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여행기를 책으로 엮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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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여행기를 책으로 엮으며…
  • 조남억
  • 승인 2020.02.21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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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억의 남미여행 일기 번외편] 인천건치 조남억 회원

한사람의 남편이자 네 자녀의 아버지, 그리고 개원의인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인천지부 조남억 원장(연세조아치과) 이, 사회적 제약(?!)을 잠시 내려놓고 비록 패키지이긴 하지만  지난 2017년 11월 9일부터 12월 19일까지 페루, 볼리비아, 잉카문명 지역, 우유니 소금사막, 안데스, 아마존, 아르헨티나, 브라질까지 로망 가득한 남미지역을 여행했다.

조남억 원장은 지난 2018년 1월 12일부터 11월 9일까지 총 41회에 걸쳐  『조남억의 남미여행 일기』라는 코너로 본지에 연재했다.

드디어 지난 15일, 『치과의사 조남억의 남미연가(이지출판)』란 이름으로 한 권의 책으로 엮여 나왔다.

이에 본지는 조 원장이 책 출간과 함께 보내온 번외편을 소개한다.

- 편집자 주

 

2017년 11월 9일부터 12월 19일까지 41일간 남미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2018년 1월부터 한 주에 하루의 일기를 건치신문에 연재를 하였습니다. 매주 정해진 시간에 맞춰서 글을 쓰고 고정 칼럼에 글을 올린다는 것은 인생에서 처음 겪는 일이었습니다. 일주일에 3일씩 글을 쓰고 사진을 정리해서 원고를 송고하고 나면, 그것이 마치 또 한 번의 여행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습니다. 힘들었지만, 재미있고, 보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43주가 지나 마지막 글까지 올리고 나서, 신문 연재는 끝이 났습니다. 막 올라간 새 글과 사진은 그렇게도 생기가 넘쳐 보이더니, 올린 지 몇 주 지난 글들은 벌써부터 생기를 잃고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고, 아깝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2019년 1년 동안 책으로 엮어서 출판을 하고 싶어 했는데, 이것 역시 내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게다가 치과 일을 하면서 시간을 더 많이 낼 수 없다보니, 책으로 엮는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흐지부지 시간만 흐르다가 연말이 되어서 이지출판사 서용순 대표님을 만나 출판을 진행 할 수 있었습니다.

책을 내는 일은 어릴 적부터 속으로만 간직하던 작은 꿈이었습니다. 나의 보잘것없는 이야기를 세상에 발표한다는 것이 부끄럽고, 창피하기도 하고, 지구 환경에도 안 좋은 일인 것 같았지만, 일 년 동안 애쓴 글들이 그냥 사라지는 것은 더 피하고 싶었습니다. 지구에 있는 나무 몇 그루를 없애는 일이어서 죄송하였지만, 이 책을 읽고 몇 명의 독자들이 작은 재미와 정보를 얻기만 한다면, 더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는 작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사실은 책을 내서 기념품으로 가지고 싶다는 순전한 내 욕심이 제일 컸습니다. 일기를 다시 읽으면서, 책으로 내려면 글을 다시 써야 하나 싶었습니다. 수정하면 글은 좋아지는 것 같은데, 현장의 생생함은 사라지는 것 같아서, 수정하지 않고 그냥 올리기로 하였습니다.

