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가장 숭고한 이름,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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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가장 숭고한 이름, 전태일!
  • 송필경
  • 승인 2020.04.20 17: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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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전태일인가?』- 두번째 이야기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올해는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지 50주기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해 열사가 살던 옛집이 남아 있는 대구에서는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대경지부 등 대구시민사회단체들이 오는 11월 13일 열사의 분신 50주기를 맞아 대구전태일기념관 개관을 목표로 활발한 활동을 벌여오고 있다.

본지에서는 한국 노동운동의 첫 출발점이자 우리 현대사에 가장 큰 발자국을 남긴 사람들 중의 한 분인 전태일 열사의 분신 50주기를 맞아 그의 삶이 우리 역사에 남긴 의미를 되돌아보고자, 대경건치 회원으로 오래 전부터 열사의 삶의 족적을 쫒아온 송필경 논설위원의 『왜 전태일인가?』를 연재한다. 송필경 논설위원의 『왜 전태일인가?』는 오는 8월까지 1달에 2-3회 연재될 예정이다.

- 편집자 주

유럽연합(EU)을 결성하고 EU의 상징하는 노래를 선택할 때였다. 누군가 베토벤의 『합창』을 선택하자 했을 때 만장일치로 선택했다. 독일 음악이었지만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 강국 어느 나라도 반대하지 않았다. EU의 품격에 가장 적합한 노래였다. 인류의 염원인 단결과 우애를 담은 숭고한 음악이었기 때문이다.(사진제공= 송필경)
유럽연합(EU)을 결성하고 EU의 상징하는 노래를 선택할 때였다. 누군가 베토벤의 『합창』을 선택하자 했을 때 만장일치로 선택했다. 독일 음악이었지만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 강국 어느 나라도 반대하지 않았다. EU의 품격에 가장 적합한 노래였다. 인류의 염원인 단결과 우애를 담은 숭고한 음악이었기 때문이다.(사진제공= 송필경)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들을 때와 나훈아의 노래를 들을 때 느끼는 감정은 사람마다 다르리라. 합창같은 고전음악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합창이 시끄러워 귀에 거슬리게 느낄 것이고, 고전 음악에 친숙한 사람은 합창의 웅장함에 음악의 환희를 느낄 것이다. 나훈아의 노래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트롯 멜로디에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 반면 경박해서 거슬린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으리라.

음악 자체에 사람에게 즐거움 또는 거슬림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듣는 사람의 개성(주관이나 취미)에 따라 즐겁게 혹은 거슬리게 느낄 뿐이다. 개성에 따른 감각의 성향을 귀한 것과 하찮은 것으로 나눌 수 없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정은 무엇일까? 아름다움도 즐거움을 느끼는 감정과 다를 바 없다. 어떤 이에게는 아름답게 보이는 대상이 다른 이에게는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쌓은 지식과 욕구에 따라 자신의 느낌을 판단한다. 그래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정은 개성에 따르며 매우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르느와르의 화사한 그림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피카소의 기하학적 그림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동양의 묵직한 수묵화에서 아름다움의 극치를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정을 “논증은 할 수 없지만 논쟁을 할 수 있는”것이라며 아름다움의 잣대를 절대적으로 또는 보편적으로 주장할 수 없다고 했다.

감성의 인식(감정)을 다루는 ‘미학’을 집대성하여 학문적 영역으로 끌어올린 칸트의 견해를 들어보자.

"더욱 세련된 감정은 주로 두 가지 종류인데, 숭고함의 감정과 아름다움의 감정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감정에서 생겨난 감동은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기분 좋게 한다. 구름 위로 솟아오른 눈 덮인 봉우리의 산악 풍경이나, 성난 폭풍에 관한 묘사, 혹은 밀턴의 지옥에 대한 묘사는 만족스럽기는 하지만 동시에 소름 끼치는 공포도 불러온다.

이와는 달리 꽃들로 가득한 들녘이나, 시냇물이 굽이쳐 흐르고 풀을 뜯는 가축들로 뒤덮인 계곡의 풍경 또는 엘리시온에 관한 이야기나, 비너스의 허리띠에 관한 호메로스의 묘사 역시 기분 좋은 느낌을 불러오면서 즐거움과 미소도 자아낸다.

앞의 예들에 관한 인상이 적당한 강도로 일어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숭고함의 감정을 가져야만 하며, 뒤의 예들에 관한 인상을 우리가 적절히 누리기 위해서는 아름다움을 느낄 감정이 있어야만 한다."

나훈아의 노래는 즐겁고 사람에 따라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훈아의 노래를 숭고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베토벤의 교향곡 합창에서는 아름답기보다는 웅장함에서 오는 숭고함을 느낀다.

