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번호 42, 재키 로빈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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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번호 42, 재키 로빈슨
  • 서경건치
  • 승인 2020.10.07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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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순언의 또 다른 야구이야기 1.
Harry How / GETTY IMAGES NORTH AMERICA / Getty Images via AFP
Harry How / GETTY IMAGES NORTH AMERICA / Getty Images via AFP

 

지난 8월 29일(미국시간으로는 8월 28일), 그 전날 내린 폭우 때문에 하루 미뤄진 류현진선수의 선발등판 경기가 TV를 통해 생중계 되었다.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매치였던 이 경기에선 좀 특이한 장면이 연출되었는데, 그라운드 안의 모든 선수들이 등번호 42번을 달고 나왔다. 이 경기뿐만 아니라 이 날 벌어진 모든 메이저리그 경기에서 그랬다. 등번호 42번은 메이저리그에 소속된 30개 모든 팀에 전구단 영구결번된 등번호이다. 메이저리그에서 아무도 이 번호를 달 수 없지만, 어떤 날에는 모두가 달아야 하는 등번호 42번에 얽힌 이야기를 기나긴 흑인야구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풀어 볼까 한다.

 

1. 미국야구의 태동기

early ancestors of the San Francisco Seals c. 1875 / San Francisco History Center
early ancestors of the San Francisco Seals c. 1875 / San Francisco History Center

근대야구가 시작된 시초는 1845년에 뉴욕의 은행원이었던 알렉산더 카트라이트가 `니커보커 룰`이라는 야구규칙을 제정하고서 부터이다. 그 이후 남북전쟁을 지나 흑인 노예들이 해방되고 공업화와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19세기 중반부터 야구가 미국의 국민 스포츠(National Pastime)로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남북전쟁 이후에 이미 수백 개의 아마추어 야구팀이 존재해 있었고, 미국을 가로 지르는 대륙횡단 열차가 개통된 1869년에는 최초의 프로야구팀인 신시내티 레드스타킹스가 탄생한다. 1871년에 이르러서는 프로선수협회 중심의 프로리그가 창설되어 5년간 진행되었지만 선수 중심이었다는 한계로 말미암아 소멸되고 말았다. 1876년에는 여덟 개의 클럽을 기반으로 다시 리그가 창설되었으니, 이것이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내셔널 리그(NL)이다. 이어 1882년엔 아메리칸 리그의 조상격인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AA)이라는 리그도 창설되었다.

 

2. 인종장벽과 흑인들의 추방

18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약 60여명의 흑인선수가 마이너리그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메이저리그 그라운드를 밟아 본 흑인선수도 있었다. 이 시기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는 아버지가 흑인 의사였고 본인은 법대 출신인 플릿 워커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1884년에 AA 산하의 톨레도 블루스타킹스에서 42경기를 뛰었다. 그보다 5년 전인 1879년에 에드워드 화이트라는 혼혈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단 한 경기를 뛰었다는 기록을 미국야구연구협회(SABR)에서 찾아 냈다. 그는 백인 농장주와 흑인 하녀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본인 스스로 자신은 백인사회에 살면서 아무런 인종차별을 받지 않았다고 하기에, 인종분리 정책이 지배하던 당시의 분위기로 보아 흑인최초의 메이저리거로 인정하기엔 주저함이 있다. 인종장벽(color-barrior)이 형성된 한참 후인 20세기 초반에도 백인의 피가 섞여 있으면 피부색이 옅을수록 가까스로 인종장벽을 넘어 몇몇이 메이저 리그에서 뛰었던 비슷한 사례도 있다고 한다.

