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건의료인들이 지난달 29일 오전 10시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건강과 생명을 파괴하는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차별금지법’ 제정을 국회에 촉구했다.
차별금지법은 합리적 이유 없이 성별, 장애, 나이, 언어, 인종, 국적, 용모 등 신체조건과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 및 가구의 형태와 상황, 종교, 사상,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학력 등에 따라 차별하는 행위를 금지한다는 내용의 법안이다. 지난 2007년 노무현 정부에서 최초로 추진했고, 이후 15년 간 여러 차례 입법 시도가 있었지만 '사회적 합의' 등을 이유로 번번이 좌초됐다.
현재 21대 국회에서는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대표발의한 ‘차별금지법안’과 더불어민주당 이상민‧박주민 의원이 각각 대표 발의한 ‘평등에 관한 법률안’. 더불어민주당 권인숙 의원이 대표 발의한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안’ 등 총 4건이 발의된 상태다.
‘차별금지법’ 제2절제24조 보건의료서비스 공급이용의 차별금지 항목에서는 ▲보건의료기본법에 따른 보건의료인은 성별 등을 이유로 환자에 대해 치료‧간호‧예방‧관리 및 재활, 보건의료 서비스 공급 이용을 차별하면 안되며 ▲보건의료기관은 성별 등을 이유로 보건의료서비스의 공급‧이용‧연구‧교육 등에 있어 차별해선 안되며 ▲의료서비스 공급‧이용에 있어 성별 등에 적합한 의료정보 등 필요 사항을 환자에게 제공해야 한다고 적시돼 있다.
754명의 보건의료인들은 지금까지 많은 의료기관과 의료인들이 개인적‧제도적‧구조적 차원에서, 역사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차별해 온 역사를 반성하고, 일부 보건의료인들이 차별이 정당하다는 왜곡된 주장과 행동을 한 것에 대한 제어의 의미로 선언문을 작성하고 기자회견을 개최하게 된 것.
작업환경의학전문의이기도 한 건강과대안 이상윤 대표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지킬 의무가 있는 보건의료인들이 차별을 철폐하자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 “차별을 정당화하는 일부 보건의료인들의 주장은 어떠한 의학적, 보건학적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의료계 무지로 위협받는 성소수자 건강권

이어 인하대학교 의과대학 최규진 교수는 한국사회에서 특히 성소수자들이 차별로 인해 받는 건강권 문제가 심각하다고 지적하며, 차별금지법은 우리 사회 전체의 건강권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최 교수는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성소수자의 35.9%는 의료기관에서 차별을 경험했고, 절반 이상은 성소수자에 대한 의료인의 지식 부족으로 진료도 받지 못했고, 약 28%는 호르몬 치료를 위한 정신과 진단이 필요하나 이를 제대로 받을 수 있는 곳이 없어 포기했다”며 “성소수자들 사이에서 ‘퀴어 프렌들리 의원지도’가 공유되는 현실은 의학계 전반의 무지와 차별을 반증한다”고 짚었다.
이어 그는 “2019년 미국 정신의학계는 성소수자 단체에 지지 성명을 발표하며, 동성애를 정신질환으로 규정하고 강압적으로 치료한 과오를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동시에 성소수자와 의료인의 관계를 ‘동지’로 천명했다”며 “그들은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성소수자의 정신건강에 악영향을 끼치는 주요 원인이며, 실제 성소수자에 대한 부정적 사회인식이 줄어듦에 따라 성소수자의 정신건강 문제가 감소했음을 근거의학으로 제시했다”고 소개하며, 차별금지법 제정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최 교수는 “코로나19는 특정 국가‧지역‧종교‧성적지향을 가진 사람들 때문에 유행하고 방역이 방해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이 병원은커녕 검사조차 받기 두렵게 만는 차별의 낙인 때문”이라며 “차별금지법을 요구하는 것은 의료윤리와 의학적 올바름에 부합할 뿐 아니라, 환자의 치료받을 권리를 보장해 차별로 인해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가 받는 건강문제를 예방할 강력한 수단이 될 것”이라고 피력했다.
편견‧혐오로 제대로된 진단도 받지 못한 여성

간호사인 김주희 선생은 책 『의사는 여자의 말을 듣지 않는다』를 인용하며 여성이 당한 건강권 침해 사례를 짚으며, 차별금지법이 단순히 동성애를 조장하고 표현과 신앙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주장에 반박했다.
