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쿠바 여행기 『왜 체 게바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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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쿠바 여행기 『왜 체 게바라인가?』
  • 송필경
  • 승인 2019.02.01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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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시가지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인 비에하(Vieja)지역

코히마르 마을을 떠나 중앙공원(파르케 센트랄; Parque Central)으로 갔다. 불과 15분 정도 거리다. 이 중앙공원은 아바나 관광의 시작점이라 한다.

유럽 여러 양식의 낡은 건물이 주위에 즐비한 광장과 거리에는 1950~60년대 생산된 미국 차(old classic car)와 마차가 길게 늘어선 채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다.

1950~60년대 생산된 미국 차(old classic car)와 마차가 길게 늘어선 채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다(제공 = 송필경)

꼬꼬(COCO) 택시와 자전거 택시도 어울려 있다. 교통수단의 조합이 기묘하다.

자전거 택시(좌) 꼬꼬(COCO) 택시(우) (제공 = 송필경)

아바나의 중심 광장답게 광장 중심에는 호세 마르티의 동상이 우뚝하다. 쿠바 전역에 수 천 개가 넘는 호세 마르티의 동상 가운데 1905년 최초로 세운 것이다. 이 해는 호세 마르티 서거 10주년이었다.

언제 되뇌어도 통찰력이 빛나는 마르티의 외침이 떠올랐다. 

“게으르지 않고 그렇다고 성질이 고약하지도 않은 사람이 가난하게 살고 있다면 그곳에는 불의가 있다.”

혁명의 필요성을 이보다 더 절실하게 호소한 글이나 말을 나는 아직 보거나 듣지 못했다. 정교한 사회 이론은 사회 행위나 역사 실천에 큰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지만, 이론이 민중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려면 지식인의 해설이 필요했다. 근데 이제까지 이론을 역사에서 실천하며 민중의 신뢰를 얻은 지식인이 얼마나 있었을까.

호세 마르티는 예리한 이론가였고, 뜨거운 실천가였다.

(제공 = 송필경)

아바나 시내 중심부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동쪽에 옛 시가지인 비에하(Vieja), 중심부인 센트랄 아바나(Habana Central) 그리고 새 시가지인 서쪽 베다도(Vedado)다.

우리는 중앙공원에서 시작해서 거리 전체가 1982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비에하 지역의 여기저기를 스치면서 기웃기웃 거렸다.

중앙공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웅장한 건물이 보였다. 미국 국회의사당과 판에 박은 건물이다. 카피톨리오(Capitolio National)라 한다. 미국이 실질 지배하던 1929년에 미국 국회의사당을 설계한 건축가의 작품이다. 그러니 쌍둥이의 동생 건물인 셈이다. 1959년 혁명 이전까지는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했다가 혁명 뒤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길 맞은편에서 카피톨리오 건물 외향만 보고 돌아서는데 할머니가 허름한 건물 담벼락에서 시가를 피운다. 담배 끊은 지 오래지만 30여 년 전에 피워봤던 시가의 독하며 구수한 향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시가를 피우는 할머니(좌)와 카피톨리오 건물(우) (제공 = 송필경)

드넓은 시가지를 모두 보기에는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 오비스포 거리(Obispo Street)를 중심으로 다녔다. 오비스포 거리는 중앙공원과 구 국회의사당 건물 그리고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과 연결해 있다. 세계문화유산 거리답게 옛 건물이 좁은 거리 사이에 즐비하다. 파스텔 색감의 대부분 건물은 칠이 벗겨졌고 무너질 듯한 건물도 드물게 보였다. 관광객과 아바나 시민들이 북적여 우리 명동이나 인사동 같았다.

나는 쿠바 가기 전 쿠바에 관한 책을 샅샅이 찾던 중 『쿠바, 혁명보다 뜨겁고 천국보다 낯선』이란 책을 구했다. 영화감독이자 작가인 정승구 선생이 쓴 책이다. 쿠바의 문화, 역사 그리고 정치에 대한 글인데 특히 문화 지식에 많은 영감을 받은 책이다.

