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쿠바 여행기 『왜 체 게바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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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쿠바 여행기 『왜 체 게바라인가?』
  • 송필경
  • 승인 2019.06.03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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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전통 건물이 온전한 도시 카마구에이(Camaguey)와 트리니다드(Trinidad)

휴게소를 떠나 쿠바에서 3번째로 큰 도시인 카마구에이(Camaguey)로 가니 오후가 되었다. 도시 입구에 들어서자 좁은 거리에 골목은 구불구불했다. 많은 건물들이 낡아 칠이 벗겨 있다. 도시 중심부에 들어서자 다소 깨끗한 건물들이 있다.

(제공 = 송필경)

그란 호텔(Gran Hotel)의 깔끔한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했다. 사방이 확 트인 식당 5층 높이에서 도시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도시 건물들은 나지막했다.

(제공 = 송필경)

카마구에이는 스페인이 초기 쿠바에 세운 7개 마을 중의 하나로 내륙 중심지에서 목축업과 설탕 생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식민시대에 교역 루트에 멀리 떨어져 있어 스페인 건축기술자들이 설계한 중세 유럽풍 도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덜 번잡하고 조용한 골목과 한적한 광장이 자리하고 있어 도시 안에 ‘카마구에이 역사지구’는 국립기념물이다.

카마구에이 도시 구조가 불규칙한 이유는 해적과 싸우는 과정에서 남은 흔적이라 한다. 구불구불한 골목과 좁고 복잡한 거리는 약탈자 해적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서 도시 구조를 특이하게 만들었다.

한때 극심한 물 부족으로 빗물을 받아 저장하는 큰 항아리나 질그릇을 개발해서 물을 보관했다. 그래서 ‘흙으로 만든 물병의 도시’라는 별명을 얻었다.

호텔 식당 조망에서 성당이 많이 보였는데 여기가 쿠바 가톨릭의 본산이라고 한다. 성당 건축은 바로크 양식이라고 한다.

영화 간판이 많은 거리가 있는데 로스 시네스 거리(La Calle de los Cines; 영화의 거리)다. 2014년 카마구에이 건립 500주년을 기념해 진행한 도시 개조 계획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결과물이라 자랑한다.

(제공 = 송필경)

‘카마구에이 역사지구’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뛰어난 도시 건축 양식 유산을 간직한 독특한 도시라 하는 데, 서양 건축 양식에 대해 지식이 백지 상태이고 기껏 두서너 시간 어슬렁거린 것까지고 이 도시를 평하기에는 내 능력으로 불가능하다. 아바나나 산티아고 데 쿠바의 분위기 보다는 요란하지 않고 차분하다고 느꼈다.

건축 전문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인류의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빛나는 장르라 할 건축은 예술이라기보다 차라리 그 자체가 하나의 문화다. 그만큼 우리 삶이 복합적으로 드러난 것이 건축문화다. 건축이 단지 보기 좋고 쓸모 있는 건물을 짓는 일만이 아니다.

건축가 김석철 선생은 “건축과 도시는 인간의 역사를 증언하는 상형문자다”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우리 서울을 돌아보자. 천만 도시의 절반인 강북에는 조선 시대 역사 공간과 일부 한옥 마을 이외에 별다른 건축물 특징이 없고, 1970년대부터 개발한 또 하나의 절반인 강남의 건축은 필요와 효용만 강조하고 게다가 투기가 붐이 어지러워 이기적인 공간으로 변했다.

3년 전, 이탈리아 여행 때 중부 지방에 있는 언덕 위 성곽도시 오르비에토(Orvieto)를 거닐었다. 대성당은 700여 년이나 되었고 일반 주거 건물도 몇 백 년 되었다고 한다. 주민들이 이런 건물에서 살면서 유적 보전을 위해 건물 수리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가이드 말을 듣고는 일행의 한 아주머니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런 데 살면 아주 불편할건데, 이 사람들 어찌 사는고.”

(제공 = 송필경)

이 아주머니 말 속에 편리만 강조하는 아파트 거주에 푹 젖은 우리나라 사람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고, 전통 가치에 대한 인식 부족이 느껴져 안타깝게 생각했다. 이 말을 나중에 곰곰이 곱씹어 보니 인정할 점이 있었다.

