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봄, 그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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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봄, 그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 박준영
  • 승인 2019.04.12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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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역사에 말을 걸다- 여섯 번째 이야기

크로스컬처 박준영 대표는 성균관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에서 영화를 전공했다. 언론과 방송계에서 밥을 먹고 살다가 지금은 역사콘텐츠로 쓰고 말하고 있다. 『나의 한국사 편력기』 와 『영화, 한국사에 말을 걸다』 등의 책을 냈다. 앞으로 매달 2주차 금요일에 영화나 드라마 속 역사 이야기들을 본지에 풀어낼 계획이다.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 편집자 주

(출처 네이버 영화)

‘1987’을 치르고 우리는 이제 일터로, 학교로 돌아갔다. 비록 대통령 자리는 못난 정치인들 때문에 ‘죽 숴서 개 주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조금은 세상이 나아지겠지 했다.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는지 깨닫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1991년 봄. 무려 11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내 놓아야 했다. 그해 찬란했던 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 일까? 단 한 달 만에 봄날 꽃 같은 젊음이 스러져간 곡절은 무엇이었을까?

당시의 사건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든 ‘1991 봄’은 지금도 상영 중이다. 물론 멀티플렉스에서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전국을 돌며 예술영화관에서 단관 개봉일 뿐이다. 그러나 이 한편의 다큐가 갖는 무게와 의미는 남다르다. 영화는 1991년의 봄에 벌어진 기막히고 참담한 일들을 다큐라는 형식을 빌어 풀어냈다.

‘1987’로 다시 가 보자. 6월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라는 정치적 과실을 부분적으로 얻게 되었다. 박종철, 이한열 등 학생들의 숭고한 희생으로 그나마 쟁취한 절차적 민주화였다. 그러나 변혁은 거기까지였다. 전두환의 친구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우리는 그들을 ‘쌍생아’라고 불렀다. 분하고 원통했지만 받아들였다.

그러나 다큐에서 이부영 당시 전민련의장은 ‘분명한 유사독재권력’이라 일갈했고 독재는 ‘직선제 대통령’이라는 명분으로 위장했고 폭력은 교묘한 치장으로 은폐되었으며 대항하는 진영은 의외로 패배감이 오래 머물렀다. 여전히 국가폭력을 통해서만 권력을 유지 관리할 수 있었던 노태우정권은 들어선지 2년만인 1991년, 얼기설기 겨우 맞춰졌던 불안한 침묵이 다시 이 땅 젊은이들의 투쟁으로 깨어졌다.

(출처 네이버영화)

당시 많은 국민들은 잠시 ‘보통사람 대통령’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조금만 참고 기다려보자는 입장도 있었다. 그러나 대학가부터 저항의 불씨가 스멀스멀 피어 오르고 있었다. 가시적인 군사정권의 모습은 희석되었지만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권위적이고 비민주적인 행태는 여전히 강고하게 버티고 있었고 이런 모순들을 해결하기 위한 싸움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학생들의 이해와 정당한 권리에 기초한 ‘등록금 인상 저지 투쟁’은 그래서 나올 게 나온, 대 사회투쟁의 첫 번째 이슈였다.

명지대생 1학년 강경대가 학교로 진입한 경찰의 쇠파이프에 머리를 맞고 절명한다. 의도적 침묵을 지키던 국민들은 서서히 동요하기 시작한다. 잔치는 끝나지 않았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 따위를 운위 할 단계는 아니다는 자각을 하기 시작했다. 불씨는 들불처럼 번져갔다. 전남대생 박승희는 ‘강경대를 살려내라’며 분신하였고 잇따른 학생과 시민의 죽음이 이어졌다. 폭력경찰 규탄 시위 장소에서 성균관대 김귀정 학생이 경찰의 폭력으로 숨을 거둔다.

4월에만 무려 11명의 학생과 시민이 국가권력의 부당한 탄압에 항의하며 투쟁하다 경찰폭력에 의해 숨지거나 혹은 그들이 가진 유일하면서 가장 소중한 목숨을 세상에 내어 던지는 마지막 방법으로 싸워나갔다. 이들은 역사의 반동을 경계하였고 열패감에 시달리는 민주화 세력에게 다시 동력을 불어 넣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방법은 동의하지 않치만 그들의 용기에는 경의를 표한다.