르느와르의 화사한 그림은 행복을 느끼게 해주지만, 피카소의 웅장한 그림 게르니카는 야만의 시대를 극명하게 나타내어 보는 이에게 시대의 아픔을 느끼게 한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 상인은 위트가 넘치는 사랑스런 희극이지만, 햄릿은 처절하게 고뇌하는 지성을 보여준다.

웅장하면서 아픔을 느끼게 하고 비극적 지성인 감정은 어떤 것일까? 칸트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자.

"밤은 숭고하고 낮은 아름답다. 숭고함은 감동시키고, 아름다움은 매료시킨다. 위트가 아름답다면 지성은 숭고하다. 숭고한 성질은 존경을 불러일으키고, 아름다운 성질은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비극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희극과 구별된다. 비극에서는 숭고한 감정이 생겨나고, 희극에서는 아름다운 감정이 생겨난다. 비극에서는 타인의 행복을 위한 위대한 희생, 위험에 처했을 때의 대담한 결단, 그리고 모든 시련을 통과한 충정심이 그려진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의 사랑은 애달프고도 온화하며 또한 경이롭다. 타인의 불행은 관객의 가슴을 움직여 공감을 주며, 타인의 고뇌 앞에서 그 관객의 관대한 심장을 뛰게 한다. 그는 조심스럽게 감동하여 자신의 고유한 본성의 위엄을 느끼게 한다."

노래 합창, 그림 게르나카, 연극 햄릿은 아름답다기보다는 숭고하다. 이런 숭고함은 작가 정신의 크기에 비례한다. 위대한 작가는 세상을 자신의 정신 넓이만큼 넓게 나타낸다. 또한 작가의 가슴에 품은 슬픔의 깊이만큼 세상의 슬픔을 봐라본다.

숭고함이란 정신이 품고 있는 넓이와 슬픔의 깊이를 아주 크고 깊게 나타낼 때 보는 이로 하여금 느끼게 하는 감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숭고한 감정은 아름다운 감정과 달리 지성에도 호소한다. 이런 지적 감정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 형태의 감동이다. 무엇보다 숭고한 감정은 불순한 감정을 정화(카타르시스)하는 역할을 한다. 숭고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고귀한 행위는 도덕적 탁월함을 뜻했다.

도덕적 탁월함은 고귀한 성품에서 비롯했다. 고귀한 성품은 정신의 크기와 깊이가 크고 깊다.  정신의 크기와 깊이는 고통을 겪은 사람만이 드러낸다.

어떤 삶이던 오직 행복과 즐거움으로만 이룰 수 있겠는가. 인간의 삶이란 고통의 불꽃을 피할 수 없기 마련이다. 고통 없는 행복 추구는 으레 허영에 빠지거나 마약 같은 것에 탐닉하거나 경박하기 쉽다.

인간 존재의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히며 고통을 회피하지 않을 때만이 삶의 참된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그 고통을 통해 정신은 크기와 깊이를 갖는다. 이런 사람은 노예의 삶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정신을 유지한다. 이 자유로운 정신은 패배하더라도 그 정신의 크기와 깊이를 유지하기 때문에 영웅적인 존엄을 결코 훼손하지 않는다.

구차한 승리보다는 패배를, 구차한 삶보다는 죽음을, 구차한 안락보다는 고통을 선택하는 사람은 비극적인 종말을 맞는다. 그럼에도 그런 자유로운 정신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정신을 높인다. 심한 고통 속에서 자유를 잃지 않은 정신에서 우리는 숭고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전태일 기념관 이수호 이사장 방에 걸려 있는 전태일 열사가 죽음을 결단할 때 쓴 글.(사진제공=송필경)
전태일 기념관 이수호 이사장 방에 걸려 있는 전태일 열사가 죽음을 결단할 때 쓴 글.(사진제공=송필경)

23세 청년이 먼저 유서를 썼다.

<유서(遺書)>
사랑하는 친구여, 받아 읽어주게.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 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 버린다고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이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대들이 아는, 그대 영역의 일부인 나
그대들의 앉은 좌석에 보이지 않게 참석해서 미안하네. 용서하게
테이블 중간에 나의 좌석을 마련하여 주게 원섭이와 재철이 중간이면 더욱 좋겠네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체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어쩌면 반지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않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에 다 못 굴린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당시 청계천 평화시장에서는 14-5세 어린 소녀 시다들이 하루 16시간 일하여 받는 일당이 업주의 커피 한 잔 값에 불과한 50원이었다. 시다를 거느리는 재단사 전태일은 어린 여공의 처지를 개선해 달라고 각계에 호소했다. 무지렁이가 아무리 호소를 해도 메아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자신의 죽음만이 안일한 정부와 언론, 그리고 공무원과 업주를 자극해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죽음을 결단한 유서를 썼다.

