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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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선생님’
  • 송필경
  • 승인 2020.07.03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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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전태일인가?』- 여덟 번째 이야기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올해는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지 50주기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해 열사가 살던 옛집이 남아 있는 대구에서는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대경지부 등 대구시민사회단체들이 오는 11월 13일 열사의 분신 50주기를 맞아 대구전태일기념관 개관을 목표로 활발한 활동을 벌여오고 있다.

본지에서는 한국 노동운동의 첫 출발점이자 우리 현대사에 가장 큰 발자국을 남긴 사람들 중의 한 분인 전태일 열사의 분신 50주기를 맞아 그의 삶이 우리 역사에 남긴 의미를 되돌아보고자, 대경건치 회원으로 오래 전부터 열사의 삶의 족적을 쫒아온 송필경 논설위원의 『왜 전태일인가?』를 연재한다. 송필경 논설위원의 『왜 전태일인가?』는 오는 8월까지 1달에 2-3회 연재될 예정이다.

- 편집자 주

함석헌(1901∼1989) 선생은 자신이 발행한 월간지 『씨ᄋᆞᆯ의 소리』에 전태일 일기를 게재했다. 또 기일 때마다 전태일에 관한 글을 발표하고, 『씨ᄋᆞᆯ의 소리』 주최로 '전태일 선생 추도식'을 거행했다.

일생 동안 ‘선생님’으로 존경받았던 함석헌 선생은 자신보다 47살이나 어린 전태일을 항상 '전태일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씀했다.

전태일 군은 나이로 보면 손자뻘이 됩니다. 그러나 22살 짧은 삶을 살았어도 그는 제 할 일을 다 하고 간 사람이 아니겠소. 나이는 많지만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을 다 못했기 때문에 그는 나한테 선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나이를 얼마나 먹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 할 일을 다 했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지금은 교육계에 종사하면서 남을 가르치는 분을 선생(先生)이라 했지만 옛 본래 의미는 도를 깨달은 자, 덕업이 있는 자, 성현의 도를 전하고 학업을 가르쳐주며 의혹을 풀어주는 자를 뜻했다.

요즈음 자기보다 학식이 많은 사람을 높여 이르거나, 어떤 일에 경험이 많거나 잘 아는 사람에게 쓰는 말이기도 하다.

함석헌 선생이 전태일에게 부른 ‘선생’이란 존칭은 이런 모든 뜻을 담았다고 할 수 있다.

함석헌(왼쪽)과 전태일(사진제공= 송필경)
함석헌(왼쪽)과 전태일(사진제공= 송필경)

한유(韓愈; 768 ~ 824)는 중국 당나라 시대 문학가이자 사상가이며,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으뜸으로 꼽는다. 한유의 작품 가운데 『사설(師說)은 중국 역대 명문장만을 모은 고문진보(古文眞寶)에도 나오는 글이다. 사설은 ‘스승을 찾아 도를 배워야 하는 이유를 논함’이란 뜻이다. 그 가운데 일부이다.

나보다 먼저 태어나 그 도(道) 듣기를 진실로 나보다 먼저라면, 내 그를 스승으로 삼는다.
나보다 뒤에 태어나 그 도 듣기를 나보다 앞이라면, 내 그를 스승으로 삼는다.
나는 도를 스승으로 삼으니 나보다 먼저 나고 늦게 남을 따지겠는가?

같은 시대 문장가 유종원(柳宗元, 773 ~ 819)은 『사설을 이렇게 봤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스승을 섬기지 않았다. 오늘날에는 스승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했다. 있다면 비웃거나 미친 사람으로 여겼다. 다만 한유만이 세속의 비웃음이나 모욕을 돌아보지 않고 학생들을 불러 모아 『사설을 지었으며, 얼굴을 치켜들고 스승이 되었다.

아득한 옛날인 당나라 시절 역시 남을 따라 배우기를 꺼리는 못된 풍조가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우리에게는 괴이한 신화가 있다. 특히 유교적 인간관계에서 나이가 권위가 되기 십상이다. 나이만 들면 무조건 공경 받고, 존중 받고 나아가 존경 받기를 원한다. 심지어 강요한다.

공경(恭敬)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공손히 받들어 모시는 걸 말한다.
존중(尊重)은 상대를 높이어 귀중하게 대하는 걸 말한다.
존경(尊敬)은 남의 인격, 사상, 행위 따위를 우러러 소중히 받드는 걸 말한다.

공경과 존중은 예의이고 의무이다. 때로는 겉치레이거나 위선적이거나 심지어 복종하기를 뜻한다. 그러나 존경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다. 자발적인 탄복이고 경탄이다.