The first nationally known black professional baseball team was founded in 1885 / aminoapps.com
The first nationally known black professional baseball team was founded in 1885 / aminoapps.com

19세기 말은 세계사적으로 미국이라는 나라가 신흥 강국으로 등장하게 되는 시기였고, 미국의 국가주의가 백인 중심으로 흐르면서 야구판에서도 흑인들을 쫓아내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그 당시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선수겸 감독이었던 최고의 슈퍼스타 캡 앤슨과 운동용품사업으로 큰 돈을 번 선수출신 사업가인 앨버트 스팔딩은 야구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주동하여 흑인들은 더 이상 빅리그의 야구판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되었다. 1884년을 끝으로 메이저리그에서 흑인들의 진입이 가로막히자,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그선수였던 플릿 워커와 동료들은 1887년에 따로 National Colored Base Ball League를 만들어 그들만의 리그를 이어가려고 했으나 흥행실패로 얼마 못가서 해체되고 말았다. 1889년엔 백인마이너리그에서 뛰던 흑인들조차 완전히 쫓겨났다. 이로써 미국의 National Pastime에서 흑인들은 백인들과 완전히 분리되었다. 이후에도 흑인만의 팀들이 다수 생겨났으나 독자적으로 도장깨기식의 투어경기를 하거나 산발적으로 활동하는데 그쳤다. 

 

3. 니그로 리그의 창설

그러던 중, 1911년에 훗날 니그로 리그의 아버지라 추앙받는 루브 포스터이라는 흑인 사업가가 자신을 중심으로 흑인팀을 결성하고 빅리그 진출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의 팀은 1915년 신흥 페더럴 리그에 가입을 신청했으나 거부당하고 만다.

한편, 몇 년 후인 1919년에는 희대의 승부조작 사건인 '블랙삭스 스캔들'이 터지면서 위기를 맞은 메이저리그는 막강한 권한을 지닌 커미셔너 체제의 리더쉽을 구축하게 되었다. 시카고 법원의 판사출신인 케네소 랜디스가 종신임기를 보장받고 초대 커미셔너로 취임한다. 1차 대전이 끝나고 '블랙삭스 스캔들'의 여파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루브 포스터는 랜디스 커미셔너에게 로비를 펼쳤다. 그러나 그는 지독한 인종주의자였고 오히려 흑인들에게 우호적인 구단주들을 압박하기도 했다. 랜디스 커미셔너의 분위기를 파악한 루브 포스터는 1920년에 중서부의 흑인팀 8개를 기반으로 니그로 내셔널 리그(NNL)을 창설하였다. NNL이 흥행에 성공하자 뒤이어 1923년엔 백인 사업자인 에드 볼든도 이스턴 컬러드 리그(ECL)울 창설하였고, 두 리그간에 4차례의 니그로 월드시리즈가 개최되기도 한다. 흑인들도 월드시리즈라는 대회를 가짐으로서 백인야구와 대등한 위치에 서고자 했다. 그러나 1928년 ECL이 돌연 해산되고, NNL도 경제공황의 여파와 루브 포스터의 죽음으로 1931년에 파산하고 말았다.

1924 Negro League World Series / wikimedia
1924 Negro League World Series / wikimedia

다행히 철강도시인 피츠버그를 중심으로 흑인들의 야구열기가 번성하였고 이를 계기로 1933년 새로운 NLL과 1937년에 니그로 아메리칸 리그(NAL)가 창설되어 양대리그 체제가 들어섰다. 이 신생 양리그는 1942년부터 1948년까지 7차례의 니그로 월드시리즈를 치른다. 흑인들의 야구도 겉으로는 리그의 체계가 잡혀나가고 있는 듯 하였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으로 인종장벽이 무너질 조짐이 곳곳에서 감지되자, 그들 중에는 언젠가 메이저리그에서 불러 주겠지 하고 대비하며 니그로 팀에 소속되어 빅리그의 1/10도 안되는 연봉을 견뎌온 흑인들도 있었지만, 일부의 흑인선수들은 실력이 월등함에도 자신을 증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해 쿠바나 멕시코리그를 찾아 떠나기도 했다. 멕시칸 리그로 이적한 윌리 웰스는 "나는 이곳에서 인종문제에 부딪치지 않았습다. 미국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자유와 민주주의를 찾았습니다. 멕시코에서 나는 온전한 인간입니다." 라고 말했다. 

