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문인 ‘반레’ 선생님을 추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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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문인 ‘반레’ 선생님을 추모합니다
  • 송필경
  • 승인 2020.09.08 17: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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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어떤 고통에도 잃지 않았던 그 온화한 미소…베트남평화의료연대 송필경 전 대표

『내 조국은 부자 나라가 아닐지라도 아음다운 나라야.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싸웠지….
아, 당시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총명하고, 가장 용감하고, 가장 헌신적인 사람들이 모두 죽었어.
우리는 그 때 동료들을 만날 때 서로 정을 주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었어. 앞으로 그를 두 번 다시 보기 어려웠으니까.
비가 오면 너무 슬퍼.
그래 … 다들 비가 올 때면 괜히들 우울해지곤 하지.
그런데 나는 말이야, 저 비속에 죽은 채로 고스란히 쏟아지는 비를 맞고 있던 동지들이 생각나고, 그들을 묻으며 비와 함께 울던 나와 내 동료들이 생각나서 너무 가슴이 아려와…』

베트남의 대표적인 문인 가운데 한 분이신 ‘반레’ 선생님이 남긴 말씀입니다.
'베트남평화의료연대'가 호치민 시에 가면 ‘반레’ 선생님을 찾아 그 분께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에게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겪은 베트남전쟁 기억을 잔잔하게 회상하십니다.

‘반레’ 선생님은 시인이자 소설가 그리고 영화감독으로 왕성하게 활동한 팔방미인이셨습니다. 

‘반레’ 선생님은 1949년 태어났습니다. 17살이던 1966년에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 어머니 몰래 자원입대를 신청했습니다.

입대 날 아침, 입대 사실을 모른다고 여겼던 어머니께서 평소와 달리 아주 푸짐한 밥상을 차려 놓았습니다.
아무 말 없이 천천히 밥 먹는 아들을 지켜보던 어머니는 조용히 당부를 하셨습니다.

“아들아, 네가 총 들고 전장에 섰을 때 총구 너머 있는 사람은 바로 적이란다.
하지만 총을 거두게 두면 적군도 아군도 없게 되지. 그저 사람이 있을 뿐이란다.”

어머니는 죽음의 전장에 아들을 보내며 울부짖지 않고 이렇게 조용히 당부했습니다.
폭력을 싫어하고 사랑과 평화를 간절히 바란 어머니, 그 베트남 여성의 참모습이었습니다.

북부 출신인 ‘반레’ 선생님은 험난한 호치민 루트를 통해 아득히 먼 남부전선으로 갔습니다.

1975년 전쟁이 끝났을 때까지 10년간 ‘미국전쟁’을 치렀습니다. 같이 입대한 동료가 3백 명 이었는데 살아남은 5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베트남인들이 ‘미국전쟁’이라 부른 베트남전쟁은 너무나 잔혹했습니다.
가족을 잃고, 친구를 잃고, 사랑이 있었다면 그마저 잃게 했습니다.
‘반레’ 선생님은 처절했던 전쟁에서 살아남은 위대한 승리자였지만 전쟁을 증오했습니다.
‘반레’ 선생님은 전쟁이 어떻게 대지를 파괴하고, 어떻게 인간을 황폐하게 만드는 지를 분명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전쟁 고난을 겪은 민족의 깊은 감정을 엿보기 위해서는 그 민족의 위대한 전쟁 문학을 만나는 게 가장 빠른 지름길입니다. 그리스에서 호머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를 만나듯 말입니다.
위대한 전쟁 문학이 위대한 예술인 까닭은 비극적인 다양한 삶 속에 인간의 본질적인 염원을 심오하게 형상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를 얻기 위해 우리는 베트남에 가면 시인이자 소설가인 반레 선생님을 찾았습니다.

베트남의 위대한 전쟁 문학은 전쟁 참상과 극악한 조건 속에서 황폐해 가는 인간 모습을 보여 줄 뿐 아니라, 인간 정신은 인간이 가진 어떤 무기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베트남의 전쟁 문학에는 어떠한 이념도 인간 존엄보다 더 귀중할 수 없다는 베트남의 숭고한 민족정신이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레’ 선생님과 아주 친했던 소설가 방현석 중앙대 교수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반레’의 문학에는 미국이 왜, 어떻게 해서 패배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대답이 담겨 있습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패배한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정글 때문도, 거미줄처럼 얽힌 땅굴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이 옳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백분의 일에도 못 미치는 무기를 지니고 있었지만, 베트남 사람들이 미국보다 백 배는 옳았고 천 배는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반레’ 선생님은 우리와 헤어질 때 늘 하시는 말씀은 이렇습니다.
『한국 젊은이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통일을 여러분이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지 간에 여러분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한 민족이 갈라서 살 수 없습니다. 꼭 통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한국 젊은이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입니다.』

‘반레’ 선생님이 지난 9월 6일 밤, 71세로 운명하셨습니다.
우리 한국인은 더 이상
그 온화한 미소를 볼 수도, 그 잔잔한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우리는 선생님을 잊지 않겠습니다.

