쑨원- 정치를 고귀하게 만든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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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 정치를 고귀하게 만든 정치인
  • 송필경
  • 승인 2022.08.29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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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시론] 송필경 논설위원

타이완(臺灣)에서는 국기 ‘청천백일홍’ 아래에 쑨원 사진을 걸어 놓아 국부로 모신다. 천안문 광장에서는 중국의 국기 ‘오성홍기’를 쑨원 사진 옆에서 펄럭이게 한다. 반면 남한에서 높이 받드는 인물은 북한에서는 죽일 놈이 되고, 북한에서 위대한 인물은 남한에서는 여지없이 죽일 놈이 된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가 만든 좌우 이데올로기 양극화의 상황에서 양 진영이 모두 추앙하는 인물을 만나기 힘드나 독특한 예외 인물이 바로 중국인들의 쑨원(1866~1925)이다.

쑨원(孫文)은 타이완에서는 국부로 받들고, 붉은 대륙 중국에서도 최상의 대접을 받는다. 쑨원에 대해서는 섬나라 타이완에서나 붉은 대륙에서나 중국인의 존경심이 한결같다. 이는 타이완의 장제스(蔣介石)가 겉으로는 쑨원의 국민정부를 계승했고, 쑨원이 중국 역사에서 구현하려고 했던 혁명정신을 마오쩌뚱이 완성했기 때문이다.

외세의 침탈을 받았던 중국의 20세기 초중반 극단적인 이데올로기를 대표하는 인물인 장제스와 마오쩌뚱이 서로 쑨원의 후계자로 자처했던 일은 우리로써는 참으로 놀랍다.

이것은 곧 쑨원이라는 인물의 인간과 사상의 뒷편에 분화한 이데올로기의 틀 속에서 평가하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그리고 쫀쫀한 이데올로기의 이념으로는 재단할 수 없는 거대한 역사적 실천을 쑨원이 자신의 정치적인 삶에서 구현했기 때문이다.

쑨원은 유년시절부터 어떠한 이념의 구속이 없었으며, 의식은 국제적이었다. 쑨원은 마카오 부근 마을에서 한때 양복점을 했다는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은 가난하지 않았고 집안에 내려오는 전통적 구속도 없었다.

쑨원은 하와이에서 돈을 번 큰 형 덕분에 13살 때 하와이로 가서 영국공회 소속인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기독교 교리와 서구문물을 흡수했다. 1884년에는 홍콩의 퀸즈컬리지에 들어가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홍콩에서 서양인이 경영하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892년 내과와 외과 의사면허를 받아 의사 개업을 했다.

쑨원은 청소년 시절에 이미 서구문물을 정통으로 흡수했고 또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조국이 처한 현실에 정확한 통찰을 지녔던 인물이다.

쑨원은 병자에게 육체의 질병을 제거하는 물리적 호혜만 베푸는, 개인 구원을 하는 의사 역할을 하기에 앞서 사회 현실에 대한 정신적 자각을 환기해 사회 구원을 할 수 있는 정치가 역할을 더 시급하게 생각했다.

쑨원은 꾸앙동성(廣東省)에서 혁명봉기를 일으킨 것을 기점으로 혁명가로서 첫발을 내디딘 뒤, 거의 외국에서 살았다. 끊임없이 유랑하면서 국제적인 조직 활동을 벌였다.

이러한 쑨원의 일생에서 가장 감탄할 부분은 자신의 신념에 대한 헌신이며, 항상 대의를 위해 자기개인을 희생할 줄 아는 인간적 순수성이다.

쑨원은 평생을 자기부정 정신 속에 살았고, 끊임없는 좌절 속에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조직을 만들며 살았다.

해외에서 혁명 활동을 이어가다가 청왕조를 무너뜨린 1911년 10월 10일 무창기의(武昌起義)의 소식을 듣고 런던을 출발, 파리-마르세이유를 거쳐 상해에 돌아왔을 때 쑨원은 범국민적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그리고 난징(南京)에서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을 선포하고 임시총통으로 추대됐다.

(사진제공= 송필경)
(사진제공= 송필경)

해외 유랑의 고투 16년 만에 고국에서 총통이 되었지만, 청조의 군대가 아직도 베이징(北京)에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를 싸움 없이 해결하기 위해 채 한 달도 못돼 총통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만주 정권이 제위를 포기한다는 것과 북양군벌(北洋軍閥) 위앤 스카이(袁世凱; 1859~1916)가 공화체제를 공적으로 지지한다는 조건 하에 총통자리를 위앤 스카이에게 스스로 내주었다. 바로 이러한 태도가 쑨원을 위대하게 만들었으며 오늘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이 본받아야 할 정치인의 상을 구현한 것이다.

그 후 쑨원은 위앤 스카이의 협조를 얻어, 즉 그 부하로서 중국의 사회와 경제재건 계획에만 열중한다. 그리고 철도개발계획을 놓고 베이징에서 위앤 스카이와 회담을 한 뒤 쑨원은 위앤 스카이가 자기 계획에 관심을 표방하는 것을 보고 위앤 스카이야말로 새 공화국의 리더로서 최적임자라고 공공연하게 성명을 발표했다.

바로 이러한 점, 이렇게 대의를 위해 인간적 허식을 중시하지 않은 점, 민족·민권·민생의 삼민주의의 이상 실현을 위해 순수하게 자아를 헌신하는, 그 인간적 순진성이 역사에 깊은 감동을 남겼다.

무려 16년 동안 서글픈 해외유랑 끝에 총통의 대권을 잡았으면서도 나라를 위해 한 달 만에 대권을 내어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쑨원의 순진성은 위앤 스카이의 배신으로 처절한 배반감으로 변하고 말지만 오늘날 아무도 위앤 스카이를 추앙하는 사람은 없다.

이상 쑨원의 약력은 중국의 현대 문학을 대표한 작가 라오서(老舍; 1899~1966)의 작품 『루어투어 시앙쯔(駱駝祥子)』를 읽는데 도움이 되는 풀이를 한 ‘도올’ 김용옥의 글에서 발췌해 요약한 것이다.

지난 1987년, 군사독재를 청산할 절호의 기회에서 서로 양보하지 않고 자신이 대권을 차지하고자 했던 김대중·김영삼, 양김의 분열은 우리의 최현대사에서 가장 뼈아픈 잘못이었다.

이때 우리의 정치가 양김으로 인한 지역주의의 늪 속으로 빠져든 뒤, 정치권은 국회의원 자리 몇 개 따먹으면 된다는 목적을 가진 동이불화(同而不和)의 집단이었을 뿐, 서로 다른 방법으로 역사의 진보에 기여할 화이부동(和而不同)한 자세를 지금까지도 외면하고 있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서로 양보하지 않는 동거란 쉽게 깨지기 마련 아니었던가? 쑨원에 대한 도올의 외침이다. 그때가 바로 1986년이었다. 도올은 벌써부터 양김의 분열을 예감했던 것일까?

오늘날 한국의 정치인들은 바로 이 점, ‘서로’ 대권을 양보해 후세의 더 큰 영웅으로서 대권을 차지하는 슬기를 배워야 할 것이다. 정치의 속성이 그런 것이 아니라고 약은 체 하지 말고 미련한 이상주의를 실현한 실례가 인간세에도 얼마든지 있다는 역사의 교훈을 먼저 배워야 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춤추는 야합과 아집과 독선의 쫀쫀한 역사, 이제는 가라! 미련하지만 웅혼한 역사를 우리는 꿈꿀 수 없는가? 요즘 시국에서 쑨원의 웅혼함이 더더욱 간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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