 

4. 2차 대전과 우호적 여론

wwiimemorialfriends.org
wwiimemorialfriends.org

2차 대전이 발발하고 미국이 참전하게 되었다. 야구선수들도 미국의 시민으로서 징집되어야 했다. 테드 윌리암스, 스탠 뮤지얼, 밥 펠러 등 백인 톱 스타들은 물론, 연인원 500명의 메이저리거와 1,500명의 마이너리거들도 군입대를 하게 된다. 이 때 멕시칸리그에서 뛰던 니그로 투수인 네이트 모어랜드는 "난 멕시코에서는 당당히 야구를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나는 경기를 뛸 수 없는 미국을 위해 싸워야 하는군요" 라며 서러워 했다. 태평양 전선과 유럽전선에서 미국의 젊은이들은 흑백을 가리지 않고 피를 흘렸던 것이다. 

1944년 11월에 극심한 인종주의자였던 랜디스 커미셔너가 사망하고 상원의원이었던 앨버트 챈들러라는 사람이 커미셔너직을 이어받았는데, 그는 흑인들의 빅리그 진입에 대하여 비교적 유연한 입장을 가진 인물이었다. 전쟁의 막바지에 대통령직을 승계한 트루먼도 “전쟁을 같이 했으면 야구도 같이해야 한다” 며 긍정적인 언질을 주었다. 여론은 흑인에게도 기회를 공평하게 주자는 흐름이었고, 이에 뉴욕 양키스에 밀려 항상 2인자위치에 머물렀던 아메리칸 리그의 보스턴 레드삭스도 시의회의 압력으로 마지 못해 흑인들을 대상으로 한 트라이아웃을 받아 들였다.

Troops play in Itary / wwiimusium.org
Troops play in Itary / wwiimusium.org

니그로리그의 캔자스시티 모낙스에서 뛰고 있던 재키 로빈슨에게도 제안이 와서 1945년 4월에 열린 이에 참가하였다. 지금은 메이저리그 구장 중 가장 오래된 구장인 보스턴의 펜웨이 파크에서 진행된 트라이아웃 도중 "당장 그 검둥이들을 내보내지 못해!" 라는 찢어지는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터져 나왔다. 재키 로빈슨은 다른 흑인선수들과 함께 황급히 구장을 빠져나왔고 빅리그의 문턱에서 이렇게 쫒겨나고 말았다. 보스턴 레드삭스는 1949년에도 윌리 메이스라는 걸출한 흑인 외야수와 계약할 기회를 또 한 번 놓치고 만다. 1920년에 베이브 루스를 뉴욕 양키스에 팔아 넘긴 후 2004년까지 84년동안 월드시리즈에서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다는 이른바 '밤비노의 저주'는 어쩌면 피부색이 다른 이 두 명을 영입했더라면 일찍 깨졌을지 모르는 '인종차별의 저주'였던 것 같다. 보스턴 레드삭스는 당시 16개였던 메이저 리그팀 중 맨 마지막으로 흑인선수를 받아들였다.

 

5. 브랜치 리키와 재키 로빈슨의 운명적 만남

명예의 전당 헌액자 / wikipedia
명예의 전당 헌액자 / wikipedia

그 당시 흑인들의 빅리그 진입에 가장 먼저 앞장선 이가 있었으니 브루클린 다저스의 단장이었던 브랜치 리키라는 사람이다. 야구계의 혁명가, 야구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 불리는 그는, 대학코치시절에 팀의 흑인선수가 원정경기에서 호텔숙박을 거부당하자 손톱으로 자신의 피부를 긁어 대며 울부짖는 장면을 수십년 동안 뇌리에 지니고 있었다. 이제 기회가  왔으니 평생 품었던 흑인에 대한 연민을 풀어야 했으리라. 리키는 그의 애제자인 조지 시슬러에게 “흑인 선수중에 야구도 물론 잘 해야 하지만, 어떠한 인종차별의 모욕과 질시도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를 찾아보라” 라고 지시하며 “기왕이면 백인들이 무시 못 할 대졸학력이면 더 좋겠다.”라고 덧붙였다.

