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5·18’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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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5·18’들
  • 송필경
  • 승인 2022.05.16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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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시론] 송필경 논설위원

Ⅰ.

1919년 4월 13일, 인도 북부 소도시 암리차르(Amritsar)에서 시크교도들의 바이사키 축제(Baisakhi Festival)가 있었다. 벽으로 둘러싸인 광장에 가족 단위로 군중 1만여 명이 모였다. 

비폭력을 내세우는 군중들이 영국 지배자들의 불의에 항의하는 평화로운 집회를 열었다. 지역군 사령관 다이어(Dyer) 준장은 그 집회가 자신들에게 하나의 모욕이라고 생각했고, 비무장 군중을 머지않아 폭도로 변할 집단으로 보았다.

다이어는 부하들에게 광장 주위에 진을 치도록 명령했다. 군중이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좁은 출구 하나뿐이었다. 다이어가 발포 명령을 내릴만한 군중의 행동이나 도발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었다.

다이어는 벽돌담에 도열한 부하들에게 겨우 130미터 떨어진 곳에 모인 남녀노소들에게 정조준 발사를 명령했다.

집회가 불법이므로 해산해야 한다는 어떤 경고나 포고도 없었고, 평화롭게 떠나라는 지시도 없었다. 다이어는 부하들에게 허공을 쏘거나 발밑을 쏘라고도 하지 않았다. 어떤 사전 조치도 없이 병사들은 비무장 무방비 상태인 군중의 가슴과 얼굴과 배를 향해 발포했다.

이 사건이 바로 ‘암리차르 대학살’이다. ‘대학살’이라고 하면 상대편에게 피에 굶주린 도륙을 의미하지만 이 도시에는 그 어떤 것도 없었다. 다이어 병사들은 평상시처럼 조용히 열을 지어 있었고, 군중들로부터 위협받거나 공격받지도 않았다.

그러나 여느 날과 다른 점이 있었다. 차갑고 냉정하게, 서두름도 열정도, 땀도 분노도 없이 총을 발사했고, 비명 지르고 울부짖다가 우르르 도망치는 군중을 향해 훈련한 정밀함으로 탄창을 비워냈다. 군중이 하나뿐인 출구로 몰리자 일제사격을 했다.

군중에게 10분간 1,600발을 발사했는데 579명이 죽고 1,137명이 심하게 다쳤다. 총알 1,600발에 1,516명을 살상했다. 84발만 목표물을 맞히지 못했으니 다이어의 임무가 얼마나 간결하고 잔혹했는지 알 수 있다.

암리차르 대학살은 정신 나간 흥분 상태의 행위가 아니라 의식적이고 주도면밀한 식민주의적 의지의 강요였다. 다이어는 미친 광란자가 아니라 능숙한 살인자였다. 그가 한 짓은 융통성이 없는 자의 악행이었고 군관료의 잔혹행위였다.

바이사키 날에 한 다이어의 행동은 그런 짓을 자행해서라도 수호하려 했던 식민지 체제의 사악함을 상징했다. 이 사실을 모든 계층의 인도인들이 끔찍한 공포 속에서 깨달은 것에 암리차르 학살 사건의 진정한 의미가 있다.

그 사건은 식민주의가 최악으로 치달을 때 어떻게 될 수 있는 지를 보여줬다. 설사 주인과 하인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불평등 속에서도 본능적으로 서로 존중해야 하는 선을 영국은 넘었다.

암리차르 대학살은 영국의 인도지배가 종말을 고하게 한 사건이었다. 영국이 비무장 비폭력 군중을 학살해 인도 민족주의 불꽃에 기름을 부었기 때문이다.

그 사건은 인도 민족주의 운동에서 간디의 지도력을 부각시켰고, 후에 인도 초대총리를 역임한 네루에게 독립 외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했다.

그 이전에 자신들의 정치적 정체성을 의식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던 수백만의 사람들을 인도인으로 거듭나게 했다. 인도인의 영국 충성파들은 민족주의자로, 합헌주의자들은 선동가로 변모했다.

간디의 인도 독립이라는 대의는 악마적이기까지 한 영국을 인도에서 몰아내기 위한 투쟁에서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네루는 학살 사건을 바라보는 영국인들의 반응이 그 학살에 못지 않게 나쁜 것으로 생각했다. 다이어는 공개적으로 환대를 받았고, 인도에 사는 영국인들이 모금까지 해 다이어에게 거금을 전달했기 때문이다.

- 이상 『네루 평전』(샤시 타투를 지음, 이석태 옮김, 탐구사 2009)에서 발췌 인용.

(사진제공= 송필경)
(사진제공= 송필경)

Ⅱ.

미국식 민주주의가 라틴아메리카에서 그 정체를 드러낸 사건이 1928년 12월 6일 콜롬비아 시에나가(Ciénaga)에서 일어났다. ‘바나나 학살(Masacre de las bananeras)’이라 한다.

미국 자본의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United Fruit Company; UFC)'의 바나나 대농장에서 더 나은 노동 조건을 요구한 노동조합의 파업이 한 달간 일어났다. UFC는 파업을 진압하라고 콜롬비아 정부에게 압박했다.

그러자 미국 자본에 고분고분한 콜롬비아 정부는 헌법을 중지하고 계엄을 선포하면서 파업진압에 군대를 동원했다. 비상사태 아래서 바나나 농장의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은, 파업과 항의 차원에서 시에나가 시내 광장에서 열리는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모였다.

