 차이가 난다. 이와 같은 차이를 넘어 협력하는 방법은 팀워크다. 직원들은 일차의료의사와는 ‘일차의료 팀’을 구성해 협력하고, 전문의와는 ‘다분야 팀’ 안에서 중증환자 돌봄을 위해 협력한다.

에밀리아로마냐주는 주 전체 면적에 건강의집을 128개소 설치했다(2022년 9월 현재). 시민이 어디에 살든 의료에 접근하기 쉽도록 골고루 배치하되, 농촌이나 산촌에는 동네 중심에 큰 규모로 설치해 지역의료 자원 불균형을 해소하는 효과도 거두었다. 건강의집이 세워진 뒤 동네에 일어난 변화가 적지 않다.

첫째는, 일차의료를 24시간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일차의료 의사들이 그룹을 구성해 몇 시간씩 근무하는 방식으로 평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12시간 동안 건강의집 진료실을 운영하며, 야간과 휴일에는 따로 당직 전담 의사가 근무한다.

둘째로, 정보를 얻거나 교류하기가 쉬워졌다. 건강의집에는 경험 많고 경력 많은 직원이 안내대에 있어 시민이 어떤 문제로 찾아오든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한편으로 일차의료의사・전문의・간호사・방문간호사・사회복지사・상담심리사・물리치료사 등 인력 간에 교류가 활발하게 일어나 환자 진료나 가정돌봄에 필요한 정보를 나누고 팀워크를 이룬다.

셋째로, 만성질환 환자가 동네에서 전문적인 관리를 받게 되었다. 건강의집에는 특히 당뇨병과 심부전증 환자를 위한 다분야 팀이 있어 환자에게 합병증이 생기거나 병세가 악화하지 않도록 진료, 왕진, 가정돌봄을 병행하며 지속해서 관리한다.

넷째로, 건강에 관한 시민 활동 여건이 좋아졌다. 동네 시민들이 건강의집 공간을 이용해 스스로 건강증진 활동을 하거나 환자 모임을 열 수 있으며, 봉사 단체가 취약계층 환자를 돕는 활동을 할 때 지원받을 수 있다.

산도나토산비탈레 건강의집으로 중간급 규모다.(제공=문정주)
산도나토산비탈레 건강의집으로 중간급 규모다.(제공=문정주)

건강의집 이름에서 떠오르는 것이 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북부 이탈리아 곳곳에 있었던 민중의집(Casa del Popolo)이다. 노동자와 소작인이 하루 일이 끝나고 모여 조합을 운영하고 정치 토론을 했다는, 읽을 줄 모르는 이가 글을 배워 깨우치며 다 같이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했다는, 약한 이들이 한데 어울려 불평등에 대항했다는 ‘집’이다. 건강에 대한 위협에 대항하는 데에도 이처럼 서로 어울려 힘을 합쳐야 한다는 메시지가 건강의집 이름에 담겨 있다.

롬바르디아주의 비극이 보여준 것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건강의집이 새롭게 조명되었다. 에밀리아로마냐주와는 여러모로 대조적인 롬바르디아주에서 일어난 대규모 감염 확산과 사망 때문이었다.

롬바르디아는 이탈리아에서 돈이 가장 많은 주다. 극우 정당이 장기 집권하며 1990년대부터 국영의료를 위축시키고 경쟁적인 시장 의료체계를 조성해왔다. 주정부가 동네의료를 무력화하는 한편 대형 사립병원 설립을 지원해, 수도인 밀라노에는 첨단을 달리는 사립병원이 다수 있다.

바로 이곳에서 2020년 2월 이탈리아 첫 코로나19 환자가 나온 뒤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감염이 퍼져나갔다. 여름까지 전국 환자의 40%, 전국 사망자의 50%가 롬바르디아주에서 발생했는데 주정부가 확산 통제도, 환자 치료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다. 대형병원에 의존하는 시장 의료가 얼마나 허약한지 여실히 보여주는 비극이었다.

2021년, 팬데믹 고비를 넘긴 이탈리아는 국영의료를 더욱 강화하기로, 특히 일차의료와 동네 중심 의료를 강화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먼저 20개 주 전체에 건강의집을 설치하기로 해, 벌써 여러 주에서 사업이 진행 중이다. 주정부 집권당이 좌든 우든 이 일에는 차이가 없다.

건강의집 간호사 진료실. 만성질환 관리를 위한 상담과 교육, 가정방문, 병원 퇴원 뒤 가정돌봄 등을 담당한다. (제공=문정주)
건강의집 간호사 진료실. 만성질환 관리를 위한 상담과 교육, 가정방문, 병원 퇴원 뒤 가정돌봄 등을 담당한다. (제공=문정주)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을 통해 무엇을 얻었을까. 실상 대한민국에서 의료는 롬바르디아주보다 더한 시장체계다. 정부가 책임을 회피해 온 지 수십년, 의료제도의 골격은 허약하고 왜소하며 대신에 시장이 거의 전적으로 의료를 주도한다. 시장의 목적은 수익에 있으니 환자의 건강은 뒷전에 밀린다. 코로나19는 비대한 시장의 가장자리에서 간신히 유지되는 우리나라 공공의료의 빈약함을 여지없이 드러내 주었다. 이대로 놔두면 우리 삶이 통째로 위태롭다는 사실도 일깨워 주었다. 

에밀리아로마냐주가 건강의집을 본격적으로 설치하기 시작한 때가 2007년이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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