우리는 외국의 전통을 대체로 과대포장하고, 우리 현실을 마냥 비하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시대 우리 사회를 돌이켜보면 1960년대 후반부터 주거 모습이 급격하게 변한 것 같다. 새마을 운동의 영향으로 시골의 초가집이나 양철 지붕 집이 사라지면서 시골 어디가나 획일적으로 시멘트 블록으로 벽을 쌓고 슬레이트를 지붕으로 얹은 집들이 우후죽순 등장했다. 낡은 목조 건물을 시멘트 콘크리트 건물로 대체하면서 도시는 기와와 나무판자에 기름을 덧칠한 나무  건물의 검은 빛에서 시멘트 빛으로 바뀌었다.

1970년대부터 본격 들어선 아파트 문화는 가히 주거 혁명이었다. 한옥에서 연탄아궁이에 밥 짓고 난방 하던 것이 석유곤로와 연탄보일러로 대체 했다.

보일러 시설로 바뀌자 가장 신기했던 것이 세면대 물 꼭지를 틀면 뜨거운 물이 술술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보일러가 등장하기 이전 겨울 아침에 큰 물통을 연탄아궁이에 밤새 데우면 식구 각자 바가지로 퍼 토끼 세수하듯 했다. 겨울에는 집에서 샤워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연탄아궁이로 난방 했기 때문에 겨울이면 전국적으로 하루에 수 십 명이 연탄가스에 질식하는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70년대 중반 내가 하숙하던 시절, 연탄가스 중독 염려로 추운 겨울에도 방문을 조금 열고 자라고 부모님이 신신당부하셨다. 자나 깨나 연탄가스 조심이었다.

그때 우리 사회는 우리 것이라면 모두 비하할 때였다. 양주가 최상이었고 소주는 싸구려 화학주라서 몸에 나쁘다는 믿음이 확고했다. 사실 그 시절 소주를 먹고 나면 다음 날 무언가 묵지한 느낌이 있었다.

하루는 아주 잘 사는 후배 집에 갔다. 그 집은 아마 우리나라 최초의 호화 아파트인 압구정 현대아파트였다. 80평이 넘는, 한옥 하숙집에서 퀴퀴하게 보내던 시절, 이 휘황찬란한 아파트는 별천지 같았다. 후배는 우리에게 말로만 듣던 양주를 꺼내왔다. 이런 사치품이 웬 떡이냐 싶어 벌컥 마셨다. 그런데 다음 날 머리가 심하게 아팠다. 숙취에는 양주도 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에 동아리 친구들과 도봉산에서 야영하거나, 방학 때 바닷가에서 소주를 많이 마셨지만 숙취가 거의 없었다. 사실 그 때 양주는 매우 비쌌지만 요즈음 한국 사회에서 거저 줘도 잘 먹지 않는 6년 산 위스키였다. 본토 영국에서는 가장 싸구려 술이었다. 요즘 17년산, 21년산에 비할 바 없이 질 낮은 술이었다.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지만 당시에는 박정희가 요정에서 밤 연회할 때 주안상에 올랐던 술이었다.

70년대에는 12시 통행금지 시간이 있었다. 12시 넘어 거리에 돌아다니면 순찰 경찰에 잡혀 파출소에 유치 당하고 그 다음날  즉석 재판을 받았다. 유치장에서 구류 2일이나 벌금이 받아야 했다.

어느 날 친구들이 모여 술을 먹다가 통행금지 시간에 걸려 술집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12시 넘어 까지 있다가 술집 안방에서 잤다. 아침 일찍 일어났지만 머리가 아주 묵직했다.

그 당시 시장판 술집은 양철판을 둥글게 얹은 드럼통 중간에 연탄을 피웠다. 요즈음은 숯불 아니면 가스 불이지만. 밤새 꺼지지 않은 그 연탄불에 안방에서 자던 우리 일행은 연탄가스에 살짝 중독 당했다.

그때서야 수입 양주를 과대포장하고 우리 소주를 비하하는 관념이 허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일반 서민들은 소주를 연탄가스와 호흡하며 술과 함께 했다. 요즘도 그렇지만 양주는 연탄가스 없는 우아한 환경에서 마셨다. 소주가 나빠서가 아니라 연탄불이란 환경 아래에서 마시는 소주가 나빴다. 산이나 바다에서 가지고 가서 먹었던 소주는 과일주를 담는 독한 30도 소주였다. 그 독한 술을 벌컥 마셔도 숙취가 심하지 않았던 것은 연탄가스가 없는 맑은 공기 덕이었다.

