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을 무소유한 ‘조영래’
상태바
지식을 무소유한 ‘조영래’
  • 송필경
  • 승인 2020.12.11 14: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논설·시론] 송필경 논설위원

역사에서 가장 먼저, 가장 널리 알려진 무소유자는 기원전 4세기에 살았던 디오게네스가 아닐까? 디오게네스는 나무통을 집으로 삼았다. 나무통이란 그 당시 시체를 묻기 위해 사용하던 커다란 독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베풀 수 있는 천하 패자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와 나무통 앞에서 디오게네스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오직 지혜만을 추구한 심오한 철학자는 대왕에게 자신의 통 앞에서 햇빛을 가리지 않도록 비켜 달라고만 했다.

현대의 대표적인 무소유자는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다. 이 철학자는 오스트리아 최대 재벌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마어마한 유산을 포기했는데, 많은 돈을 소유하는 것은 철학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평생 초등학교 교사 정도 월급으로 아주 검소하게 살았다.

이름난 정치가로서 무소유자는 베트남 주석 호찌민이다. 한 나라 주석의 집무실과 침실이 고작 13평에 불과했으며, 호찌민이 남긴 유물은 침대 1, 책상 1, 의자 1, 책장 1, 카기 옷 2벌, 고무 샌달 1컬레, 라디오 1대, 골동품 시계 1대, 타자기 1대였다. 하나라도 빠지면 하루도 불편함을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의 필수품이었다. 지배자(ruler)가 아닌 영도자(leader)의 ‘아름다운 빈손’이었다.

이렇듯 무소유의 참뜻은 소유할 능력이 충분한데도 소유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는 능력이 없어 무소유할 수밖에 없는 처지와는 아주 다른 차원이다.

무소유의 대상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식도 마찬가지다. 지식을 무기로 이기적인 출세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남을 위해 사용하는 이타적인 무소유 지식인이 있다는 말이다.

조영래는 지식을 습득하고 소유하는 데 탁월했다. 우리나라 수재들이 모인 경기고등학교 시절에 죽어라고 공부를 한 학생이 아니었다. 이른바 요즘 전교 1등이라는 학생들과 사뭇 달랐다.

고등학교 시절 동아리 모임 활동에 열심이었고, 대입 준비에 전념해야 할 3학년 재학 중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하다 정학 처분을 받았다. 그럼에도 수석 졸업을 했고, 서울대 전체 수석으로 법대에 진학했다.

대학에서도 버릇은 여전했다. 한일회담 반대, 6.7선거 부정 규탄, 3선 개헌 반대 등으로 근신처분을 받으면서 항상 독재자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1970년 11월 사법시험 준비 중 전태일 열사의 분신 소식을 듣자 바로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서울법대 학생장을 주선하고 시국선언문을 초안했다.

1971년 10월 사법연수원 재학 중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돼 1년 6개월 감옥 생활을 했다.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돼 6년 가까이 도피 생활을 했다.

조영래 사진(위)과 묘소.(사진제공= 송필경)
조영래 사진(위)과 묘소.(사진제공= 송필경)

위인은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는다고 한다. 조영래는 도피생활을 하면서 청계천 일대에 숨어 전태일의 영혼을 찾아갔다. 이소선 어머니를 만나고 당시 전태일과 함께했던 청계천 노동자들의 현실을 알기 위해 청계천 일대를 누볐다. 조영래가 본 것은 인간 이하 대우를 받는 가난한 노동자의 삶이었다. 많은 노동자를 만나며 지식을 나누기도 했지만, 조영래는 오히려 노동자들에게서 삶이 귀중하다는 것을 배웠다.

이 도피기간동안 전태일의 삶을 완벽하게 복원한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책을 집필했다. 이 책은 1983년 전두환 정권의 모진 탄압에도 출간돼 우리나라 노농운동사에 가장 큰 울림을 남겼다. 당시에는 이 책의 저자가 누구인지 몰랐다. 조영래 사후 이 책이 『전태일 평전』이란 이름으로 재출간됐을 때 비로소 조영래가 저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은 암담한 노동현실의 근본원인은 근로기준법이 준수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전태일은 비록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법대 교재인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구했다. 전문적인 법학개념과 법률용어로 된 책과 씨름했다. 이 답답함 때문에 전태일은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아름답고 숭고한 청년 전태일이 죽고 난 뒤였지만 그토록 원했던 대학생 친구인 아름답고 위대한 청년 조영래가 찾아왔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라는 청계천 밑바닥 무지렁이 노동자의 유언은 천박한 자본주의에서 인간의 존엄을 깨우치게 한 사자후였다.