반레 시인(제공=송필경)
반레 시인(제공=송필경)

다음은 ‘반레’ 선생님의 시 한 편입니다.

『적들이 감옥 문을 잠시 연 날
두 살 박이  다섯 살 박이 수인들이 햇빛 속으로 엉금엉금 나왔다
담장 밖 풀을 뜯는 물소 한 마리
아이들이 다툰다.
저건 코끼리야
담장에 기대앉은 여자 수인들, 저마다 웃음이 터지네
볼에는 눈물이 가득 흐르네

<꼬마 수인들이 다투는 소리를 듣다>』

이 시는 미국과 베트남의 평화협정이 진행되면서 정치범들이 잠시 사동 밖으로 나와 햇빛을 볼 수 있었던 1973년에 쓴 것입니다.
임신한 채 수감된 여죄수들은 감옥에서 아이를 낳고, 길러야 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수인이었던 아이들은 이날 태어나서 처음 감방 밖 햇빛 속으로 나왔습니다. 물소를 보고 코끼리라고 다투는 ‘어린 수인’들을 감옥 담장에 기대앉아 바라보는 어머니들의 웃음과 눈물을 잔잔하게 그린 것입니다.

다음은 2005년에 있었던  ‘베트남평화의료연대’와 ‘반레’ 선생님 사이 대담입니다.

질문; “영화감독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베트남 전쟁에 관한 허리우드 영화를 보며 느끼는 솔직한 감정은 어떠한 가요?”

대답: “확실히 얘기할 수 있는 것은 허리우드 얘들이 영화를 진짜 못 만든다는 거죠. (웃음) 그리고 철저히 자신들의 관점으로 영화를 만듭니다. 우리 베트남에 재능이 있는 감독들이 있는데 모스크바 영화제 감독상 "불타는 들판"을 만들었죠. 이 영화를 가지고 미국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미국감독들이 " 당신이 그린 미국은 우리와 하나도 안 닮았다." 그러자 감독은 "그럼 너희들은 우리 공산군을 참 잘도 그렸다." 이렇게 한마디 해줬다고 하네요. "너희들은 공산군은 작고 못생기고 새까맣고 이상한, 돌아버린 그런 사람으로 그렸잖아."
돌아와서 우리가 전쟁을 그리려면 좀 더 엄숙히 그려야 하는 것은 아닌가, 제 친구와 저는 결론을 서로를 그것이 아무리 적이라 해도 적을 괴물로 그리는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군복을 벗겨놓으면 그 속에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잊지 말자고 했습니다. 사실 아까는 농담한 것이고 미국은 동적인 영화, 동적인 영상을 진짜 잘 만듭니다. 그들이 그런 강한 행동을 통해 스스로가 협객이었으면 좋겠고 생각했고 우리 혁명군을 그들 협객으로서 무찔러야 할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영화 속의 혁명군들은 어리숙하게, 어리석게 그렸는데 이는 그들에게 득이 되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리숙한 우리에게 졌지 않았습니까.
아시아의 사람들이 아시아의 영화를 만들었으면 좋겠고 아시아의 사람, 정서를, 젊음을 이러한 것을 만들었으면 하는 욕심이 있고, 더 근본적인 것은 결국 인간으로서의 가져야할 무엇을 만들어야 하고 그것은 영화인들이 지녀야 할 엄숙함입니다. 동양적인 영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만 중국의 영화와 일본의 영화가 가져야 할 첫걸음은 인간에 대한 예의입니다.
저는 한국의 영화를 즐겨보고 있습니다.“
 
인간은 서로를 왜곡하며 살았습니다. 서양은 동양을 잘못 봐 왔고, 동양 역시 서양에 대해 그러하였습니다. 우리와 같은 역사를 나눈 중국과 일본과 베트남 역시 서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제 서로가 서로에게 무지했던 과거에서 벗어나 인간의 예의를 차릴 때 밝은 이웃이 되리라 믿습니다.

이런 게 ‘반레’ 선생님 교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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