전태일은 죽음을 앞두고 삼각산 임마누엘수도원의 예배당 건축공사에 약 5개월을 노동 봉사하며 죽음에 대한 최후의 결단을 놓고 몸부림치며 기도했다. 낮에는 돌을 깨거나 깎으며 노동하고 밤이 돌아오면 찬이슬을 맞으며 죽음의 문제를 놓고 기도했다. 마침내 23세 청년은 이 유서를 쓴지 석 달이 지나 완전한 죽음을 결단했다.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 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나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1970년 8월 9일

결코 알 수 없는 것에, 어디로 가는지 모를 때 인간은 두려움을 느낀다. 도저히 알 수 없는 그곳은 바로 죽음이 아니겠는가. 인간에게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 무얼까.

개인적인 커다란 좌절이나 극심한 고통이 아닌 이타적인 목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는 것만큼 숭고한 일이 있을까? 왜냐하면 자신의 목숨보다 더 크고 귀한 것이 세상에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1909년, 30세 안중근은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결심한 뒤 일제 침략의 핵심인물인 이토오 히로부미를 사살했고, 이듬해 사형 당했다. 엄혹한 옥중에서 평화를 그토록 갈구한 동양평화론을 썼다. 

세상에는 숱한 글이 있다. 이타적인 큰 뜻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고 쓴 글보다 더 숭고한 글이 있을까? 죽음을 초월한다는 것은 육신을 가지고 영원히 사는 것이 오직 자신의 정신을 통해 죽음의 공포를 뛰어 넘는다는 의미다. 이렇게 쓴 글보다 더 숭고한 글이 있을까?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이 숭고했고, 전태일 열사의 유서와 여러 수기가 숭고한 글이다.

아는 게 많고 똑똑하고 재치가 있어 읽기 좋은 달콤한 글과 잘 다듬은 글을 능숙하게 쓰는 사람은 많다. 일제 강점 시대에 이광수나 서정주 같은 인물 말이다. 그러나 정신의 압도적인 크기를 보여준 숭고한 글은 아주 드물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17번이나 투옥당하면서 끝내 감옥에서 목숨을 잃은 이육사는 웅혼한 기개를 품은 시 광야를 남겼다. 일제 강점기에 쓴 드물게 숭고한 글이었다.

감각적이고 사소한 감정에 사로잡힌 숱한 친일 작가가 놀랄만한 가치를 지닌 글을 쓴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식민지에 굴복한 삶에서 나온 글은 언제나 궁핍했고 천박했다.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글 창고’는 거의 텅 비어있었을 뿐이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여 그 비참함을 알리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며 쓴 글에는 숭고함이 묻어 있다. 귀한 목숨을 버리는 압도적으로 큰 정신이 바로 숭고함이다.

숭고한 글이란 아름다운 기교로 묘사하거나 어떤 논쟁에서도 이길 수 있는 기술로 무장하여 쓴 글이 아니다. 글을 통해 설득하기보다, 영혼을 일깨우는 감동이 있는 글이다.

"숭고한 글은 정신을 뒤흔드는 힘을 통해 설득하는 글이나 듣기 좋은 글을 언제나 능가한다."

고대 그리스 소피스트의 현란한 수사학이 소크라테스의 격렬한 반발에 부딪혔던 것은 따지고 보면 소피스트들이 정신의 가치를 외면한 몰가치성에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서 지금까지 순수 예술을 지향하는 자들 역시 비난받아야 할 점은 시대와 사회의 아픔을 외면하는 그들의 몰가치성이 아닐까?

숭고한 글의 생명은 눈에 보이는 기교적 구성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정신이다. 글은 글쓴이의 삶과 다르지 않을 때 생명을 지닌다.

기교를 정확하게 구사하여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더라도 그런 글은 올바른 정신을 본질적으로 나타낼 수 없다. 기교는 육체를 치장할 수 있어도, 영혼을 드러내지 못한다. 정신의 크기가 빠진 감성은 자칫 놀이로 흐르거나 아름다운 과장에 불과할 뿐이다. 아름다운 글을 쓰는 사람이 많아도 커다란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글을 쓰는 사람이 극히 적은 이유다. 죽음을 초월하여 쓴 글보다 더 큰 감동은 있을 수 없다.

숭고의 체험은 매혹이 아니라 '감동'이다. 놀이가 아니라 진지함이다. 이런 감정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존경심이다.