김 선생은 “지난 1958년 시작된 볼티모어 ‘노화 종단연구’는 첫 20년 간 여성 표본을 한명도 조사하지 않고, 백인 성인 남성을 기본모델로 연구를 진행했다”면서 “그 결과 여성에게 나타나는 증상에 대해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진단하거나, 성인 백인 남성만을 기본 모델로해 약물 부작용을 겪기도 하고 여성에게 더 흔하다는 이유로 단순 ‘심인성 질환’으로 추정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ADHD 또한 성별로 인한 차별적 잣대로 여아의 ADHD는 제대로 연구되지 못해 지금도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라며 “여성‧성소수자‧난민‧타 인종에 대한 혐오가 존재하는 한, 인간 대 인간으로 온전히 존중할 수 없으며 편견의 잣대로 이뤄지는 의료계 내의 차별과 혐오 또한 보편적 건강권을 위해 반드시 해결돼야 하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보건의료에 있어 치료와 간호를 직접 제공하는 의료인은 환자에게 의료행위를 시행하는 주체로서 환자를 온전히 존중할 의무가 있다”면서 “더 나은 보건의료를 위해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한다”고 목소리를 높혔다.
바이러스는 정/비정규직을 차별하지 않는다

병원노동조합 권은혜 활동가는 보수적 의료계 분위기로 인해 직간접적인 차별을 받고 있는 수많은 보건의료계 종사자들에게도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병원에서는 의사, 간호사 등 환자를 치료하는 직종부터 환자를 돌보는 간병인, 병원 환경을 관리하는 청소노동자, 각종 검사를 시행하는 의료기사, 환자를 이송하는 노동자 등이 ‘환자’를 위해 한팀으로 움직이는 곳”이라며 “이들 중 일부는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기본적인 보호장비나 필수적인 휴가조차 제공받지 못한다”고 짚었다.
권 활동가는 “2015년 메르스 유행 당시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는 마스크 한 장 지급하지 않고, 감염예방교육조차 진행하지 않은 결과 모 병원 이송직원이 메르스에 확진돼 방역망이 뚫렸다”면서 “코로나19 펜데믹에도 마찬가지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의 접종이 끝난 후 남은 물량을 맞았고, 백신 휴가도 정규직에게만 제공됐다. 비정규직은 감염되면 가장 먼저 해고 위기에 몰렸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그는 “차별금지법이 진작 제정됐으면 정/비정규직 차별로 인한 문제는 없었을 것”이라며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차별금지법은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법인데, 170석이나 있으면서 ‘사회적 논의’를 앞세워 민주당은 법제정을 미루고 있고, 차기 정부는 차별적 언행을 내뱉고 있다”고 분노했다.
의약품 접근에 대한 차별…결과는 뻔하다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이동근 사무국장은 “인류는 코로나19라는 역사에 남을 만한 국제적 감염병 위기를 겪고 있지만, 백신이 개발되자 고소득 국가들은 철저히 저소득 국가를 백신 공급 대상에서 제외시켰다”며 “저소득 국가들은 백신 자체 생산을 위한 기술이전 및 백신 특허 유예를 요구했지만 고소득 국가들은 이를 거부했고 그 결과 인도에서 델타, 남아프리카에서 오미크론 변이가 생겨 전 세계를 휩쓸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백신 차별이 낳은 엄청난 후폭풍을 경험하고서도 백신차별은 여전하다”며 “올 4월 현재 아프리카 백신 접종 완료율은 20%에도 미치지 못하고, 아프가니스탄, 미얀마, 우크라이나 등 분쟁지역 난민들은 접종 자체에서 배제됐다”고 분노했다.
또 그는 비장애인을 표준으로 한 약국의 구조도 차별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휠제어를 탄 장애인이 동네약국에 접근하지 못하는 것, 청각장애인이 약국에서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하고 발달장애인이 약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채 발길을 돌리는 것도, 성소수자가 따가운 시선 때문에 약에 대해 묻지 못하는 것도 모두 차별”이라며 “이러한 많은 차별들이 차별금지법으로 하루아침에 해결되지 않겠지만, 차별의 현실을 인지하기 위해서 법 제정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그는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민주당과 국민의힘 의원들은 차별이 낳은 무수한 건강 위협을 어떻게 모른 척 하느냐”면서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차별을 금지하고, 혐오 사회를 막는 이 법안을 통과시켜라”라고 촉구했다.
차별금지법은 약자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

지난 10일부터 차별금지법제정을 촉구하며 무기한 단식농성 중인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대표이자,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이종걸 사무국장도 발언에 나서, 차별금지법을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규정하고 조속히 제정할 것을 촉구했다.