Monte Irvin / wikimedia
Monte Irvin / wikimedia

맨 처음 접촉했던 흑인선수는 몬테 어빈이라는 선수였다. 그는 링컨대학 치의예과에 풋볼선수로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지만, 감독과의 불화로 장학금을 받을 수 없게 되자 학업을 그만두고 야구선수로 전향하여 니그로 리그와 멕시칸 리그에 진출하여 발군의 실력을 펼친 선수였다.  하지만, 리키의 제안을 받을 당시엔 2차 대전 때 공병대에서 근무하면서 얻은 이명증세 때문에 본인 스스로 아직은 빅리그에서 뛸 상태가 아닌 것으로 판단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실력면에서는 재키 로빈슨에 앞선다고 믿었지만, 흑인 최초의 메이저리거라는 명예 아닌 멍에를 감당하기엔 부족해 보였다. 그는 이로부터 2년 후인 1949년에 브루클린 다저스의 라이벌 팀인 뉴욕 자이언츠와 계약하여 재키의 영혼이 눈물로 닦아 놓은 흑인 메이저리거의 길을 따라 가게 된다.

몬테 어빈에 이어 브랜치 리키가 접촉한 다음 카드가 바로 보스턴 레드삭스의 트라이아웃 도중 쫓겨난 재키 로빈슨이었다. 재키 로빈슨은 1919년생으로 몬테 어빈과 동갑내기이며, 조지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이듬 해에 아버지가 가출하자 남은 식구들이 그나마 인종차별이 덜 심한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였다. 어린 시절 한때 갱단에 가입하는 등의 방황도 겪었으나 친구들의 설득으로 빠져나오기도 했다. 그는 페사데나 대학에 이어 UCLA에 입학했고, 만능 스포츠맨으로 활약했다. 육상에서는 ‘검은 소프’로 불리웠고, 풋볼의 하프백, 농구의 가드 포지션을 섭렵했으며, 테니스에선 전미 대학 4강에 오르기도 했다. 

재키 로빈슨(왼쪽)과 브랜치 리키 / wikipedia
재키 로빈슨(왼쪽)과 함께 / wikipedia

1942년에도 그의 탁월한 운동신경을 알아본 야구기자가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줄기차게 청원하여 입단테스트를 했으나, 구단이 썩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임했는지 계약에까지 이르진 않았다. 재키 로빈슨은 이에 군입대를 결심하여  육군 장교에 지원했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거절 당하하고 만다. 그런데 복싱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조 루이스에게 도움을 청해 제복을 입을 수 있었다. 군 복무중 어느 날, 버스를 탔는데 뒷좌석에 타기를 거부하기도 했고, 상관의 인종차별에 항의하다 군법회의에 회부어 불명예 제대할 뻔한 적도 있을 정도로 육군장교로서의 자존감을 지키려 했다.

군 제대후 마이너리그 팀에서 뛰다가 보스턴 레드삭스의 위장 트라이아웃 사건으로 한 차례 좌절했던 재키 로빈슨이 브루클린 다저스의 브랜치 리키 단장을 처음 만난 것은 1945년 8월 28일의 일이었다. 리키 단장은, 운동장에서 기차안에서 식당에서 호텔에서 그에게 어떠한 협박과 모욕, 조롱과 시비를 걸어와도 그 부당함에 맞서지 않고 참고 견뎌낼 수 있는 지를 직접 시험했고, 그러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재키 로빈슨은 역사적인 빅리그 진입을 위한 담금질을 위해 몬트리올에 있는 다저스의 팜팀에 가기로 계약한다.