국민에게 ‘선생’으로 불린 함석헌은 자신보다 아주 젊은 전태일을 ‘선생’으로 ‘존경’했다. 그 까닭은 함석헌 평전에 잘 나타나 있다. (씨ᄋᆞᆯ 함석헌 평전 이치석 지음, 시대의 창, 2015)

1970년 말에 함석헌 선생은 퀘이커(기독교의 한 교파) 세계대회 참석차 미국에 체류 중이었다. 12월 29일에 전태일의 소식을 들었다. 분신한 지 한 달 반만이었다.

“그 때 내 슬픔은 참으로 컸다…”, “ 태일아! 내가 너를 죽였구나”하면서 몇 번이고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함석헌 선생은 ‘밤새 울었다’면서 전태일의 죽음이 자신의 잘못인 양 질책했다. 아울러 그의 분신 기사를 ‘그 사람의 마음이라기보다 하늘마음이 움직여서 그리된 일’이라고 읽었다. 그 '하늘마음'이란 전태일의 희생을 구원의 의미로 받아들였다는 뜻이기도 했다.

1971년 4월 22일, 함석헌 선생은 해가 바뀌어 미국을 떠나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택시를 타고 전태일이 살던 쌍문동의 허름한 집으로 직행했다. 이소선 어머니는 집 안으로 들어오던 함석헌 선생의 슬픈 얼굴이 마치 ‘예수님 같았다’고 기억했다. 함석헌 선생은 이소선 어머니에게 무엇이든지 도울 일이 있으면 돕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태일 집을 떠났다.

1971년 11월 13일 토요일 오후 2시 장충동 경동교회에서 전태일 1주기 추모집회가 열렸다. 이 집회는 평화시장 청계피복노조와 함석헌 선생이 주관하던 '씨ᄋᆞᆯ의 소리'가 공동 주최하고, 가톨릭노동청년회와 도시산업선교회가 후원했다.

이날 추모식은 조향록 목사가 추도 예배를 집전했고, 함석헌 선생의 ‘전태일을 살려라’와 고려대 교수 이문영의 ‘기도교가 본 전태일’ 강연이 연이어 있었다. 모든 언론이 침묵한 가운데 열린 추모식에서 함석헌은 낭만주의 시인 브라우닝(Robert Browning)의 만가(輓歌;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노래나 시)를 비장하게 읊었다.

“일찍이 등을 돌려 뵌 일이 없이
늘 앞만을 향하고 나간 사람이오.
구름은 걷히고야마는 것을 의심한 일이 없었고,
비록 옳은 것이 한때 억울을 당해도
악한 것이 이기리라고는 생각해본 일이 없으며
넘어짐은 일어서기 위함이요,
짐을 이기기 위해서이며
잠은 깨기 위해서라고 믿었던 사람이다.”

이 만가는 르네상스 시대를 살다간 어느 고귀한 인물의 생애를 읊은 것이데, 세상을 떠난 전태일의 영혼을 위하여 살아남은 자들이 감상적으로 슬퍼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를 살려내어 응원하고 같이 싸워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 전태일을 살려라. 그 이름도 그 사명을 표시했던 듯한 전태일, 전全은 전체 아닌가? 태泰는 큰 아닌가? 일壹은 하나 아닌가? 큰 하나 전체! 태일은 태일로 살았다. 태일을 전체로 살려라!”

함석헌은 ‘몸으로는 아니더라도 몸보다도 더 높은 생명’으로 다시 태어날 전태일의 미래를 ‘영원한 생명’의 씨ᄋᆞᆯ로 확신했다. 이 비통한 연설은 전태일의 분신을 제3의 인격으로 승화시킴으로써 당시 절망적인 상태에 있던 한국 사회에 극적으로 물길을 터주는 실마리처럼 보였다.

그의 죽음이 살아 있는 자들 중에서 죽은 자의 지위를 약속하는 공공한 성격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전태일의 유서에 나오는 구절 ‘큰 하나 전체’의 의미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해준다.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말아주게”

함석헌 선생은 전태일의 죽음 이후 우리나라의 살길은 ‘제도의 혁명’, ‘사상의 혁명’, 그리고 ‘혼의 혁명’ 세 단계에 있다면서 먼저 전태일에게 죽음을 강요한 기존의 제도를 전적으로 부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인간들이 하고 있는 정치 제도, 사회 제도, 경제 제도, 종교, 교육의 모든 제도가 인간의 자람을 방해하고 있다. 자본주의 밑에서 아무리 정직해도 그 정직은 정직이 아니요, 공산주의 밑에서 아무리 자유하려고 해도 자유가 아니다.”