70년대 후반부터 연탄아궁이는 서민들에게도 점차 사라지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서민 아파트도 연탄보일러로 바뀌었고 연탄가스 중독 사건이 급감했다. 80년대 후반부터 아파트에서 연탄보일러마저 사라지고 기름보일러로 바뀌었다. 지금은 더 편리한 가스보일러가 아닌가.

우리는 60년대 경제 성장과 더불어 전통적 주거 환경을 싹 밀어버리고 획일적인 아파트와 빌딩이 들어섰다고 비판을 한다. 내가 보기에는 비판의 근거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현재의 우리 주거 문화가 아파트 문화로 흘러올 수밖에 없지 않았나는 생각이 든다. 경제 개발 세대가 전통을 내던지고 현실을 택한 것을 마냥 나무 날 수는 없다.

쿠바가 식민지 시대 유럽풍의 생활 주거 건물이 비교적 온존할 수 있었던 것은 짧은 내 생각으로는 기후 탓으로 본다. 사람의 집은 무엇보다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인위적인 결과물이다. 혹독한 추위가 없는 쿠바는 수 백 년 옛 집이라도 우리 전통한옥만큼 현대 생활에 불편은 없으리라. 과거 우리 한옥의 치명적인 약점은 추위에 약했다.

이탈리아 여행 때 일행 아주머니 말에서 좁은 땅에서 급격한 경제 팽창을 하면서 부대끼다 보니 아파트 주거 문화로 가버린 우리사회를 비판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아파트 주거 문화로 간 또 다른 주요한 원인으로 아파트에서 여성의 가사 일이 크게 줄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옥의 부엌 위치는 아궁이 때문에 마당 보다 낮은 곳에 있었다. 부엌 천정 높이도 낮았다. 아궁이를 중심으로 식사를 준비했어야 했으므로 허리를 잔뜩 굽혀 일했고, 밥상을 낮은 부엌에서 높은 안방으로 오르락내리락 날라야 했다. 아파트에서는 부엌이 곧 밥 먹는 장소가 아니가. 1980년대 이전 주거 환경에서 서민 여성의 일상적인 가사 노동 강도를 지금 주거 환경에서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구글 이미지에서 (제공 = 송필경)

60년대 이전에는 겨울에 세탁을 하려면 더운 물이 턱 없이 부족했다. 수도가 발달하기 전에는 우물이나 지하수를 펌프로 끌어올려 물을 사용했다. 서민 가정에는 세탁을 마음대로 할 우물이나 펌프가 있는 집이 귀했다. 겨울에는 세탁물을 냇가에 지고 갔다. 얼음을 깨고 밑에 흐르던 영하의 찬물에 비누도 귀한 시절이라 양잿물로 세탁했다. 고무장갑은 상상할 수 없었던 물건이고 동상에 걸릴 듯 한 찬물에 손을 담갔다. 세탁물을 냇가 돌에 얹어 방망이로 쳐 찌든 때를 벗겨내고 나서 얼음 밑으로 흐르는 찬물에 헹궜다.

나는 엄마와 누나 세대에서 그렇게 빨래하던 모습이 어렴풋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구글 이미지에서 (제공 = 송필경)

쿠바의 가정집에는 들어가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쿠바와 기후가 비슷한 베트남의 서민 가정집을 여러 번 가봤다. 벽돌로 벽을 쌓고 지붕을 얹고 나서 바닥을 시멘트로 마무리하면 집이 된다. 난방을 할 필요가 없어 서민 주거 건물은 단순하고, 더위는 그냥 선풍기로 웬만하면 견딘다. 추위가 심한 우리는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배산임수;背山臨水)’ 같은 풍수로 집을 지었다. 산이 가까이 있어야 땔감을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겨울에 방안까지 햇빛이 잘 드는 남향을 지향하지만, 더운 지방에는 집 방향은 거리를 향해 있다. 거리가 남북으로 있으면 거리를 중심으로 동향과 서향이 있고, 거리가 동서로 있으면 남향과 북향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추위가 없으니 따듯한 남향을 고집할 필요가 없어 그냥 편리한 대로 집 방향을 정하는 것 같았다.

쿠바의 서민 주택가를 돌아다녀 보면 거리에서도 큰 창들을 통해 집안 방을 쉽게 들여다 볼 수 있다. 언뜻 보기에는 집 구조가 매우 단순했다.