5분 안에 구역을 깨끗이 비우라는 명령을 받은 콜롬비아 군인들은 기관총으로 민간인들에게 무차별 사격했다. 이날 미국 대사는 콜롬비아 군인들이 1,000명 이상을 사살했다고 보고했다. 실제는 노동자 3,000명이 학살당했고 한다.

마르케스(Gabriel Garcia Marquez; 1927〜2014)는 1982년 노벨상 수상작의 소설 『백년의 고독』에서 이 바나나 학살을 이렇게 묘사했다.

“희생자 가족들은 군 사령부에 찾아와 소식을 물었다. 군사 당국 관리들은 말한다. ‘꿈을 꾸신 게 틀림없습니다. 마콘도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현재도 일어나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여긴 살기 좋은 곳이니까요.”

유일한 생존자 세군도의 학살 목격담은 미친 소리로 취급했다. 그 후 사람들은 법적인 증거와 교과서 등을 인용하며 마콘도엔 바나나 회사가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는 마콘도 또한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마콘도는 작가 마르케스가 소설에서 시에나가를 암시하는 가상 지역이다.)

- 『백년의 고독』(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민음사, 2021)에서 발췌 인용

바나나 학살 이후 라틴아메리카의 미국 자본에 종속된 정권들은 미국 사주를 받은 콜럼비아 정부의 시에나가 학살을 탄압의 모범으로 삼았다. 미국 자본가들의 필요와 소유를 위해 자신의 나라를 억압하고 착취하는데 앞잡이 노릇을 한, 그야말로 괴뢰 정권이었다.

Ⅲ.

다음은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의 프레시안 기고문 일부다.

광주항쟁 당시 부산 앞바다에 미국 항공모함이 와 있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 중략 …

광주 학살은 우리에게 “국가란, 미국이란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반미의 무풍지대에 거센 반미운동을 불러일으켰다. 그 기폭제가 된 것은 1982년 2월에 있었던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이다. … 중략 …

풍문과 추측에 의존하던 광주에서의 미국의 역할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들이 나타난 것은 1996년이다. 미국의 탐사전문기자 팀 셔록(Tim Shorrock)이 정보자유법을 통해 4천 페이지에 달하는 5‧18 관련 미국 정부의 문서들을 받아서 공개한 것이다.

"결정적인 것은 21일 군의 대학살이 있은 뒤 열린 22일 백악관 회의이다. 여기에서 미국은 군의 학살을 알면서도 광주 점령 군사작전을 승인했다. 민주화보다 진압이 더 중요하다는 것으로, 이는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최대 실책이었고 미국은 광주에 사과해야 한다."

미국은 그동안 공수부대의 이동을 몰랐다는 등 책임이 없다고 밝혀왔지만, 셔록은 그 허구성을 폭로했다.

- 반미 운동의 기원을 찾아서; 부산 미문화원 한국의 반미운동과 자주파는 이곳에서 시작했다.(프레시안 2021.04.07.)

Ⅳ.

유대인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 뒤 독일을 첫 공식 방문한 음악가 메누힌(Yehudi Menuhin :1916~1999)은 자신의 시대인 20세기를 이렇게 평가했다.

“인류가 품어온 희망 중 가장 큰 희망을 낳고는, 모든 환상과 이상을 파괴해 버렸다.”

- 『하노이에 별이 뜨다』(방현석 지음, 해남출판사, 2002)에서

20세기에 공업과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해 인류는 예전에 비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엄청난 물적 토대를 쌓았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진보적이었던 러시아혁명 이후 극좌라는 일부 몹쓸 사생아가 태어났고, 서구 자본주의는 극우 파시스트라는 포악한 자식을 대놓고 길렀다.

이들의 출몰과 대립으로 광적인 증오가 이전 세기보다 더욱 널리 퍼졌고, 야만적인 대량 파괴와 끔찍한 살상을 아무 거리낌없이 저지른 적이 인류역사에 일찍이 없었다.

자본주의 모순에서 비롯한 제1·2차 세계대전, 그 때 발생한 유대인 학살, 미·소 냉전이 부추긴 한국전쟁, 중국의 티베트 침략, 미국 야욕이 저지른 베트남전쟁, 소련의 아프간 침공, 석유쟁탈을 위한 걸프전쟁, 화약 냄새가 끊이지 않는 이스라엘과 주변 중동, 그밖에 남미·아프리카·동유럽에서 벌어진 분쟁·약탈·침공 따위와 우리의 ‘518 광주’ 같은 사건이 끊임없이 이어진 20세기는 메누힌의 말대로 인간의 존엄을 여지없이 파괴했다.

암리차르 학살을 겪은 네루의 말이다. “그 소행을 승인한 영국의 냉혹함은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부도덕하고 천박스러워 보였다. 내가 다닌 영국 사립학교 용어로 말하자면 ‘버릇없음’의 극치였다. 그때 나는 예전 그 어느 때보다도 제국주의가 얼마나 야만적이고 부도덕하며 그것이 얼마나 영국 상류층의 정신을 병들게 했는지 생생하게 깨달았다.”

광주 학살에 아직도 수구적 기득권층은 반성하지 않고 있다. 북한 소행의 폭동을 정당하게 진압했다는 속마음을 감추지 않고 넌지시 내비치고 있다. 전두환을 찬양하는 일부 병든 정신의 무리들이 앞으로 5년 동안 활개를 치리라 생각하면, 진실의 끈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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