손자뻘 어린 젊은이에게 선생이라 부른 함석헌 선생은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올바른 이치를 깨달은 선생이셨다. 함석헌 선생 같은 이런 정직한 지성인은 역사에서 아주 드물게 있었다.

왕삐(王弼; 226 ~ 249)는 오랜 중국 역사에서 불가사의한 천재로 첫 손에 꼽힌다. 인문학 계통의 천재 가운데서도 왕삐 같은 인물은 인류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중국에서 가장 오묘한 책으로 꼽히는 노자의 도덕경(道德經)과 유교 핵심 서적인 사서(四書)의 주역(周易)을 해석하고 주석(註釋)을 달았다. 전태일과 비슷한 나이인 만 23세에 죽었다. 23세에 벌써 심오한 사상을 구축한 셈이다.

왕삐가 노자의 도덕경을 주석한 것은 16살로 추정하고 있다. 중3 또는 고1이라면 인간 지성의 수준으로 볼 때는 젖먹이 애송이다. 그러나 이 애송이가 도덕경』에 단 주석은 당대의 허옌(何晏; 193?-249)을 비롯한 학자들의 철학 사상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 뿐만 아니라 중국 전 역사를 통 털어 가장 탁월하고, 심오하고, 지금까지 널리 읽히는 가장 권위 있는 주석으로 꼽힌다. 20세가량에 주석을 단 주역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 고1 정도의 학생이 근대 철학서 가운데 심오하기 그지없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해석하고 주석을 달았다고 생각해 보라. 또한 대학 1년생이 까다롭기 그지없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해석하고 주석을 달았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모차르트는 6살 때 최초로 작곡을 했고, 8살 때 교향곡을 쓰고, 12살 때 오페라를 썼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그런 작업은 음악가인 아버지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15살부터는 본격적인 진지한 작품을 작곡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모차르트가 불가사의한 음악적 천재임을 부인할 수 없다.

피카소의 아버지는 화가였다. 13살의 피카소가 그림을 그리는 재능을 보고 아버지는 그림붓을 꺾었다고 한다.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파스칼은 12살에 혼자 힘으로 ‘유클리드 기하학의 32가지 정리’를 생각했다.

예술이나 수학 같은 영역에서 어린 재능이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는 것은 인간사에서 어느 정도 있는 사실이고 이해할 수는 있다.

우리나라의 김응용(1962~)은 만 5세 때 일본 후지 TV에 출현해 대학교수가 출제한 미적분 문제를 척척 풀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어야 이해할 수 있는 심오한 철학을 통찰하고 통달했다는 왕삐의 재능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인류사의 수수께끼다.

왕삐는 조조, 유비, 손권이 혈투를 벌이던 삼국시대 조조의 위나라 사람이다. 풍부한 재능을 타고난 데다 유복한 학문적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일찍 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0살 때 이미 노자를 좋아했다고 한다.

젖먹이 왕필은 참신한 철학적 방법과 입장을 가지고 노련한 현학자들과 교분을 맺으며 자신의 철학적 문제의식을 가꾸고 하나의 현학 체계로 키워 나갔다고 한다.

거의 40여 세 연상이며 당시 조조의 양자로서 권세가이자 당대의 대사상가인 허옌은 왕삐를 만났다. 허옌도 노자의 도덕경에 주석을 달고 일가견을 가졌다고 자부했으나 왕삐의 주석을 보고 감탄하여 평생 자기가 이룬 경지가 애송이로 생각한 왕삐의 수준보다 한 단계 밑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인물이라면 가히 더불어 하늘과 사람의 사이를 논할 수 있겠다”라는 탄식을 발하고 허옌은 자신의 주석을 거두어 들였다.

허옌이 당대의 석학으로서 또 왕삐보다 훨씬 나이가 많고 높은 지위에 있었음에도 애송이 청소년에게 학문적으로 복종했다는 것은 참으로 정직한 학자의 태도였다.

허옌은 왕삐의 천재성를 누구보다도 알아주고 학문적 성취를 가장 칭찬해 주었으며 또 조정에 천거하여 중용하려고 애쓰던 후견인이었다. 바로 그러한 정직한 학자적 태도야말로 허옌이라는 석학을 석학다웁게 했고 역사가 존경하는 인물로 남게 했다.

