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의 압력: 노벨과 스크루지 영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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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압력: 노벨과 스크루지 영감
  • 송필경
  • 승인 2019.02.15 17:54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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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시론] 송필경 논설위원
(제공= 송필경)

한 늙은 사나이가 무덤 쪽으로 벌벌 떨면서 기어가, 유령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눈을 돌려 버려진 무덤의 비석에 쓰인 자신의 이름을 읽었다. 사나이는 무릎을 꿇고 울부짖었다. “안 돼요, 유령님! 오 안 돼요, 안 돼!”

유령과 늙은이, 이쯤이면 이 문학 작품을 읽어 보지 않았더라도 늙은이가 오직 돈만을 긁어모아 움켜쥐고자 인생을 쥐어짠 스크루지 영감이라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영국의 대문호 찰스 디킨스의 1842년 작 <크리스마스 캐럴>이다

문학이 창조한 가장 지독한 구두쇠 스크루지 영감에게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과거, 현재, 미래의 세 유령이 찾아온다.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그 이유를 묻는 스크루지에게 과거의 유령은 말한다. “당신의 행복을 위해서.”

간단히 말해 인간이 근원적으로 불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습을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없어서가 아닐까?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자면 ‘나 자신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본다.

유령은 문학 작품 속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었다.

“더 빨리 더 많은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발명하여 부자가 된 알프레드 노벨, 어제 죽었다. 저승사자가 그를 죽였다.”

1888년 4월 13일자 프랑스 일간지 기사를 본인 알프레드 노벨이 읽었다. 노벨에게 스크루지의 유령은 다름 아닌 언론이었다.

프랑스 신문은 형 루드비히 노벨이 죽은 것을 알프레드 노벨이 죽은 줄 착각하고 오보를 냈다.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의도적인 가짜 뉴스하고는 달랐다. 언론은 죽었다고 단정한 노벨에게 마음 놓고 저주를 퍼부었다.

자신이 죽은 뒤의 평판 기사를 미리 읽은 셈이 된 알프레드 노벨(1833∼1896)의 속마음은 어땠을까?

(출처 www.nobelprize.org)

노벨은 24살 젊은 나이에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사람을 대량으로 죽이는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20개국 90여개 무기 공장에서 생산, 전 세계를 상대로 그야말로 돈을 긁어모았다.

노벨은 여자를 자신이 일하고 실험하는 것을 방해하는 시간 도둑으로 생각해 결혼하지 않았고 당연히 자식도 없었다. 돈 벌이에 관한 한 스크루지 이상이었다.

인간은 욕망에 집착하는 존재다. 집착은 남에게 해를 주거나 자신의 삶의 의미를 잃게 만들기 십상이다. 집착을 스스로 잘 조절하면 좋으련만, 스스로 도덕을 지키기란 인간의 어렵고도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사회적 인간이 자율적이지 않다는 것은 외부에서 도덕의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노벨은 언론 오보를 통해 도덕의 압력을 받았다. 이를 전화위복으로 삼아 노벨은 자신의 사후 평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유령을 통해 받은 도덕의 압력으로 개과천선한 스크루지처럼 말이다.

노벨은 엄청난 재산을 가진 만큼 엄청난 고민을 했을 것이다. 노벨은 그 뒤 7년 후, 그러니까 죽기 2년 전인 1895년 유서를 썼다. 사망 후 1년 뒤에 개봉한 유서에는 전 재산의 94%를 ‘인류에게 평화와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한 자’를 위해 쓰라고 했다.

이에 유산을 받을 수도 있었던 친지들은 분통을 터트렸고, 스웨덴 정부는 어마한 돈이 외국에 유출될 것에 불만을 나타냈다. 스웨덴 정부는 우물쭈물하다가 노벨의 유언에 따라 1901년 결국 노벨상을 제정했다.

노벨상을 시행한 지 118년이 지났다. 스웨덴이란 나라에 앞으로 행복한 명성을 가져다 줄 자원으로 노벨만한 인물은 도저히 있을 수 없으리라!