(제공 = 송필경)

지금 베트남에는 자본주의식 경제 성장으로 하노이나 호치민 같은 대도시에는 아파트가 죽죽 올라가고 있다. 아파트 가격도 서울 강남 못지않다. 부자들은 부의 상징으로 고층 호화 아파트를 우리 못지않게 좋아한다고 한다. 쿠바도 자본주의가 물밀 듯 들어오면 그렇게 되려나?

카마구에이 건축들은 식민지 시절 스페인 건축기술자들 영향으로 중세 유럽풍의 도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며 지금까지 이어왔다. 오래고 낡은 건축물에서 생활하는데 불편은 많겠지만 추위가 없기에 그럭저럭 견디고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언젠가 경제사 강의에서 1960년대가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변화가 가장 급격했다고 들었다. 이는 건물을 부수는 불도저가 주도하는 그런 토건 경제가 전 세계적으로 폭발한 시대였다는 말이다. 중동의 황량한 사막에서도 뉴욕의 마천루 같은 건축물이 들어섰고, 이는 당시 우리와 같은 저개발 국가가 선망했던 목표였다.
 
그런데 쿠바는 1960년대에 미국하고 극한 대결하면서 미국식 자본주의 경제가 침공할 기회가 비켜갔다. 이를 ‘새옹지마’라 하던가. 쿠바의 오랜 건물은 자본주의식 파괴에서 벗어나 고스란히 남아있는 덕분에 문화유산이 되어 지금은 관광 수입의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전주 한옥 마을이 관광지로 명성을 누리지만 그 영역이 전주 도시의 극히 일부다. 전주 도시 전체가 한옥 마을이 아닐뿐더러, 우리 주거 환경 처지에서는 전주 전체를 그렇게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카마구웨이 도시를 굳이 우리 식으로 보면 도시 자체가 ‘전주한옥 마을’인 셈이다.

유서 깊은 역사 지구인 카마구에이 세계문화유산 지역에 3시간 정도 설레설레 돌아다니고서  내가 이 도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은 내 능력에서는 가당찮다.

만약 불교문화를 잘 모르는 서구 사람들이 불국사, 해인사, 부석사 등을 언뜻 스쳐보면서 불교 건축과 사찰마다 지닌 고유한 특성을 이해하는 것 같은 난센스란 말이다.

당간 지주, 일주문, 탑과 석등, 대웅전, 삼성각, 명부전, 관음전, 범종루 등등 불교 건축 조성 양식, 가람 배치, 주변 자연 환경과 조화 여부를 외국인이 알려고 하면 얼마나 공부를 해야 할까?

불국사의 청운교, 백운교, 석가탑, 다보탑들의 종교적 건축학적 의미를, 해인사 장경각이 소장하고 있는 팔만대장경이란 세계문화유산의 값어치를, 저 멀리 소백산맥이 병풍처럼 버티고 있는 부석사의 가람 배치와 장쾌한 자연과 조화를…. 이런 의연한 전통과 아름다움의 형식을 웬만한 외국인이 소화해 낼 수 있을까?

솔직히 카마구에이 같은 도시가 왜 세계문화유산인지 나는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카마구에이에서도 체 게바라의 흔적은 여전했다. 파란색 테두리를 한 건물에 체 게바라의 형상이 눈에 띄었다. 일단 사진을 찍었다. 저녁에 노트북에 사진을 저장하면서 보니 이번 여행을 기획한 손호철 교수가 그 건물을 사진으로 찍는 모습이 마침 보였다. 손 교수는 이번 쿠바 여행기를 경향신문에 ‘손호철의 쿠바 여행’이란 기사로 연재했고, <카미오 데 쿠바(즐거운 혁명의 나라 쿠바로 가는 길>이란 책을 내셨다. 그때 찍은 사진이 그 책 표지가 되었다. 나중에 구글에서 그 건물을 찾아보니 ‘카마구에이 우체국’이었다.

(제공 = 송필경)

쿠바 제1의 도시 아바나와 제2의 도시 산티아고 데 쿠바를 보고 나서 제3의 도시 카마구에이를 차례로 슬쩍 지나치면서 봤다. 옛 식민지 시대 전통 도시 환경이 비교적 온전한 쿠바에서  깊게 받은 인상은 우리 절에 가면 대웅전 앞에 큰 뜰이 있듯이 쿠바 도시의 큰 성당 앞에는 광장이 있다는 점이다. 내가 본 이탈리아 유적 도시들도 그랬다.

