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데이 신화로 빚어진 '명예의 전당'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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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 신화로 빚어진 '명예의 전당' 이야기
  • 서경건치
  • 승인 2022.03.04 14:00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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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순언의 또 다른 야구이야기 3.

1. 야구의 기원에 관한 논쟁

  남북전쟁 이후 19세기에 걸쳐 야구라는 스포츠는 미국의 국민적 여가로 자리를 잡아왔다. 그러나, 야구의 기원에 관해서는 정설이 정립되지 않은 채 19세기 말부터 논쟁이 있어 왔다. 스포츠용품 사업으로 야구계의 큰손이 된 선수출신의 알버트 스팔딩(1850~1915)과 한 때 내셔널 리그의 회장이었던 에이브라함 밀스(1844~1929)는 “야구는 미국이 창안한 경기”라는 입장이었던 반면에, 영국 출신의 야구전문기자였던 헨리 채드윅(1824~1908)은 “야구가 미국적 오락의 진수인건 맞지만 수세기 전부터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행해졌던 ‘라운더스’ 라는 민속경기가 야구의 직계조상이다” 라고 맞섰다.

 

          알버트 굿윌 스팔딩
          알버트 굿윌 스팔딩
                 에이브라함 밀스
                 에이브라함 밀스

  1905년 초에 스팔딩<야구의 기원에 관한 조사위원회>를 꾸리기로 하였고 채드윅도 이에 동의하였다. 위원회는 밀스를 위원장으로 하여 7인으로 구성되었는데, 연구자나 학자들은 전무했고 조사원들도 없는 명망가들 뿐이었고 채드윅의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원천 배제되고 말았다. 위원회는 야구의 기원에 대한 정보를 구한다는 공지를 띄웠다. 과거의 선수들로부터 수많은 편지가 도착했지만 스팔딩의 이론을 지지하는 증거가 될 만한 것은 없었다.

  그러던 중 Akron Beacon Journal 이라는 오하이오주의 조간신문 편집장에게 1905년 4월 3일 소인이 찍힌 편지가 도착하는데, 콜로라도의 광산 기술자이자 71세의 노인인 애브너 그레이브스라는 사람이 보낸 것이었다. 그는 편지에서 애브너 더블데이(1819~1893) 라는 사람이 야구장의 도면을 그리는 것을 보았다고 썼다. 또한 더블데이가 1839년 쿠퍼스타운이라는 마을에서 처음으로 야구경기를 치렀고, 4개의 베이스를 두고 한 팀에 11명이 경기를 펼쳤는데 타운볼의 변형으로 그가 발명한 것이라고 했다. Akron Beacon Journal 은 4월 4일자에 “Abner Doubleday Invented Baseball”이라고 헤드라인을 달았다. 

  스팔딩그레이브스에게 본인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보내달라고 편지를 보냈는데, 그레이브스는 자신이 그린 도면을 보내며, 도면의 원본은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 당시 야구경기를 했던 사람들은 모두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다고 답신하였다.

 

                                 애브너 더블데이
                                 애브너 더블데이

  그레이브스가 언급한 애브너 더블데이는 누구인지 잠깐만 짚어보는 게 좋겠다. 그는 1819년 쿠퍼스타운에서 120km 떨어진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실존의 인물이다. 1838년 미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1842년 장교로 임관한 후 멕시코의 몬테레이에서 복무했다. 1861년에는 남북전쟁에도 북군장교로 참전했는데 섬터요새와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1873년에 퇴역하여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케이블카 선로를 만드는 일에 종사했다. 그가 1839년에 쿠퍼스타운에 있었다는 증거는 그레이브스의 기억에 의한 증언밖에는 없다. 그 보다 열 살 어린 사촌동생이 쿠퍼스타운에 살았는데, 그레이브스가 이 둘을 착각했을 수도 있다.

  71살 노인이 했던 증언의 신빙성이야 어찌되었든 밀스의 위원회는 1907년의 조사보고서에서 야구경기는 1839년 애브너 더블데이가 쿠퍼스타운에서 발명하였다고 결론짓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밀스의 보고서가 발표되고 나서 남북전쟁 참전용사가 야구경기를 창안했다는 신화같은 이야기가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고 대중들의 믿음은 강하게 퍼져 나갔다. 