이 책 113쪽에 보면 다음 글이 있다.

“행복과 아름다움을 잇는 예술에는 다양한 장르가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구체적이고 실체가 있어서 우리와 물리적으로 닿아 있는 예술은 단연 건축이다.
건축은 우리 일상과 가장 밀착된 예술로,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단순히 우리가 건물에서 거주해서가 아니라, 건축과 우리의 삶은 서로 상호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반인들의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삶으로 가득 찬 건물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주거지역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거주자들의 정체성에 가깝다.
건축은 그 안을 드나드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건축물을 살펴보면 거주자들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는 지를 단박에 알 수 있다. 쿠바인들은 남들과 다른 독특한 개성을 추구한다.
그 반대되는 예로, 한국의 개발독재 시절 획일적으로 지어진 우중충한 아파트들은 거주자들이 사회적으로 튀는 삶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정승구 선생 책에서 읽은 건축의 의미를 떠올리며 오랜 건물 숲 속을 헤엄치듯 지났다. 또다시 정승구 선생의 쿠바 건축 역사를 들어보자.

“16세기에 식민지 시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쿠바에는 스페인에서 유행하는 것들이 많이 흘러들었다. 이베리아 반도에 8세기 동안 머무르다 1492년에야 아프리카로 쫓겨 간 무어인들의 영향을 받은 당시 스페인의 예술은 기독교와 이슬람, 유럽과 아랍 문화의 혼혈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쿠바 건축의 시초는 혼합 문화인 무데하르(Mudejar)양식이다.”

무데하르 양식, 다시 말해 아랍-이슬람 문화와 기독교-스페인 문화가 결합한 형태를 말한다. 이 건축 양식이 쿠바에 고스란히 남아 관광객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외국인은 명동이나 인사동에서 어떤 것을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우리 것, 한국적인 것을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수천 년 이어온 전통이 훼손당했고, 한국전쟁은 그나마 남아 있던 전통 흔적을 파괴했다. 게다가 1960년대부터 박정희식 경제계획을 시작한 이후 개발을 빙자한 끊임없는 파괴는 이 땅을 재개발이란 콘크리트 투기공화국으로 만들었다.

여차하면 건물을 부수는 우리 행태는 경제를 위한 개발과 확대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인가? 서울에서 100년 되는 건물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아바나 비에하 지역을 겉핥기식이라도 둘러보려면 적게 잡아도 1주일이 걸리리라. 특히 저녁이면 유서 깊은 식당에서 식사와 모히또를 한 잔 하며 쿠바 음악 연주에 맞추어 어깨와 허리를 들썩이며 밤의 쿠바 속살과 부딪히는 경험은 참으로 짜릿하리라.

드넓은 문화유산의 거리를 우리는 기껏 3시간 만에 훑었다.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가이드에게 유서 있는 건물 이름이나 들으며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명동에 다음과 같은 건물들이 즐비하게 모여 있다고 상상해 보자. 명동 성당, 광화문에 있었던 옛 조선총독부였던 중앙청, 옛 종각 앞자리에 있었던 화신 백화점, 시청 앞에 있었던 반도 호텔, 을지로에 있던 국도극장, 지금 있는 덕수궁, 남대문로에 있는 한국은행 본점, 그 건물들 사이에 북촌 한옥 같은 건물들이 명동보다 십 수배 넓은 장소에 수백 채가 모여 있다면 구경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 아마, 아바나 시내를 구경하는 데 3시간이란 시간은 명동을 구경하는 3분의 시간과 비교해도 별 무리가 없으리라. 다시 말해 명동을 3분 만에 훑는다면 제대로 구경을 할 수 있을까?

