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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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치과의사’
  • 양정강
  • 승인 2022.04.20 16:3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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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시론] 양정강 논설위원

며칠 전 대한치의학회가 미국치과의사협회를 비롯한 학계의 의견을 종합해 치의학 범위에 두부 및 경부를 포함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는 기사를 접했다. 

기사를 보고 있자니 지난 1933년 여수 치과의사의 구강매독 치료로 인한 치과와 의과의 영역분쟁부터 2016년 대법원에서 안면미용 보톡스 및 레이저 시술 영역의 치과의사 승소를 결정한 판결이 떠올랐다. 

대법원의 판결을 정리한 대한치의학회 최영준 공보이사가 최근 ‘Does the scope of dentistry include facial esthetic procedures such as botulinum toxin injection or laser treatment?’라는 제목으로 미국치과의사협회지(JADA, 2022년 2월호)에 글을 실었다. 지난 2016년 5월 19일 대법원 공개변론 재판 생중계를 긴장하며 지켜본 기억이 새롭다.

그날 치과의사를 대표해 변론에 나선 이부규 교수는 나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으나 그때의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주장을 펴는 모습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수소문해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다.

공개변론이 있고 두 달 뒤 13명의 대법관 중 11명이 치과의사의 보톡스 시술이 적법하다는 의견으로 치과의사의 손을 들어줬다. 어찌나 반갑고 기뻤는지 당시에 이름을 밝히지 않은 누군가가 비상대책위원회에 금일봉을 전달했다는 기사를 보고 나도 하겠다면서 이름을 채 숨기지 못하고 금일봉을 전달한 적도 있다.

의과와 치과 사이의 분리, 즉 치과 전문직의 성립은 잘못된 진료를 하는 이들로부터 자신을 관리, 규제하려는 이유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1840년 4명의 교수와 5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세계 최초의 치과대학인 볼티모어 치의과대학(Baltimore College of Dental Surgery)은 역사적 우연에서 비롯한 일이라 풀이하면서 의사와 치과 사이에 어떤 위계가 있거나 얕잡아 볼 일이 결코 아니라는 글을 봤다. 그런데도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치과의사는 의사와 영역 다툼이 이어지고, 더러는 치과의사를 얕잡아보는 일을 겪곤 한다.

지난해 7월 ‘병원 CCTV 설치’와 관련한 MBN 방송 중에 치과의사(구강악안면외과)의 광대 수술장면에서 무자격자처럼 묘사한 일이 그랬고, 소아청소년학회장의 황당한 발언이나 며칠 전 전문지에 실린 ‘치의도 요양병원장 될까?’ 제목의 기사가 그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떻게든 치과의사 말고 그냥 의사를 할 걸’이라며 후회까지 한 일은 없다. 다만 어려서부터 되고 싶던 의사에서 치과의사로 진로를 바꾼 이유가 학업 성적인 것은 마음의 그늘이었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고 내가 속한 직역이 사회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 일에 나 하나라도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치과의사의 삶을 지내왔다. 치과계 밖의 여러 모임에 참여할 때마다 스스로 치과의사를 대표한다는 생각을 알게 모르게 한 것 같다. 치과의사의 사회적 위상이 시대에 따라 변하는데 남들은 어떤 계기로 치과의사를 택했는지 궁금하다. 

먼저 내 이야기를 한번 해보자면 일찍이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모두들 ‘장래희망’을 적어 낸 일이 있다. 남자아이들은 1950년대 초 전쟁 직후 영향 때문인지 ‘군인’이 많았고, 여학생은 ‘나이팅게일’이 되겠다는 아이가 많았다. 그 외에도 남학생들은 ‘과학자’, 여학생은 ‘피아니스트’가 있었는데, 나는 ‘의사’라고 써넣었다.

특별한 동기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있다면 외삼촌 한 분이 1948년 당시 함흥의대 학생이었다. 훗날 대학 진학을 앞두고 으레 ‘의대’에 간다고 했는데 부모님과 함께 진학 상담을 하던 날, 생물 담당 담임선생님이 “정 원한다면 S의대 지원도 가능하나, 미국에서는 치과의사가 인기가 있다”며 안정권의 치대를 권유했다. 어머님은 “재수는 원치 않으니 치대가 좋습니다”고 바로 답하셨다. 아버님은 원하는 대학에 지원하지 못 하는 아들이 섭섭한 눈치였다. 