이렇듯 노태우정권의 민낯이 드러나자 권력은 비열하게 이들의 죽음을 ‘죽음의 굿판’으로 경멸했고 학생들이 자살특공대를 조직하여 대기표를 받아 순서대로 분신을 하고 있다는 식의 저열한 방식으로 여론을 몰아갔다. 마침내 기획수사가 소설처럼 하나 만들어졌다. 서강대생 김기설이 분신하며 남긴 유서를 당시 전민련(전국민족민주연합) 간부인 강기훈이 유서대필을 하였고 자살을 부추겼다고 검찰은 발표한다. 이 사건으로 강기훈은 징역 3년을 선고받았으며 2015년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기까지 엄청난 상처와 고통에 시달린다.

(출처 네이버영화)

다시 영화‘1991 봄’을 보자.

1991년 봄에 대학 신입생이었던 권경원 감독은 강기훈의 ‘유서대필 조작사건’을 중심으로 자신의 첫 영화인 다큐 ‘1991 봄’을 만든다. ‘유서조작’은 프랑스의 소설가 에밀졸라가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 “나는 고발한다”의 필화사건과 비견되곤 한다. 유태인계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자신이 작성한 군사문서가 군사 비밀인 암호와 일치하고 글자체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지목된다. 프랑스 군부는 보불전쟁 패전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희생양 또는 전범을 필요로 했고, 유태계 장교 드레퓌스는 그러한 희생양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는 비공개 군법회의에서 반역죄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강제로 불명예 전역된 뒤, 섬으로 유배된다. 그로부터 2년 뒤, 우연한 기회에 진짜 간첩은 밝혀지지만 여전히 뒤레퓌스의 무죄 주장은 묵살된다. 하지만 프랑스의 양심적 지식인들에 의해 진실은 밝혀지고 뒤레퓌스는 양심에 따라 진실을 밝히는 행동을 지칭하는 일반명사가 되었다.

다시 2019년 봄이다.

이 봄의 대한민국은 ‘뒤레퓌스의 진실’을 위해 싸우고 있는가? 당시 강기훈을 기소했던 곽상도 검사는 현재 국회의원으로 버젓이 활동 중이고 강기훈은 오랜 싸움에 지쳐 위암을 얻고 투병 중이다. 영화는 내내 강기훈의 상처를 치유하고 위로하는데 많은 시간을 사용한다.

(출처 네이버영화)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그만큼 그는 온 몸의 에너지를 다 써야했고 지금은 암에 걸려 신음한다. 통기타를 튕기며 마음의 평화와 위안을 찾아 보지만 이미 그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의 정신적 피폐는 오죽 하겠는가? 그를 치료하는 의사가 강기훈에게 말한다.

“시시하고 하찮게 사십시오.”
힐링도서의 제목같은 경구이지만 그에게 시시한 삶, 하찮은 삶은 그동안 얼마나 절실했을까.

우리는 다시 ‘1991년 봄’을 보면서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를 바라본다. 해방 후 반민특위가 국론을 분열했다는 역사인식을 가진 이와 민주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건강한 젊은이를 자살방조자로 만든 사이코 정치인이 잘나가는 3선의원인 이 나라에서 무엇을 더 해야할지는 다큐 ‘1991 봄’을 보면  명확해지지 않을까?

이후 30년이 흘렀지만 우리가 진정한 문명사회로 진입하기 위해선 당시의 광풍과 협잡과 왜곡의 역사를 직시하고 다시 바로 잡을게 있다면 그리 해야 한다. 영화 ‘1987’에서 가장 인상깊은 장면은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갈 때 故 문익환 목사가 이한열 장례식 추모사에서 민주열사의 이름을 한 명씩 절규하듯 외쳤던 모습이다. 필자도 오마쥬 해 본다.

강경대.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 박창수. 윤용하, 김기설. 이정순. 김철수. 정상순. 강귀정 열사여...

부끄러운 봄날에 애도를 표합니다. 당신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출처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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