『치과의사 조남억의 남미연가』 표지
『치과의사 조남억의 남미연가』 표지

여행은 종종 인생에 비교되곤 합니다. 나도 인생의 축소판으로서 여행을 인정하고, 좋은 여행을 다녀오는 것으로, 인생의 새로운 경험과 교훈을 얻으려 하고 있습니다. 95년도 인도여행 중에 만났던 무이스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여행 중에 겪는 경험은 죽는 경험만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 갈수 있다면, 그것이 최고로 좋은 여행이다.” 그땐 이해하는 척만 했는데, 살다보니, 여행을 다니다보니, 그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내 여행 중에 제일 크게 떠오르는 일화가 있습니다. 1994년 본과 2학년 여름방학에 생전 처음으로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갔습니다. 처음에는 친구 2명과 함께 갔었는데, 20일 정도 함께 여행을 하고 나서 각자 원하는 곳으로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아테네에 가보고 싶어서, 로마에서 기차 타고, 부두에서 하루 기다려서 배표를 사고, 하루 동안 배로 그리스로 가서 다시 기차를 타고 드디어 아테네에 새벽 3시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가는 기차에서 한국인들 10명이 모이게 되어서, 모두 돈도 아낄 겸 역에서 노숙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아침이 되어 눈을 떴더니, 내 배낭이 사라져 있었습니다. 평소에 노숙을 할 때는 배낭을 베고 잤었는데, 그날은 한국 사람들이 단체로 모여 있다 보니, 안심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다행이 복대에 현금과 수표, 여권은 남았고, 여행책과 일기장도 남았고, 침낭도 남아있었습니다. 그 후로 나는 배낭족이 아니라 침낭 하나 들고 다니는 침낭족이 되었습니다. 옷과 가방과 먹을 것들이 없어지고 나니, 이스탄불로 가는 버스비 60$도 커보였습니다. 그렇다고 4일에 걸쳐서 왔던 길과 같은 길로 로마로 되돌아가긴 싫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비용을 줄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나를 둘러싸고 있을 때, 내 앞에 어떤 환전상이 나타났습니다. 1달러에 25드라크마 하던 때였는데, 35드라크마를 준다고 하였습니다. 따져보니 이렇게 환전만 한다면 40$에 이스탄불로 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 사람을 따라갔습니다.

내 머릿속에 돈에 대한 걱정과 욕심이 가득하니, 그 남자를 따라서 어디로 어떻게 갔는지 기억도 나질 않았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작은 골목으로 들어갔고, 마침내 어느 건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건물 안으로 더 들어가려는 것을 막고, 문을 등에 댄 채 여기서 환전을 하고 싶다고 하였더니, 그 사람이 50$ 어치라고 하면서 드라크마 돈뭉치를 나에게 주는데, 정확히 세지도 않고 대충 세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내가 돈을 꺼내서 주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복대에서 돈을 꺼내기 위해 윗옷의 지퍼를 내리는 도중에, 불현듯 ‘과연 내가 이 돈을 가지고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가 되어서야 그 사람이 내 눈에 들어왔고 185cm에 100kg정도 되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그 남자와 비슷한 크기의 다른 남자가 문 앞에 떡하니 서있었습니다. 아! 하늘이 노래졌습니다. 눈앞이 정말로 캄캄했습니다. 내가 내리던 윗옷 지퍼를 다시 올리면서, 나는 여행자 수표밖에 없다고 말을 하고, 수표를 꺼냈더니, “Where is a cash?” 하면서 그 남자의 커다란 두 손이 내 옷을 들추고 내 복대를 찾으려 바지 속에도 손을 넣어서 휘져었습니다. 어찌 막을 수도 없이, 흔들리고 있는 그때, 건물 안으로 한 중년의 남성이 들어왔습니다. 그 중년 남성이 이 젊은 두 남자들에게 뭐라고 뭐라고 하는데, 이 둘이 차렷 자세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년 남성의 손짓이 건물 안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오라는 듯한 모습을 취하는데, 여기서 더 끌려 들어가면 완전히 끝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왼손으로 다시 침낭을 집어 들고, 오른손에 있던 드라크마 돈 뭉치를 문을 막고 있던 덩치에게 던지듯 주었더니, 두 손으로 그 돈뭉치를 받았습니다. 문과 덩치 사이에 작은 틈이 생겼습니다. 그 틈으로 밀치고 나와서, 큰 길까지 죽어라 뛰었습니다.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그때 생각을 하면 몸이 떨립니다.) 큰 길까지 와서 의자에 앉아 숨을 헐떡이면서, 정말 이곳과 이 시간, 이 사람들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저녁 아테네에서 크레타섬으로 들어가는 배에서 선실표를 사지 못하고 갑판에서 자는 표를 끊고 12시간을 갑판에 누워서 별을 보면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닦고 또 닦으면서, 엄마를 그리워하고, 얼른 집에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앞으로는 절대로 돈에 욕심을 부리지 말자고 다짐을 했습니다. 돈에 눈이 멀었다가 인생이 망치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습니다.

