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이 아닌 우리 시대의 ‘지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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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이 아닌 우리 시대의 ‘지성인’
  • 송필경
  • 승인 2022.06.22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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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시론] 송필경 논설위원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게 아니라 어려운 길이므로 가야 한다."

최근 독일 벤츠 자동차 회사에서 최고급 모델인 ‘마이바흐’ 100주년을 맞아 초호화 승용차 ‘S680’ 한정판 100대를 만들어 전 세계에 판매한다고 발표했다. 한국에는 17대를 배정했다. 

벤츠는 한국을 적어도 세계 5대 부자나라로 생각하고 있는 것같다. 아마 이 정도면 일본보다 더 대접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한국의 최저 임금은 OECD 국가 가운데 11위에 불과하다. 이렇게 대한민국은 세계 최상위 부자나라로 인정받고 있는데 이번 정부는 재벌을 비롯한 기업들에게는 감세를, 하루벌이 노동자들의 최저 임금은 억제하려고 한다는 뉴스가 있다. 

이런 부의 양극화를 심화하려는 기사를 보자 조금 친분이 있는 홍세화 선생이 생각났다. 홍세화 선생은 벌금을 낼 돈이 없어 노역장에 유치되는 사람들을 돕는 '장발장은행'의 은행장, 외국인보호소를 방문하는 시민모임 '마중'의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지난 1979년 홍세화 선생이 회사일로 프랑스에 출장갔을 때 한국에서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위원회) 사건'이 터졌다. 남민전의 일원이었던 홍선생은 '사상의 자유' 침해에 따른 난민으로 인정받아 파리에서 택시 운전을 하는 이주노동자로 생활했다.

그러나 지난 1999년 한국 땅을 다시 밟았고 2002년에는 '영구‘ 귀국했다. 그때부터 ‘자유인’으로 살면서 언론에 많은 글을 쓰고 책을 내면서 언제나 우리 사회의 핵심 문제를 다뤄왔다.

1995년 홍세화 선생은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란 책을 낸 뒤 한국에서 주목받는 지식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톡톡 튀는 발언으로 언론에서 인기를 얻으려는 그 흔한 지식인이 아니었다. 엄밀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말과 글을 정제해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또렷하게 비판했다.

이를테면 우리 시대 몇 안 되는 진정한 ‘지성인’으로 나는 본다. 1947년생인 홍세화 선생은 젊어서는 ‘남민전’의 통일전사였고, 만 75세인 지금도 실천진보운동의 최전선에서 전사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제공= 송필경)
(사진제공= 송필경)

다음은 지난 5월 30일자 오마이뉴스의 홍세화 선생 인터뷰 기사를 발췌 요약한 것이다.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게 아니라, 어려운 길이므로 가야 한다"는 문장은 인터뷰 기자에게 자신의 책을 선물하면서 써준 문장이라 한다. 이는 곧 홍세화 선생 자신의 삶이 아닐까? 아직도 어려운 길을 마다하지 않고, 가고 있는 홍세화 선생에게 현 시국의 인식을 들어보자.

홍세화 선생은 노동자·서민의 고통을 우려했고, 그들을 외면한 민주당에 회의감을 드러냈다. 민주당이 상대방을 반대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목표를 정하고 이루어내는 것에는 아무런 준비도 없었다고 진단했다.

'진보세력'이 대안이 되지 못한다는 지적에도 그는 솔직했다. "겸손하지 못했고, 학습이 부족했다"고 성찰했다.

“구체적인 민생문제인 일자리, 부동산·집, 교육문제에서 실패했죠. 부동산은 완전히 실패, 교육은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었고요. 일자리 문제에서도 최저임금 상승 등 뭔가를 많이 해보려고 했지만 역풍이 불자 바로 손을 놔버리면서 국민의힘 세력과 차별성을 두지 못했던 것이 (국민이 이번 선거에서) 결국 민주당에게 고개 돌리게 하는 결과를 빚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문재인 정부는 의회와 지방권력까지 장악했다. 군사정권을 제외한 역대 최강의 힘을 가지고도 개혁에 실패한 원인을 폭넓은 국제적인 시각으로 보았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국제 정치를 분석하면서 ‘브라만 좌파(지식 엘리트)’와 ‘상인 우파(자산 엘리트)’가 교대 집권하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피케티는 현실사회주의권이 무너지면서 사회주의에 대한 환멸로 인해 전반적인 우경화 현상이 일어난 것을 노동자정당이 실종된 원인으로 지적합니다. 한국은 사회주의에 대한 환멸이라기보다는 권위주의 독재를 어느 정도 극복하면서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고요.”

(1981년과 1988년 대선에서 미테랑 대통령을 연이어 배출해 14년을 집권한 프랑스의 대표적 좌파인 사회당은 이번 대선에서 12명 후보 중 1.75% 득표율의 9위로 몰락했다. 사회당은 뼈를 깎는 개혁이 필요하지만 현재 당내 내분도 수습하기 어려운 지경이라고 한다.) 