장난이 심했던 어린 시절, 학교 선생인 이모가 아이를 학교나 빨리 보내라고 해서 나는 한 살 어린 나이에 학교에 입학했다. 입학 후에는 3학년 8살 때 한탄강을 건너고, 5학년 때 한강을 건너 부산까지 피난살이를 하고, 고교 시절에는 폐결핵으로 휴학 권유를 받기도 했는데, 중‧고등 학교 6년간 단 하루도 결석하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친구들이 놀린다. 그런데 성적이 이 정도냐고. 

그렇게 남들보다 1년 빠르게 학창시절을 시작해 80이 넘도록 치과의사로 버틴 셈이 됐다. 전혀 생각에 없던 치과대학을 지원하기로 한 후에는 입시 준비도 열심히 하지 않았다. 당시엔 치과대학이 의대와 합격선 차이가 컸고 약대보다도 낮았다.

모의고사에서 수학 점수는 이른바 수포자 수준인 18점을 받기도 했다. 점수 배정이 컸던 ‘적분’ 문제의 답을 분수로 적어내면서 기대치 못한 것이 정답이라고 해 합격자 발표를 보러 가지도 않았다.

4년제 치대의 마지막인 58학번으로 입학해 대학 생활을 보냈다. 나이가 열 살이나 많은 복학생으로부터 ‘양형’ 소리를 들으며 노트도 빌려주고, ‘총대’도 두 번 하면서 대학 시절을 더 재미있게 지냈다(학생회장은 3명 후보 중 꼴찌를 했지만). 

인턴 때는 서울대 1호 의학박사 구강외과 이춘근 교수와 붕어낚시도 해봤다. 그렇게 치과의사로서의 삶에 익숙해지는 동안 치과대학 입학 성적이 의대를 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고, 공부를 무척이나 잘하는 후배들이 입학하는 덕분에 치대에도 ‘이빨 대학’이라는 자조적인 생각 대신 자존감이 제법 자리잡기 시작했다. 나 역시 오랜 자기 혐오(?)를 벗어던지고 비로소 자기도취에 빠져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교수도 여러 해 하고, 협회 일도 여러 차례 했다. 25년 개원의를 하고, 60세 환갑부터 6년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도 일했다. 70세 나이에 시작한 대한치과보험학회는 협회 인준을 받는 날까지 5년간 또 열심히 했다.

요즘에는 13년째 출근하는 치과에 여든이 넘은 친구들이 여럿 찾아온다. 점심시간 전후로 진료 약속을 잡아 진료를 받는 김에 점심도 함께 먹고, 커피를 함께 마시는 일상이 즐겁다. 치과의사로서의 인생 여정이 참으로 보람 있고, 즐거웠으며, 지금도 그렇다. 

1950년 당시에 어떻게 아셨을지, 미국에서 치과의사가 인기가 있다며 나를 치과의사의 길로 안내해주셨던 담임선생님은 지금 93세 연세로 건재하시다. 졸업반 8분의 선생님 중에 유일하시다. 매년 3월 7일에 우리 3학년 7반의 반창회를 하곤 했는데, 코로나19 여파로 2년간 뵙지 못하다가 지난달 내가 주도해 4명의 동창이 담임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세월을 건너뛰어 아흔을 바라본다는 망구(望九), 여든한 살이 넘도록 이처럼 치과의사로 평안하게, 범사에 감사하며 지낼 수 있는 것 모두가 김세영 담임선생님 덕분이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양정강(사람사랑치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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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동 2022-04-22 07:17:26
선생님, 재밌게 잘 봤습니다. 선생님이 수포자셨다니, 재밌네요....ㅎㅎ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

전양호 2022-04-22 15:38:51
못 뵌지 너무 오래네요 ㅠㅠ 좋은 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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