여행의 반전은 그다음이었습니다. 그렇게 밉고 무섭고 싫은 그리스였는데, 크레타 섬에서 만난 사람들은 너무 친절해서, 처음 본 젊은 여행객에게 밥도 사줄 정도였습니다. 사람 사는 맛은 도시보다는 시골이었습니다. 다시 되돌아온 아테네에서는 이스탄불로 가는 60$짜리 버스는 보지도 않고, 유레일 패스로 공짜로 갈 수 있는 데까지 그냥 가보자는 생각으로, 무작정 북으로 올라갔습니다. 말도 안 통하는 사람들에게 이스탄불만 외치면서 몇 번의 기차를 갈아타고, 나중에는 두 칸짜리 작은 기차로 갈아타고, 차장 할아버지가 내리라는 곳에서 내려서 그리스와 터키의 국경을 군인들을 사이에 두고 걸어서 국경을 넘을 때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경험이었습니다. 국경 너머의 터키 사람들도 히치하이킹 해주면서 버스 터미널까지 나를 데려다 주더니, 본인이 차표를 사서 나에게 주었으니, 결국 이스탄불까지는 5$도 안 되는 비용으로 값진 경험들을 하면서 갈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여행과 인생을 생각하면, 이 장면이 제일 크게 떠오르면서, 지금까지도 노력 이상의 금전적인 이익을 얻으려는 마음을 다잡게 해주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일들을 여행에서 겪으면서 나를 알아가고 인생을 미리 살아보는 것 같습니다. 인생과 여행은 결과를 알 수 없어서 참으로 오묘한 것 같습니다.

이때의 기억으로 95년 인도 여행에서도 무조건 일반 서민들이 이용하는 기차와 버스만 이용하여 돌아다녔었고, 98년도 호주 여행에서도 그렇게 하려 노력했었습니다. 그러나 호주는 유럽과 인도와 완전히 달랐습니다. 에어즈락을 보고 싶어서 그 근처의 도시로 가는 시외버스를 탔는데, 53시간을 가는 버스였습니다. 그 도시에서 에러즈락에 가는 시내버스를 찾았는데, 없었고, 그곳에 가보기 위해서는 시내에 있는 여행사 여행상품에 돈을 내고 참여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외진 곳이기에, 대중교통만으로는 갈 수 없구나 하고 깨달았고, 여행사를 이용하는 것이 여행의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내가 53시간동안 2박 3일동안 버스 안에서 괴롭게 지내면서 차장 밖 구경은 하나도 못하고 있었을 때, 여행사 투어에 신청을 하면, 같은 코스를 오면서도 중간중간 좋은 곳 구경도 시켜주고, 잠도 숙소에 들려서 편히 자고 하여서, 여행사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게, 훨씬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후로는 킬리만자로, 안나푸르나, 카일라스를 선택하게 되었는데, 치과 개원 중에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여행사를 선택하지만, 그래도 관광이 아닌 여행을 할 수 있는 곳들을 골랐던 것 같습니다. 젊어서 힘든 곳을 여행가고, 뉴욕이나, 유럽, 일본은, 휠체어를 타고서도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뒤로 미뤘습니다. 이번 남미 여행도 여행사의 여행 일정을 따라다니는 관광과 비슷한 일정이었지만, 트레킹 위주로 짜여있어서 현지에서 직접 걷고 보고 겪는 것은 여느 여행과 비슷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남미 여행 내내 독방에서 혼자 자면서 일기를 몇 시간씩 쓰면서, 생각하고 글 쓰고 하다 보니, 지난 시간들이 많이 정리도 되었고, 새롭게 더 하고 싶은 일들도 많이 떠올랐습니다. 남미여행에서 되돌아온 후, 여행 중 계획했던 일들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의무적으로 해야만 하는 일들을 위주로 하면서 살았던 것 같은데, 앞으로는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더 많이 하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버킷 리스트들을 하나씩 지워나가면서, 매일 매일 새로워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관광은 되돌아오면서 과거의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고, 여행은 되돌아오면서, 과거와 다른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남미 여행 전과 후의 나의 삶에 많은 변화가 생겼으니, 남미 여행은 나에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여행지였습니다. 치과 일이라는 것이 매일매일 거의 비슷한 일을 하는 것인데, 남미 여행 41일간 매일매일 하루도 같은 날이 없는 새로움을 경험한 것 자체로 남미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대학교 때 들었던 동양철학 수업에서 들었던 말을 평생의 화두로 삼고 살고 있습니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입니다. 인간은 100세가 되어도, 99세 때를 생각하면서 ‘내가 작년에 그렇게 모자란 생각을 했었네, 앞으로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살아야 인간다운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인간답게 발전하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때가 좋았지. 이 정도면 됐어.’ 하는 마음이 들면, 이미 하락하는 삶이고, 인간답지 못한, 기계같은 삶이라고 했습니다. 기계는 태어나자마자 제일 좋고,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나빠지는 것인데, 인간은 정 반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마음가짐이 일신우일신인 것 같습니다. 매일 매일이 비슷한 삶이라 생각하기 쉬운 치과일이기에, 일신우일신 하려 노력하는게 더 중요하고, 그런 여행을 하는 것은 역시 중요한 것 같습니다.