‘그나마 민주당이 탈바꿈해서, 노동자·서민을 대변하려면?’이란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저는 국민의힘은 '하면 안 되는 일을 하는 세력'이고 민주당은 '해야 할 일을 안 하는 세력'이라고 표현해요. 저는 586이 20대 때 권위주의 독재 시절에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데서 자긍심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서 진화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민주화가 어느 정도 성숙한 상황에서 뭘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없고, 실천도 잘 보이지 않아요. 민주당은 국민의힘이 하려는 것을 어느 정도 제어하는 것이 그나마 야당으로서 노동자·서민에게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진보정당 세력이, 지지도가 점차 약화하고 있는 이유는 이렇게 보았다.

"민주노동당 시절에 비해 퇴보하고 있습니다. 내부의 분열과 상처 등이 작용하는 것도 있을 텐데, 저도 그 안에 있는 한 명으로서 책임의식을 갖고 있고요. 주체적 역량의 측면에서 자성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한계도 있습니다. 한국의 교육과정을 통해서는 비판적인 안목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제까지 '메이데이' 등에서 시위를 한 경험도 없고, 자본주의 사회라면서도 정작 자본주의 공부는 안 하고요. 노동자나 서민들은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 인식이 너무 결여됐습니다. 좌파라고 하지만 그런 분들이 다 '브라만 좌파'인 이유도 거기에서 비롯합니다. 그래서 진보세력이 대중성을 확보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좀 예민한 이야기이지만, '노무현 효과'가 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분명 수구세력과 검찰이 적대와 분노로 만들었지만, 그러면서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 역시 '성역화'됐다는 겁니다. 그것이 대중에게는 진취적이고 조금 더 사회주의적인 것에 대해 일종의 장벽을 만들어놓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하죠."

한국의 '진보세력'이 성찰하고 반성해야 할 점에는 이렇게 답했다.

"크게 두 가지, '겸손하지 못함'과 '학습 부족'의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모순', 이를테면 '계급모순', '민족모순' 등에 대해서 '이것만 해결되면 다른 모순도 다 해결된다'는 배타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주장하는 바가 옳은 만큼 상대방의 주장도 옳은 부분이 있다는 점, 내 주장이 틀렸을 가능성에 대한 열린 자세가 너무 부족했어요.

또 '학습 부족'의 측면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보적이거나 비판적인 안목을 갖는 사람들이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안고 어린 시절부터 고민 속에서 생각을 형성한 게 아니라, 그저 어떤 선배를 만나고 그 선배를 통해서 정파까지 정해졌잖아요. 그러니까 세계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총체성, 보편성이 결여돼 있는데 스스로 그렇게 느끼지를 않아요.

나아가 민주화세력은 상대적 우월감을 드러내요. 선배나 학회 동아리를 통해서 소위 '의식이 깨어났다'는 건데, 정작 그 상태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거예요. 지적 우월성, 윤리적 우월성까지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학습을 멈춰 버리죠.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주장만 내세우고, 한국 사회의 모순을 함께 고민하는 동료들을 연대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의 대상으로 봤어요. 심지어는 극복해야 할 기득권보다 동료들에게 더 적대감을 표출했고요.

물론 진보정당운동, 진보노동운동 모두 너무 어려운 물적 토대가 문제였던 것은 맞죠. 몇 안 되는 자리를 다퉈야 할 때도 있었고요. 그럼에도 서로의 적대감을 극복해야겠죠."

사회의 주요 소통 창구로 등장한 SNS는 이렇게 보고 있다.

“한국은 지금 '설득은 안 되고 선동은 가능한 사회'인데 그런 부분을 강화시키는 쪽으로 SNS가 작동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토론이나 소통을 하기보다는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을 증폭시키고 진영논리를 강화시키면서, 공론장으로써의 의미를 잃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홍세화 선생은 그밖에 ‘진보세력의 한계 극복’과 ‘청년 진보세력’, ‘진보 언론’ 등에 대해 많은 견해를 밝혔다. 더 많은 견해를 원한다면 오마이뉴스의 기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10여 년 전, 홍세화 선생이 대구 어떤 후배의 시장선거 출정식에서 한 찬조 연설을 들었다. ‘정치는 고귀한 것입니다’란 주제의 당시 연설은 내게 감동적인 인상으로 가슴 속 깊이 남아 있다. 그 후 나는 ‘고귀한 정치’란 개념을 내가 할 수 있는 정치 행위의 모토로 삼았다. 

몇몇의 인연으로 홍세화 선생의 강의를 듣고 몇 번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다. 누구의 말이든 듣는 모습은 항상 진지했고, 누구에게나 절제된 말을 소탈하게 하시곤 했다. 술 한 잔 하시면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신다.

우리 시대 지식인이 아닌 ‘지성인’을 만나 알게 된 것은 내 생애의 큰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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