이 국장은 “2007년 차별금지법 논의 당시 병력으로 인한 차별금지 사유가 삭제됐는데, 이를 용인한 더불어민주당의 책임이 가장 크다”면서 “차별 받는 사람들은 건강문제에도 취약한데, 제대로 치료조차 받을 수 없는 게 현실이고 병력으로 인한 차별을 해소해 달라는 요구도 묵살됐다”고 분노했다.
이어 그는 “구조적 차별은 없고 오롯이 이 문제는 개인의 책임이라고 주장하는 당선자가 새로운 정부를 책임지게 되면, 검찰공화국이 아닌 혐오공화국이 될 것”이라며 “민주당은 공청회 계획이 채택됐다고 생색만 내지 말고 제정으로 답해야 한다”고 질타했다.
이 국장은 “우리는 더 이상 차별금지법조차 없는 나라에 살고 싶지 않다”며 “우리가 차별과 혐오에 무력한 정치를 바꾸고,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민주주의 변화를 이루자”고 목소리를 높혔다.
아울러 그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시민사회단체에 동조단식을 제안했고, 이는 내달 2일부터 진행될 예정이다.
한편, 이날 기자회견이 열린 국회 앞에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단체의 천막 농성이 펼쳐지고 있어 대조를 이뤘다.
아래는 이번에 발표한 선언문과, 선언에 동참한 보건의료인 명단이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754인 보건의료 선언 세계보건기구(WHO)는 ‘건강’을 “단지 질병이나 장애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온존(well-being)한 상태”라고 정의하고 있다. 또한 1981년 채택된 세계의사협회 리스본 선언 제1조는 “모든 사람은 누구나 차별 없이 적절한 의료를 제공받을 권한을 가진다”고 규정했다. 차별이 당사자의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건강을 침해할 뿐 아니라,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구성원 전체의 건강 수준이 낮다는 것은 이제 보건의학적 상식이다. 하지만 ‘헌법상 평등의 원칙을 실현하는 최초의 기본법’인 차별금지법은 발의된 지 14년이 지나도록 제정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우리 사회의 건강권 역시 온전히 실현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 보건의료계 754인은 차별금지법의 조속한 제정을 촉구하는 바이다. 국회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세력의 주장을 핑계 삼아 제정을 미뤄왔다. 그러나 차별금지 대상에서 ‘성적 지향’을 삭제해야 한다는 일부 보수·기독교단체의 주장이나 학력 및 병력, 출신 국가, 가족 형태 등에 대한 차별금지가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저해할 것이라는 일부 재계의 주장은 인권적으로도 말이 안 되지만, 보건의학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차별이 건강을 침해하는 객관적 근거는 차고 넘친다. 직접적인 폭력으로 인한 피해도 크지만, 일상적 차별 경험은 우울증, 불안증상, 심리적 고통 및 정신과적 질환과 관련이 있으며, 차별로 인해 받는 만성적인 스트레스는 심혈관계 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 성소수자가 경험하는 차별이 건강에 직접적인 악영향을 끼친다는 수많은 연구를 종합하여 세계보건기구를 비롯한 UN 산하 12개 기구는 차별적 관행으로부터 성소수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차별금지법은 특정한 개인과 집단이 직접적으로 겪을 수 있는 차별을 설명할 법적, 제도적 언어를 제공한다. 때문에, 차별이 사회적 약자들과 소수자들에게 일으키는 건강문제를 예방할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고, 의료접근권을 향상시킬 수 있다. 아울러 차별금지법은 보수적인 의료계의 분위기로 인해 직간접적인 차별을 받고 있을 수많은 보건의료계 종사자들의 삶의 질 또한 개선할 것이다. 일부 의료인들이 의학을 참칭해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고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고 있으나 이는 전 세계 보건의료계가 근거를 중심으로 합의한 의학적 결정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현대 의학은 정체성의 문제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임의적인 구분을 더는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이 그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판단력, 안정성, 신뢰성 및 사회적 또는 직업적 능력의 손상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에 우리 보건의료계 754인은 건강을 파괴하는 모든 차별에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자 한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우리 사회의 건강권 향상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더 이상 미뤄져서는 안 된다. 차별이 있는 한 온전한 건강은 없다, 차별금지법 즉각 제정하라! 2022년 4월 29일 [선언자 명단] <약사> 162명 <의사> 153명 <치과의사> 116명 <한의사> 65명 <보건의료노동자> 73명 <보건의료학생> 38명 <보건의료·건강권 연구자> 34명 <보건의료·건강권 활동가> 22명 <기타> 6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