좋은 여행을 하기 위해서 돈과 시간이 풍족하지 않은 보통사람들은 목돈을 만드는 것만큼 목시간을 만드는 것도 중요합니다. 여행기를 마치는 글에도 목시간 이야기를 썼지만, 근로시간이 단축되고 연차가 확대되었기에, 시간을 절약하고 모아서 목시간으로 만들어서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1주일에 6일을 일할 때는 저축할 시간이 없었지만, 5일 근무를 하게 되니, 시간을 저축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미 여행 이야기를 듣는 치과 원장님들은 “치과를 문 닫고 어떻게 여행을 가? 월급 받는 입장이면 모를까 난 못가.” 이런 반응이었고, 보통 일반분들을 만나면, “자기 일을 하는 치과 원장이니까 그런 여행을 갈 수 있지, 우리 같은 월급쟁이들은 못가.” 하는 반응이었습니다. 사장이나 직원이나, 모두 못 간다고 하고 있었습니다. 못 가는 이유를 찾기 이전에 갈 수 있는 방법을 좀 더 알아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여행기 첫 머리글에서 좋은 아내를 만나서 여행을 갈 수 있었다는 글을 썼습니다. 이제 책으로 엮으면서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감사함을 표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윤지, 은서, 한이, 단 네 명의 딸들을 키우면서, 치과의 대표원장으로 치과 진료를 하루종일 하면서도, 20명의 직원관리까지 잘 해주는 아내가 없었다면, 저의 삶과 여행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어릴 적에 내가 하고 싶다고 하는 일에 막아섬이 없이 무한의 믿음과 격려를 주셨던 부모님이 계셨다면, 청년, 중년의 나에게는 그런 아내가 있었습니다. 항상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꿈은 꿈꾸는 사람에게 이루어진다고 했던가요? 앞으로 3년 후, 유라시아대륙 횡단이나, 아프리카 대륙 종단, 아니면 히말라야의 칼라파타르와 고교를 돌아오는 여행이라도 다시 한 번 나갈 수 있도록 목시간을 모아봐야겠습니다.

2020년 1월 치과원장실에서 다시 꿈을 꿉니다.

'모라이'이란 계단식 잉카 농업연구소 앞에서 (제공=조남억)
'모라이'이란 계단식 잉카 농업연구소 앞에서 (제공=조남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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