  그러나, 당시에도 근거있는 반론이 만만치 않게 제기되었다. 1909년, 작가 윌리엄 헨리 어윈데블데이의 발명이나 라운더스라는 경기 이전에도 영국에는 야구(English Base Ball)라는 이름을 가진 스포츠가 있었다고 피력하였고, 더블데이는 1839년에 쿠퍼스타운이 아니라 육사생도로서 웨스트포인트에 있었다고 했다. <스포팅 뉴스>의 설립자인 알프레드 헨리 스핑크스는 당시 웨스트포인트에서는 생도들에게는 휴가를 준 기록이 없었음을 확인하여 더블데이 창안설은 거짓이라며, 야구는 1845년 알렉산더 카트라이트가 니커보커스 규칙을 정리함으로써 발명되었다고 기사를 썼다. 그러나, 이러한 반론들이 당시에는 대중들의 맹목적 믿음을 바꾸지는 못하였다. 

  스팔딩은 오히려 1911년 <America’s National Game> 이라는 그의 책에서 이 보고서를 인용하며, 말년에 정신이 오락가락했던 그레이브스의 이름은 쏙 빼고 밀스를 지칭하는 듯한 ‘명망있는 신사’의 조사에 의해 야구는 미국의 것이며 미국의 육군장교에 의해 발명된 것이라는데 큰 기쁨을 표한다고 썼다.

 

2. 더블데이 필드와 명예의 전당

  쿠퍼스타운 주민들은 자신들의 시골 외진 마을이 더블데이에 의해 알려지게 된 것을 매우 고맙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 명성을 살려나갈 방법을 수년 동안 찾지 못하였다. 그런데, 1916년 존 테너 내셔널리그 회장이 쿠퍼스타운을 방문했을 때, 첫 야구경기가 열렸던 것으로 추정되는 소목장 부지에 더블데이의 기념물을 지으면 어떻겠느냐 라고 제안하였다. 쿠퍼스타운 상공회의소는 이 목장을 임대하여 야구장으로 활용하기로 하였다.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나서서 흙과 재를 늪지대에 채웠고 굴곡진 땅을 평탄하게 고르며 목초지를 야구장으로 만들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1920년 9월 6일 드디어 더블데이 필드가 공식 개장되었다. 개장식에는 내셔널리그 존 헤이들러 새 회장이 참석하였는데, 1회 동안 개장 기념경기의 심판을 직접 맡기도 하였다.

 

                                                                    더블데이 필드
                                                                    더블데이 필드

  1923년에는 임대로 사용했던 부지를 매입하였고 이듬 해에는 더블데이 필드에 목조 관람석이 신축되었다. 1938년에는 뉴딜 정책의 일환인 공공사업 프로그램에 따라 리모델링이 행해져 강철 콘크리트 관람석과 외야 펜스, 목조 외야 관람석 배수시설 등이 증축되었다. 

 

                        목조관람석 신축
                        목조관람석 신축

  1934년, 그레이브스 가족의 농가에서 실밥도 터지고 가죽도 퉁퉁 부풀어 오른 낡아빠진 야구공이 발견되었는데, 1839년 더블데이의 첫 경기때 사용된 것으로 믿었고 이로써 쿠퍼스타운은 야구의 발상지라는 신화는 더욱 확고해졌다. 이 공을 스티븐 칼튼 클라크라는 쿠퍼스타운의 부호가 구입하였다가 후일 박물관을 건립한 후에 ‘더블데이 볼’로 명명하여 전시하게 된다. 

 

                      더블데이 볼
                      더블데이 볼

  클라크는 대공황으로 인하여 쿠퍼스타운을 방문하는 관광객이 줄어들고 금주령에 의해 양조산업이 쇠퇴하게 되자 이 마을에 관광객을 유치하려 모색하고 있었다. 클라크는 내셔널리그의 신임 회장인 포드 프릭에게 야구박물관을 짓는다면 지원할 수 있는 지 타진했고, 이에 프릭은 박물관의 개념을 지지하며 명예의 전당을 연계하여 건립할 것을 제안하였다. 마침 내셔널리그 출범 60주년에 맞추어 1936년에 미국야구기자협회(BBWAA/Base Ball Writer’s Association of America)는 20세기들어 가장 뛰어난 야구선수로 5명을 선출하였는데, 이들이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최초의 5인으로서 타이 콥, 베이브 루스, 호너스 와그너, 크리스티 매튜슨, 월터 존슨 등이다.