유럽이나 여기 쿠바에 있는 일상적인 광장은 우리 여의도 광장, 광화문 광장과 다른 무언가 다른 의미가 담긴 것 같아 나는 광장의 의미를 이번 여행의 숙제로 남겼다. 아직 광장에 대해 내 의견을 낼 지식과 견문을 쌓지 않아 언급한 능력이 없는 게 아쉽다. 다음 쿠바 여행에서는 광장의 의미를 풀어내고 싶다.

여기 ‘산 후앙 데 디오스 광장(Plaza San Juan de Dios)’은 가장 잘 보전이 잘 된 아름다운 공간이라 한다. 광장 문화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는 그저 단조롭고 한가한 공간에 낡은 건물이 있을 뿐이었다. 구태여 비교하자면 불국사의 화려한 석가탑 다보탑의 공간보다는 부석사 무량수전 앞의 소박한 공간 같은 느낌이었다. 광장 한 건물 앞 앉아서 핸드폰에 열중하는 아가씨가 인상적이었다.

(제공 = 송필경)

카마구에이 같은 역사 유적 도시를 봤다는 것에만 만족하고 다음 도시 트리니다드로 떠났다.
노을이 질 무렵 트리니다드 해변가 호텔로 갔다. 동남아 여느 리조트 호텔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단 밤마다 해변 야외 공연장에서 쿠바의 화끈한 음악과 젊은이들의 몸놀림을 보여주는 춤 공연이 있다고 한다.

(제공 = 송필경)

그 다음 날 도시 전체가 식민지 시대 스페인 유적을 가장 잘 보전하고 있어,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적지로 지정한 트리니다드 시내를 구경했다.

쿠바 여행 일정을 기획한 손호철 교수에 따르면 여행안내서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이 트리니다드를 세계 최고의 여행지로 꼽았다고 한다.

여러 여행안내서가 많지만 ‘론리 플래닛’이 내용이 풍부하고 상세하고 정확해서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를 지닌다.

2015년 3월 초, 베트남 북부 하노이에서 디엔비엔푸까지 약 500km의 산악지대를 자전거 여행한 적이 있었다. 우리 강원도보다 훨씬 험했다. 매일 한계령 같은 고개를 하나씩 넘었다. 이때 가이드북으로 삼은 책이 ‘론리 플래닛’이었다. 금자씨보다 더 친절해서 말도 통하지 않은 오지에서 쉽게 길 안내를 받았고 숙소도 잘 잡을 수 있었다. ‘론리 플래닛’은 글로 된 네비게이션이었다.

‘론리 플래닛’이 트리니다드를 최고 여행지라 꼽았나는 것은 아주 의미 있는 도시라는 뜻인데 이를 감상할 수 있는 안목이 부족한 것이 안타까웠다.

트리니다드는 식민지 도시 건설의 뛰어난 사례로 꼽는다. 많은 고풍스런 건물과 광장이 조화로운 도시로, 건축과 역사와 문화 요소를 함께 담고 있다고 한다.

(제공 = 송필경)

카마구에이와 마찬가지로 여기 서너 시간 어슬렁어슬렁한 것으로 유서 깊은 유적 도시를 내 나름대로 의미 있게 평가하기에는 불가능하다. 돌 조각으로 포장한 골목길을 마차를 타고 덜거덕거리며 구석구석 돌아다닌 것과 동네 외곽에 전시한 증기 기차를 구경한 것이 색다른 경험이었다.

(제공 = 송필경)

점심은 해물 요리 전문 식당 베란다에서 식사를 했다. 큰 나무가 베란다 전체를 뒤덮고, 식사 동안 관광객을 위한 가수 등장도 빠지지 않았다. 여성 혼자 기타를 치며 ‘라 팔로마’ 같은 노래를 조용히 불렀다. 대가로 CD를 10달러에 샀다.

(제공 = 송필경)

7월 10일 오전과 이른 오후까지 트리니다드 시내 관광을 하고 늦은 오후에는 해변 리조트 호텔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앙콘 해변 호텔에서 본 카리브 해는 밝고 맑고 조용했다.

(제공 = 송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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