 

6. 인종장벽을 허물다

Jackie Robinson, Brooklyn Dodgers, 1954 / Wikiemedia
Jackie Robinson, Brooklyn Dodgers, 1954 / Wikiemedia

1947년 4월 15일, 브루클린 다저스의 홈구장인 에베츠 필드에는 27,000명의 관중이 스탠드를 메웠는데, 그중 절반이 넘는 14,000명이 흑인이었다. 1884년 플릿 워커가 쫓겨난 지 63년 만에 검은 피부의 사람이 빅리그 무대에 등장하는 역사적인 날이다. 하지만 그 당시의 분위기는 '흑인은 사람도 아닌 시대' 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그가 데뷔한 시즌의 어떤 날엔,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감독과 선수들이 온갖 모멸적인 발언을 토해냈다. 

"이봐, 깜둥이, 목화밭으로 돌아가는 게 어때?" 
"정글에서 너의 친구 원숭이들이 기다리고 있단다." 

1947년의 첫 신시내티 원정에선 스탠드의 관중들이 인종차별적 비방을 퍼부어댔다. 이에 다저스 팀의 주장이자 유격수인 피위 리즈 선수가 로빈슨에게 다가가 에깨동무를 하며 다독여 주기도 했다. 세인트루이스 원정길에선 화려한 호텔로 들어가는 팀 동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에어컨도 없고 편의시설도 없는 흑인전용 호텔에서 자야 했다. 데뷔 시즌에 그의 나이는 어느덧 야구선수로선 전성기가 지나버린 28세 였다. 하지만 151경기에 출장하여 타율 .297, 12 홈런, 29 도루를 기록하며 그 해 처음으로 제정된 NL 신인상을 받는다. 데뷔 첫해의 성과는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하는 계기가 되어, 부당함에 맞섰던 육군장교 시절의 자존감을 서서히 찾아가고 있었다.

데뷔 시즌에 재키 로빈슨은 1루수를 보았는데, 어떤 선수가 안타를 친 후에 스파이크로 그의 발등을 밟고 지나간 적이 있었다. 이듬해에 재키가 2루수를 보고 있을 때에 그 선수가 2루 베이스를 향해 슬라이딩하며 미끄러져 들어오고 있었다. 재키는 공을 쥔 글러브로 그의 얼굴을 강타하여 옥수수를 날려버리는 복수를 한 적도 있었다. "그 때의 일을 잊지 않았어" 라는 말도 함께 돌려줬다.

Jackie Robinson Day / Wikimedia
Jackie Robinson Day / Wikimedia

1948년 어느 날에 벌어진 일화는 그의 등번호 42번이 모든 선수의 것으로 기억되는 계기가 되었다. 신시내티 원정때 구장의 클럽하우스에 편지가 날아들었다. 원본 그대로 옮겨 본다. ‘Robinson, We are going to kill you if you attempt to enter a ball game at Crosley Field.’ 로빈슨은 이 편지를 클럽하우스의 게시판에 걸어 두었다. 그리곤 대수롭지 않게 웃어 넘겼다. 팀 동료인 진 허마스키가 말했다. “우리 모두 42번을 등에 붙이면 어떨까? 그러면 누구에게 총을 쏘아야 할지 모르잖아” 이 농담같은 위로의 말이 2009년 이후의 재키 로빈슨 데이에 모든 선수들이 등번호 42번을 달게 된 배경이 되었다. 

1949 시즌엔 조지 시슬러에게 밀어치기 타법을 전수 받은 후, 타율 .342 16홈런, 37도루를 기록 NL MVP 에 오르게 된다. 그가 다저스 소속이었던 10년 동안 팀은 6번의 리그 챔피언에 올랐고, 1955년엔 뉴욕 양키스라는 제국을 쓰러뜨리고 월드시리즈를 거머쥐는 최전성기를 맞는다. 다저스의 구단주가 된 월터 오말리는 1956년 시즌이 끝난 후 그를 뉴욕자이언츠로 트레이드 하려했으나, 그는 은퇴를 선택하고 10년간의 메이저리그 생활을 접는다. 