 

                               타이 콥, 베이브 루스, 호너스 와그너, 크리스티 매튜슨, 월터 존슨
                               타이 콥, 베이브 루스, 호너스 와그너, 크리스티 매튜슨, 월터 존슨

  메이저리그도 야구의 중흥을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이를 전폭 지지하게 된 것이고 100주년이 되는 1939년에 맞추어 완공하도록 계획하였다. 1937년 뉴욕주 입법부는 쿠퍼스타운이 야구의 발상지임을 선언하고 1939년에 야구탄생 100주년 기념행사를 치를 것을 권고하였다. 야구박물관과 명예의 전당의 건립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드디어 1939년 6월 12일 모든 야구경기가 일시 중지된 상태에서 명예의 전당의 개관식과 함께 100주년 행사가 열렸다. 이에는 1936년부터 1939년까지 4년간 선출된 20여명의 명예의 전당 입회자들과 수천명의 팬들이 참석했다. 

 

                                                  명예의 전당 개관식
                                                  명예의 전당 개관식

 

3. 비판과 진실

  100주년 행사 이후에도 더블데이신화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날조된 것이라는 많은 비판이 쏟아졌다. 스포츠 작가인 프랭크 멩키는 야구는 크리켓에서 유래되었다고 믿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밀스더블데이와 가까운 사이였음에도 그레이브스의 증언이 있기 전에는 더블데이가 야구와 관련된 일에 관여한 적이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또한, 더블데이가 그렸다는 야구장 도면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도 했다.

  뉴욕타임즈는 더블데이가 첫 경기를 치렀다는 1839년 보다 이른 시기의 문서에서도 야구경기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고 보도했다. 1939년 후반의 뉴욕타임즈는 ‘1839년 야구탄생설은 평화를 사랑하는 시민들 사이에 공통된 합의에 의해 100주년 기념행사로 받아들여졌다’고 우아하게 표현했다. 명예의 전당을 설립하는데 앞장섰던 클라크 자신도 한 사람에 의해 야구가 발명되었다는 데에 의심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더블데이의 후손들 조차 날조된 영광은 싫다며 가세하였다.

  더블데이가 야구를 발명했다는 통설은 현대 야구 역사학자들 사이에선 신뢰를 받지 못한다. 그레이브스더블데이 이야기를 처음 했을 때 그의 나이가 71살이었는데 다섯 살 때의 일을 기억하는 것은 부정확했을 것이라는 비판을 받아 왔다. 그레이브스는 1852년에 포니 익스프레스라는 회사에서 배달원으로 일했다고 기자들에게 말한 적이 있는데 이 회사가 설립된 것은 그로부터 8년 후의 일이었다. 그만큼 그의 기억이 오락가락했으며‎ 작가 윌리엄 레이첵은 그를 믿을 수 없는 목격자라고 했다.

  또한, 그레이브스는  밀스위원회에 보낸 편지에서  “내 현재의 기분으로는 야구경기에서 영국에게 패배하느니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여 그 나라를 싹 쓸어 버리고 싶다.”‎ 라는 극단적인 반영감정을 서슴치 않고 표현했다.  그는 90살이 되던 해에는 아내를 총으로 쏴 죽이고 배심원에 의해 정신이상자로 판명되어 1926년 정신병 범죄자 수용자 시설에 보내지고 그 곳에서 사망하게 된다. 

  더블데이 자신도 생전에 자신의 젊은 시절 얘기를 하면서, 시를 사랑했고 수학에 흥미가 많았으며 야외활동이라면 지형도에 관심이 많아서 아버지의 땅을 돌아다니며 지도를 그리며 놀았다고 회상했으나 야구 얘기는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야구는 미육군과 해군에서 인기가 많은 여가이긴 했지만, 더블데이 일생에 이 스포츠종목과 관련된 일이라고는 1871년 텍사스에서 흑인연대에 근무할 당시, 병사들에게 지하실에 있는 야구장비를 꺼내어 오라고 지시한 일이 전부이다.

 

4. 영웅만들기

  19세기말 미국은 국가적으로 유럽의 전통과 분리되려는 탈유럽 정체성이 필요한 시기였다. 미국인들은 자기들만의 예술가, 작가, 선각자, 영웅을 갈구하고 있었다. 프로야구 스타선수에서 스포츠용품 사업가로 변신하여 야구계를 주물렀던 스팔딩은  미국의 스포츠인 야구를 전 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야구원정대를 조직하였다.