나훈아의 노래를 매혹적으로 또는 놀이로써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겠지만, 커다란 감동이나 진지함이나 존경심에 이르지는 못한다.

실러의 시 환희의 송가로 합창곡으로 만들어 교향곡에 삽입한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은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보다 존경심을 이끌어낸다. 무엇보다 베토벤이란 천재 음악가가 약 30년간 구상하여 만든 작품이다. 음악가로서는 치명적인 귀앓이 고통 속에서 시류에 타협하지 않고 음악가의 자존심을 고귀하게 지킨 만큼 음악 정신의 크기와 깊이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또한 교향악단과 합창단의 웅장한 규모 앞에서 청중이 먼저 느끼는 감정은 즐거움이라기보다는 숨 막힐 듯한 위압감이나 전율스런 경외심이다. 이런 숭고한 음악은 본능적으로 긴장으로 전율이 일어나고 난 뒤 전율이 가라앉아야 안도의 감정이 생기면서 감동이 밀려온다.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라면 합창교향곡에서 신적인 거룩함을 느꼈으리라.

인류에게 노동은 가장 신성한 것이다. 하지만 전태일을 ‘투쟁·단결’이라는 노동 운동의 상징으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인간에 대한 연민을 완전하게 실천한 숭고한 ‘휴머니스트’다. 우리는 전태일 정신을 인류 보편적 가치인 ‘사랑의 실천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사진제공=송필경)
인류에게 노동은 가장 신성한 것이다. 하지만 전태일을 ‘투쟁·단결’이라는 노동 운동의 상징으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인간에 대한 연민을 완전하게 실천한 숭고한 ‘휴머니스트’다. 우리는 전태일 정신을 인류 보편적 가치인 ‘사랑의 실천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사진제공=송필경)

평생 그늘진 인생의 공기만을 호흡한 무지렁이 노동자가 굶주린 어린 여공을 위해 숭고한 죽음을 감행한 결과 천박한 남한 자본주의 사회에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렸다. 23세 청년의 죽음이 사회의 중대사가 된 적이 우리 역사에 일찍이 없었다.

전태일의 분신이 전율스러운 공포를 불러일으켰지만 유언과 글들이 알려지면서 우리 사회의 모든 양심적인 지성인을 감동시켰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전태일에게 진실한 신앙인들은 어쩌면 순교자적인 ‘거룩함’을 엿보지 않았을까. 민주화 운동의 거목이신 함석헌 선생과 김재준 목사가 청년 전태일의 죽음을 그렇게 보셨다.

어떤 인간이든 마음속에 분명 나약하고 이기적인 면이 있고,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있는 이타적인 선한 마음씨도 있다. 이기적인 욕심과 이타적인 연민은 인간에게 동전의 양면이다.

칸트는 자비로운 동정심은 도덕적 행위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여유로울 때 마음이 이끌려 동정심을 발휘하다가 처지가 어려워지면 동정심을 거두기 때문이다. 어려운 처지에서 하기 싫어도 그것이 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일을 할 때 그 행위는 참으로 도덕적일 수 있다. 선이란 '어떠한 경향성(마음의 이끌림)이 없이 오직 의무로부터' 어떤 일을 행할 때 발생한다고 칸트는 말했다.

전태일이 어린 여공들에게 차비를 털어 풀빵을 사준 동정심은 아름다운 일이었다. 어린 여공들의 환경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려 사회에 경종을 울린 행위는 칸트도 감탄할만한 도덕적인 숭고함 바로 그 자체였다.

전태일의 도덕적 감성은 교육과 훈련이 아닌 천부적 자질이었다. 전태일은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남루한 환경에서 빛을 낸 전태일의 자질은 남한 현대사에서 도덕적으로 가장 숭고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름다움이라 할 만한 대상은 모두 화려하고 그 화려한 꾸밈을 어마한 돈으로 치장한 요즈음 시대에 아름다운 대상은 많다. 한류라는 이름의 아름다움을 창조한 연예인들이 지구촌을 매료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자랑스럽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전태일의 도덕적 숭고함을 평가하는 데에는 인색하다. 전태일이란 이름의 범위를 ‘단결·투쟁’이라는 노동자의 권익 쟁취로만 좁게 한정하는 것 같다.

철학자 사르트르는 체 게바라를 ‘우리시대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 극찬했다. 체 게바라는 영원한 혁명을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다.

죽음으로써 입증한 전태일의 연민은 가장 숭고한 휴머니스트의 모범으로 인류사에 자리매김 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태일의 삶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전태일의 죽음은 참으로 숭고했다. 앞으로 남은 내 생애에서 내 의무는 전태일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증명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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