너무나 진부해서 말 같지 않은 이야기지만 죽음은 재물이나 권력 따위를 가져 갈 수 없다. 오직 죽음 뒤에 자신의 역사적 평판만이 남지 않을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동양의 경구를 노벨에게 적용해도 좋으리라. 그럼, 사람은 이름을 어디에 남기는가? 바로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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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출처 다음영화)

5.18 역사를 터무니없이 왜곡하는 자들의 집단이 우리 정치권에서 가장 강력한 야당이라는 게 너무나 부끄럽다. 도무지 역사의 품위와 도덕의 평판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으니 말이다.

오직 막무가내 정치권력에만 집착해 남의 삶을 쥐어짜는 참으로 지독한 것들이다. 인간이 아니라 것들이다! 이제 이것들에게 가할 도덕의 압력이란 미친개에 필요한 몽둥이 밖에 없지 않겠는가?

***
노벨에 관한 정보를 주신 분은 경북대 지리학과 교수를 역임하신 박찬석 전 경북대 총장님이시다. 총장님이 주신 원문을 여기에 옮기겠다. 내게 참으로 많은 생각을 떠오르게 한 글이었다.

아래 분문은 2019년 1월 19일 내일신문 <박찬석의 세계지리 산책>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지금 저는 스웨덴 지리를 산책하고 있습니다. 박찬석 드림

노벨의 유서

“Dr. Alfred Nobel, who became rich by finding ways to kill more people faster than ever before, died yesterday(더 빨리 더 많은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발명하여 부자가 된 알프레드는 노벨, 어제 죽었다).” “The merchant of death is dead(저승사자가 죽였다)”

프랑스의 일간지가 보도한 신문기사를 1888년 4월 13일 아침 알프레드 노벨은 읽었다. 본문은 노벨상 창립 100주년을 기하여 2001년에 미국 주간지 Time지가 영역하여 게재했다. 프랑스 신문들은 알프레드의 형 루드비히 노벨이 죽은 것을 알프레드 노벨이 죽은 줄 착각하고 오보를 냈다. 아주 저주스러운 기사이다. 노벨의 기분이 어떠했을까?

알프레드는 1833년에 스톡홀름에서 태어나서 1837년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갔다. 크리미아 전쟁 때(1853-1856) 아버지는 러시아 폭발물과 군수물자를 팔았다. 1850년 파리에 갔다. 질산(Nitroglycerin)을 발명한 이탈리아인 소브레로 밑에서 연구를 했다. 질산은 액체이고 불안정하다. 조금만 압력이나 열을 가해도 폭발하는 위험한 물질이다. 알프레드는 질산을 어떻게 안정시킬 것인가를 연구했다.

18살에 미국으로 가, 스웨덴 계 미국인 에릭슨 밑에서 연구를 했다. 에릭슨은 미국 남북전쟁 때(1861-1865) 북군에 장갑포함을 개발하여 제공한 전쟁상인이었다. 19세기 말 식민지 쟁탈로 인해 전 세계는 유럽 강대국들의 전쟁터였고, 새로운 무기가 필요했다. 알프레드는 드디어 1867년 24살 때 질산을 안정시키는데 성공했다. 다이너마이트이다. 적시 안타를 친 셈이다. 스웨덴, 독일, 프랑스, 영국, 미국에서 특허를 얻어냈다. 일생동안 355개의 특허를 가졌다. 최대의 발명품은 다이너마이트였다.

노벨 자서전 저자는 그가 독신으로 평생을 살았고,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다고 전했다. 여자 친구가 있긴 했지만, 여자는 일하고 실험하는데 시간을 빼앗는 도둑 쯤으로 생각했다. 그는 내성적이고, 실험실에서 연구만 하는 과학자였다. 지금의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 당시 스탠다드 오일과 더치오일에 비견되는 굴지의 유전을 개발했다. 스웨덴의 제일 큰 군수산업체 AB Bofors를 인수하여 대포 생산 등 군수산업을 했다.