당시 어떤 지성인(이른바 먹물)들도 감히 외치지 못한 근원적인 ‘통찰’이었다. 최고 학벌을 자랑하는 조영래의 진정한 위대함은 이 노동자의 외침이 우리 남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폭로한 핵심적인 사자후란 걸 이해하고 받아들인 점이다.

노동자의 권리를 호소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사른 숭고한 청년 전태일은 이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노동자 고통의 본질을 알아냈다.

최고학부를 졸업한 위대한 청년 조영래는 이 세상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찾아 내려와 밑바닥 노동자의 고통을 듣고 세상 사람들에게 그 고통을 이야기했다.

혼과 혼으로 이어진 두 사람의 인연을 나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아름답고 격조 있는 만남’이라 부른다. 근대사에서 동학의 두 주역인 최제우와 전봉준의 만남처럼 말이다.

조영래는 사법연수원 시절 이렇게 다짐했기에 출세를 추구하는 지식을 소유하려 하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도 권력을 가진 자의 우월감을 나타내거나, 상대방을 위축시키거나, 비굴하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

조영래는 우여곡절 끝에 1983년 변호사 개업을 했다. 조영래의 고객은 물난리로 집 잃은 수재민, 연탄공장 옆에 살다 진폐증에 걸린 주민, 교통사고로 직장을 잃게 된 전화 교환원같은 힘없는 서민으로 사회에서 관심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니 그들은 조영래를 찾은 고객이라기보다, 조영래가 그들을 찾아갔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이다.

1986년 위장 취업한 한 여성이 부천 경찰서에 끌려가 성고문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그 가냘픈 여성의 참담한 호소를 공권력은 왜곡하고 묵살했다. 누구도 당시 5공의 포악한 공권력에 대항해야만 하는 그 사건을 변론하지 않으려 했다.

조영래는 이 ‘부천성고문 사건’을 스스로 맡아 전두환 정권의 폭압적인 부도덕성을 드러내어, 1987년 민주화대투쟁의 기폭제를 마련했다. 1987년에는 노동‧빈민‧공해‧학생 관련사건 같은 인권 변호에 온 힘을 쏟았다.

그러나 1987년 연말에 치른 대선에서 김영삼‧김대중 양김의 분열로 5공 청산이 물 건너가자, 조영래는 시대의 어리석음을 줄담배로 달랬다. 1990년 9월에 폐암 진단을 받고 12월 12일에 세상을 떴다.

조영래의 질환은 폐암이 아니라 누군가가 ‘시대암(時代癌)’으로 진단했다. 시대의 아픔을 적절하게 표현한 병명이었다.

당시 사법고시 합격자란 자격은 우리 사회에서 부와 명예와 권력을 동시에 소유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조영래가 소유한 것은 오직 ‘진실’뿐이었다. 지식 쌓기에 천부적으로 탁월했던 조영래는 그 지식을 ‘진실’을 찾기 위한 방편으로만 사용했다. 43세의 삶에서 자신이 쌓은 지식을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한 도구로 소유하지 않았다.

조영래가 아들에게 쓴 펀지 일부분이다.

“아빠는 네가 세상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 제일 유명한 사람,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단다.”

조영래는 아들에게 당부했듯이 세속의 물질과 권력을 소유할 능력이 있었음에도 스스로 소유를 거부하고 무소유로 살은 사람이었다.

1970년 이후 우리나라 노동운동을 비롯한 모든 민주화 운동은 전태일과 조영래 이들 두 분에게 가장 많은 빚을 안고 있다 해도 조금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한 분은 자신의 가장 귀중한 생명을 무소유했고, 한 분은 안락함을 누릴 수 있는 지식을 무소유했다.

올해는 전태일 서거 50년, 조영래 서거 30년이 되는 해이다. 조영래 변호사의 묘는 모란공원에 있는 전태일 열사의 묘와 서로 영혼으로 대화하기 쉽게 이웃에 자리하고 있다. 아마 두 분 모두 아직도 노동계가 핍박받는 척박한 현실을 보고 무척 가슴 아파하시리라.

오는 12일은 조영래 변호사 서거 30주기인 날이다.

지금 좌표를 잃고 방황하는 진보는 전태일과 조영래가 보여준 무소유의 의미를 복원해야 한다. 이분들은 꺼지지 않는 횃불이요, 시대정신이 솟아나는 마르지 않는 샘이다.

우리는 영원히 활활 타오르는 이 횃불로 암흑을 밝히고, 끊임없이 솟는 이 샘에서 가난한 자들의 자유와 평등과 사랑의 목마름을 해소해야 한다.

송필경(사단법인 ‘전태일의 친구들’ 이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