재키 로빈슨은 1962년 흑인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헌액식에서 행한 연설에서 그는, MLB에 아직 흑인감독이나 사무직 간부들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은퇴 후에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고 동지가 되어 흑인들의 일자리와 권익을 위해 살아가다 온갖 차별적 협박과 모멸감을 참아내며 얻은 신경쇠약과 당뇨병의 합병증, 그리고 갑작스런 사고로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1972년 5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7. 흑인 민권운동과 영구결번 <42>

로빈슨은  미국 흑인 인권사에 역사적인 이정표를 세운 킹 목사와 흑인에 대한 불평등에 대항하여  함께 싸워온 동지이자 친구였다. 킹 목사가 25만 청중이 모인 워싱턴 D.C의 링컨 기념관 앞 광장에서 "내겐 꿈이 있습니다." 로 시작하는 역사적 연설을 할 때 로빈슨은 아이들과 함께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1963년 8월 28일의 일이었다. 킹 목사는 민권운동에 적극 가세한 로빈슨에 대해 "자유라는 큰길을 향한 외로운 샛길에 발걸음을 옮긴 순례자" 라면서 민권운동을 위한 시위를 벌이기 전부터 그는 비폭력을 지향하는 활동가였고, 자유를 위한 운동을 벌이기 전부터 그는 자유의 기수"였다며 높게 평가했다.

2003 Jackie Robinson Congressional Gold Medal / wikimedia
2003 Jackie Robinson Congressional Gold Medal / wikimedia

그의 데뷔 이후에 그가 닦아 놓은 길을 따라 흑인선수들이 줄을 이어 빅리그에 진입하였음은 물론이고, 1년 후엔 미국의 군대도 흑인의 입대 제한을 완전히 해제했다 하고, 8년 후에는 공립학교에서 흑인과 백인을 따로 교육하던 것도 금지시켰다고 한다. 18년 후엔 버스안에서 백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베이브 루스가 야구를 바꿨다면, 재키 로빈슨은 미국을 바꿨다'는 유명한 구절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1997년, 재키 로빈슨의 데뷔 50주년이 되던 해에 그의 등번호 42번은 전구단 영구결번으로 지정됐고, 2004년 부터는 그가 데뷔한 4월 15일을 `재키 로빈슨 데이`로 지정하여 인종장벽을 무너뜨린 그 날을 기념하고 있고, 2009년 부터는 재키 로빈슨 데이에 메이저리그 전 구단에서 그의 등번호 42번을 모든 선수들이 달고 경기에 임하고 있다. 올해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습격으로 메이저리그 개막전이 늦춰지는 바람에 1963년 흑인시위가 있었던 8월 28일을 재키 로빈슨 데이로 변경하였다. 

Jackie Robinson Memorial / wikimedia
Jackie Robinson Memorial / wikimedia

재키 로빈슨 공식 홈페이지  https://www.jackierobinson.com

 

류현진 선수가 자신의 등번호 99번 대신에 42번을 달고 마운드에 섰던 그날 2020년 8월 28일에 영화 <42>에서 재키 로빈슨역 맡았던 채드윅 보스만이 대장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소식이 전해졌다. 공교롭게 이러한 우연이 겹쳐진 것은, 흑인들에 대한 백인 경찰의 무자비한 무력사용이 끊이지 않고 있는 2020년의 미국 사회에 기억해야 할 두 사람, 흑인 민권운동의 동지였던 재키 로빈슨과 마틴 루터 킹을 떠올려 주고 싶은 하늘의 뜻이었을까?

 

 

 

 

 

 

 

 

 

 

고순언 원장 (하남 고치과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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