그는 혼심의 힘을 쏟아 기술개발과 비즈니스에 전념했다. 스웨덴, 프랑스, 미국에서 공부를 했지만, 제대로 학교를 다닌 것이 아니고, 학위도 없다. 그는 기업활동을 위해많은 여행을 했고, 스웨덴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영어, 이탈리아어에 능통했다. 러시아와 프랑스에서 오래 살았다. 알프레드는 “내가 일하는 곳이 집이고, 나는 어디서나 일한다”고 했다. 최고의 부자다운 말이다.

그는 또한 천재적인 기업가였다. 그가 발명한 다이너마이트를, 세계 20개국 90개 무기 공장에서 생산했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낭만적인 유럽에서 가장 잘나가는 낭만적인 배가본드’가 아니었다. 집념의 사나이고 천재적인 발명가이고 기업가였다. 유럽에서 제일 부자가 되었다. 그는 독일 함부르크에 있는 쿠룸멜 연구소에서 8년을 살았고, 1873년부터는 파리 마코로프가에 있는 저택에서 20년간, 말년 5년은 이탈리아 휴양지 산레모에서 살다가 1896년에 생을 마감했다.

알프레드는 아침에 배달된 신문 기사를 보고 죽고 난후에 어떻게 평가 받을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가 죽기 2년 전, 1895년 11월27일 4장의 유서를 직접 써서 파리에 있는 스웨덴-노르웨이 클럽에 보냈다. 사망 후 1년 만에 개봉되었다. 세상이 놀랬다. 그의 전 재산의 94%를 지금으로 환산하면 3억 1,225만 크로나 어치의 현금과 부동산을 남겼다.

 "인류에게 평화와 삶의 질을 높이는데 기여한 과학자 문학가에 상을…” 알프레드의 유서가 발표되자 스웨덴의 가족과 친지들과 심지어는 스웨덴의 왕실마저 충격과 실망을 빠져들다 한다. 친지와 가족들은 유산을 받지 못한 것을 원망하고 분통을 터트렸고, 정부는 상금이 스웨덴인만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돌아가면 국부가 유출되는 것이라 불만을 표출했다. 집행을 위한 재단 설립을 꺼렸다.

논란 끝에 그러나 그가 남긴 유업으로 노벨상이 1901년에 제정되었다. 이자와 투자 수익금으로 운영된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이다. 매년 100억원 정도를 수상자들에게 배분한다. 노벨상 제정 118년이 지난 지금, 스웨덴이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노벨상을 모르는 지구인은 없다. 그 가치를 가늠하기 힘들다.

노벨은 세계에서 가장 큰 문화유산을 남긴 인간이다. 포보스 지는 2018년 세계부자 순위를 발표했다. 1위 아마존 CEO 제프 베조스 120조원, 2위 빌 케이츠 99조… 이건희 61위 20조이다. 모두 보통사람의 상상을 넘어선 부자들이다. 그러나 유서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이름이 언제까지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가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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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필경 2019-02-20 16:22:50
위의 글은 누구를 도덕적으로 평가하기 보다는 나 자신의 모습, 다시 말해 미래에 있을 나의 평가를 되도록 객관적으로 보자는 뜻이었습니다.

전문의 제도는 장단점이 있겠지요. 1차, 2차, 3차 의료 전달 체계를 제대로 세운다면 전문의제는 상당히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단지 개업의가 간판에 이름 쓰기 위해 전문의 제도를 이용한다면 치과 교육의 큰 낭비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3자 2019-02-18 12:22:39
제3자적 입장에서 누군가를 도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나름 쉬운 일이지요.

치과의사들의 온갖 욕망들이 마구 뒤섞여있는

전문의제 관련한 논쟁들에 대해서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 눈에는 학창시절 케이스의 상한선을 정해놓고 학점을 많이 따지 못하게 강제하던

유아적인 사고의 수준을 못벗어난 이전투구로 보이는데,

송선생님의 견해는 어떠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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