  이 원정대는 1888년 10월 백악관에서 글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의 환송을 받고 원정길에 올랐다. 호주, 뉴질랜드, 실론, 이집트, 나폴리, 파리 뿐만 아니라 야구의 기원과 관련이 깊은 나라인 영국의 런던, 브리스톨, 맨체스터, 리버풀, 더블린 등 여러 도시 돌아다니며 시범경기를 펼쳤다. 무려 6개월간의 세계 원정을 마치고 1889년 4월 뉴욕으로 귀환한 원정대는 미국을 상징하는 작가 마크 트웨인, 훗날에 대통령이 되는 씨어도어 루스벨트 등의 거대한 영접을 받았다. 델모니코식당에서 열린 환영연에는 300명의 인원이 참석하였는데 야구의 9회를 상징하는 아홉 가지 코스요리와 아홉 번의 건배가 분위기를 한 껏 끌어 올렸다.

  이 때 한 인물이 “야구는 순수히 미국의 발명품” 이라고 외치자 이에 선수들과 초대손님들 모두가 테이블을 두드리며 “No rounders!!(라운더스가 아니지)” 라 장단을 맞추었다고 한다. 이 외침의 주인공이 바로 후일 <야구의 기원에 관한 조사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은 에이브라함 밀스였으니 그 보고서의 결론은 이미 미국인 영웅을 예고하고 있었을 터이다. 한술 더 떠 스팔딩은 보스턴 스포츠지의 기자에게 “미국인이 좋아하는 국민스포츠에는 반드시 미국인 아버지가 있어야 합니다.”라고 아예 노골적으로 속셈을 드러냈다.

  이로써, 육군장교 출신의 애브너 더블데이는 세상을 떠난 지 14년 만에 야구의 창시자라는 자리에 등극하였으며, 그의 이름은 게티스버그보다 쿠퍼스타운에서 더 기억되고 있다. 쿠퍼스타운에서는 1939년 이후로 일생을 통틀어 한 번도 야구경기를 해 본 적이 없는 그를 기리는 행사가 해마다 벌어지고 있다.

  알렉산더 카트라이트의 전기작가 해럴드 피터슨은 “더블데이가 야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야구가 더블데이를 만들었다”며 통렬하게 비판하였고, 열혈한 야구광이었던 진화론자 스티븐 제이굴드는 더블데이 신화를 ‘야구의 창조신화’라 하였다.

 

5. 성찰과 반성

  오랜 기간동안 명예의 전당은 더블데이 신화와 함께 해왔다. 다행히도 얼마 전부터는 날조된 이야기만이 아닌 증명될 수 있는 역사를 위한 박물관이 되기 위해 전향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더블데이 필드 최근 모습
                                                                  더블데이 필드 최근 모습

  몇 년 전 어느 날, 뉴욕 주 고속도로에서 쿠퍼스타운으로 나가는 출구에 세워진 ‘야구의 탄생지’라는 팻말을 누군가가 걷어내 버렸다. 

  야구박물관의 1호 전시물인 ‘더블데이 볼’에는 “이 게임을 우리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미국인들의 열망을 반영하는 전설”이라는 설명을 붙여 더블데이 신화를 성찰하고 있다.

  1992년부터 2015년까지 메이저리그 커미셔너를 지내며 메이저리그의 중흥을 이루어 냈던 버드 셀릭 조차도 더블데이 기원설을 믿고 있었던 인물이었으나 그도 2011년 3월에 야구역사학자인 존 쏜을 위원장으로 하는 12인으로 현대적인 <야구 기원 위원회 Baseball Origin Commitee>를 구성하였다. 

 

                                             MLB 명예의 전당
                                             MLB 명예의 전당

  영웅신화 만들기라는 국가적 요구에 의해 저질러진 속임수의 사례는 어느 나라에서나 어느 분야에서나 역사적으로 존재해 왔다. 야구를 사랑하는 소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진실을 파헤치고 거짓을 걷어 내어 등불을 밝혀 왔던 학자, 언론인, 그리고 양심적 지식인들에게 존경과 감사를 전하고 싶다.

 

            고순언 원장 (하남 고치과의원)
            고순언 원장 (하남 고치과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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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의사 2022-03-10 12:04:08
축구는 정말 영국이 종주국이 맞을까요? 이것도 좀 의심스러운...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구준회 2022-03-07 08:51:26
이런걸 어찌 아시는지... 재밌게 읽었습니다...

김의동 2022-03-04 18:40:02
정말 놀라운 야구 지식이네요. 야구팬의 한 사람으로서 경이롭습니다.
저도 가끔씩 야구는 어떻게 시작된 걸까 궁금했었어요.......
야구의 기원에도 조작과 신화만들기가 들어가 있었네요.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이효직 2022-03-04 15:48:39
야구를 좋아하는 소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항상 감탄하며 선생님 글 읽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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