비록 한 예이지만 중국의 위대한 학문을 탄생시킨 인물의 정신세계가 이토록 정직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요즘 우리 학계 풍토를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함석헌 선생이 노동자의 고통을 통찰한 어린 전태일에게 ‘선생’이란 존칭을 붙인 자세는 허옌이 왕삐에게 신복(神伏; 정신을 엎드린다, 감복한다)한 자세와 조금도 다를 바 없으며 이런 자세가 정직한 지성이고 지혜다.

바둑을 둘 때 바둑의 정석 논리를 정확히 따라가면서도 바둑판을 초월한 전체를 볼 줄 아는 고수에게 바둑의 정석 논리만 따라할 수밖에 없는 능력을 지닌 하수는 승복하지 않을 수 없다.

지혜는 깊은 이론의 깨닫기 힘든 지식이 모인 집합체가 아니다. 지혜는 그런 현학(玄學)적인 지식을 뛰어넘어 우리 몸으로 궁극적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는 것이다.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느껴야 한다.

왕삐는 노자의 도덕경라는 텍스트를 넘어서서 살아있는 노자의 정신세계로 곧바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하옌은 그런 왕삐의 천부적인 능력에 감복한 것이다.

전태일은 사회 구조 이론 따위를 뛰어넘어 어린 여성 노동자의 고통에서 사회 모순의 핵심을 찾아내 그 고통을 세상에 알리려고 몸을 바쳤다. 함석헌 선생은 그런 전태일의 지혜의 순수함에 감복하지 않았을까.

나이를 불문하고 실력자를 실력자로서 대접하는 비권위주의적인 자세 없이 지식인은 지혜를 제대로 얻을 수 없다.

지식의 축적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더 필요한 요소가 지혜다. 그런데 지혜를 얻으려면 나이, 학벌, 성별 따위의 비본질적 권위를 내세우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지성을 지식을 쌓은 자가 독점해야 한다는 생각이 주류를 이룬다. 지식의 축적이 지성을 이루고 지성 속에서 지혜가 생겨난다는 단계적인 생각은 어쩌면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지성이 만든 사상은 사회 행동을 설명하거나 해석할 수 있고 새로운 역사를 형성할 수 있는 큰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사상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남한 사회에서 사회운동의 질적 변화의 출발점은 노동자의 자각을 불러일으킨 전태일의 분신 사건이었다. 1979년에 유신체제가 막을 내리게 한 큰 힘은 노동자의 각성과 저항이었다.

1980년에는 유신체제보다 더 극악한 5공 체제가 들어섰다. 젊은이들은 물리적 저항만으로는 체제 변화에 한계가 있다고 보고 남한 체제의 근본 모순을 찾았다. 새로운 사회체제를 위한 이론을 찾았다. 남한 사회의 모순은 분단에서 비롯한 것이므로 민족 해방을 부르짖는 강력한 그룹이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주사파의 김영환이다. 결과적으로 김영환은 선지자적 고독한 투쟁이 아니라 현란한 오만에 빠진 추악한 억지 투쟁을 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핍박 받는 노동자의 해방을 주장한 그룹이 있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전태일의 후계로 자처한 김문수다. 김문수는 노동자의 폭력 투쟁을 계획하다가 좌절했다. 한때는 전태일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지내며 전태일 정신 구현에 앞장섰다. 참으로 안타깝게 속된 권력을 탐닉하는 정치인으로 변신하고 말았다.

최고 학부를 다니며 풍부한 지식을 가진 인물들이 어째서 그 지식으로 더 생기 있고 사리에 더 밝아지지 않았을까.

전태일 사후 50년, 위대한 6.10항쟁 33년이 지나도 루쉰의 말처럼 ‘아침에는 훌륭한 결심을 하고 저녁에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 자들이 우리 사회에는 왜 아직 이리 많이 득실댈까.

지식인들이 강력한 이론 지식에 의존했기 때문에 자기 판단력을 짓눌리고 억압돼 오그라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지식은 빛이 없는 마음에 빛을 주는 것이 아니고, 볼 줄 모르는 장님에게 볼 힘을 주는 것이 아니다.

지식인은 지혜로운 사람이 결코 아니다. 지식이 낳은 이론은 지혜가 아니었다.
지식으로만 무장하면 잘 난체 하고 거만해지는 것밖에 없다.
선(善)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어떤 지식이든 모두 유해하다.

나는 웅장하고 차가운 사상보다 소박하고 겸손하고 진실한 심상이 더 위대하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간,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너희들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이 전태일의 절규에 감응해서 자신은 그러지 못함을 정직하게 탄식한 함석헌 선생이야말로 우리 시대 진정한 지성인이요, 위인의 한 사람이었다고 나는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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