한 채 한 채에 역사가 담긴 낡은 건물 수백 채가 어쩌면 이렇게 온존할 수 있을까? 여행 정보 책인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은 그 종류 책 가운데에서 상세하고 친절하기로 으뜸이다. 이 시리즈의 ‘쿠바’에서 쿠바가 건축을 보존한 비법을 들어보자. 론리 플래닛의 비에하 역사 건축을 보전하는 철학을 들어보자.

“건축물 보존 분야에서 이처럼 적은 자원으로 이렇게 많은 것을 거둬들인 경우는 결코 없을 것이다. 교육과 의료 분야에서 쿠바가 이루어낸 훌륭한 성과에 관해 보도하는 국제 언론을 수없이 접하게 된다. 하지만 쿠바, 가장 중요하게는 아바나 비에하에서, 심각하게 손상된 귀중한 역사유산들을 보존해 낸 이 놀라운 과업에 대해서는 비교적 덜 알려져 있다.

1970년대 말부터 시작해 현재까지도 진행 중인 이 작업은 수십 년간 방치된 아바나의 구시가를 하나하나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이다. 선견지명이 있으며,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방해요소를 고려했을 때 정말 기적적인 과정이었다. 이 프로젝트 배후에는 레알(Eusebio Leal Spengler)라는 천재적인 인물이 있다. 
아바나에 대해 연구한 유명한 도시 사학자로, 쿠바의 ‘특별시기’때 조여 오는 경제적인 압박감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1994년 아바과넥스(Habaguanex)를 설립했다. 관광 산업을 통해 경화를 벌어들이는 지주회사로, 여기서 벌어들인 돈을 역사적인 복원 및 도시 재건 사업에 투자했다. 사업은 초기부터 많은 성과를 거둬들였다. 아바나의 역사유산을 보호함으로써 레알과 그의 지지자들은 아바나에 더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일 수 있었고 아바과넥스는 더 많은 수익을 거두어 들여 계속되는 복원작업과 필요가 절실한 사회사업에 투입할 수 있었다.

아바나의 구 중심가를 유서 깊은 테마파크로 바꾸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고 레알은 아바나의 흩어진 조각들을 다시 세워 정통성이 있는 ‘살아 있는’ 현장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는 또한 9만 1천 명이 넘는 지역 주민들에게 가시적인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그 결과 아바나 지역에는 재정돈된 식민시대 건축물들과 학교, 주민위원회, 양로원, 장애 아동 센터가 완벽하게 어우러져 있다. 이처럼 지역 주민과 관광객을 나란히 설정한 것은 매우 독특하며 훌륭하다.

매력적인 비에하 광장의 야외에서 모히토 한 잔을 홀짝거리다 보면 광장 가까이 있는 앙겔라 란다 학교(Angela Landa School)의 어린이들과 공간을 공유하게 된다. 17세기 무렵에 건설된 벨렌 수도원(Convento Belen) 주변을 거닐다 보면 요양원에 머무는 아바나의 노인들과 어깨를 스치게 될 것이다. 본질적으로 관광객이 아바과넥스에서 관리하는 호텔, 박물관, 레스토랑에 돈을 낼 때마다 이들은 이 지역의 지속적인 복원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에게 직접적인 혜택이 돌아가는 수많은 사회사업에도 기여하는 것이다.

현재 아바과넥스는 연간 관광수입(1억 6천만 달러를 초과한다고 한다)을 계속되는 복구 사업(45%)과 현재 400여 건의 도시 사회사업(55%)에 나누어 투자한다. 이 회사는 복원사업을 할 때 옛 문서, 그림, 역사책, 포르테카 박물관에 소장된 사진 자료 등을 이용해 세부까지 꼼꼼히 신경 쓰는 것까지 유명하다. 현재까지 아바나 비에하의 4분의 1이 장려했던 식민지시대 때의 수준을 되찾았다. 이 중에는 아바과넥스에서 운영하는 20개 호텔, 4곳의 대표적인 요새, 30여 군데의 박물관 등 엄청난 관광 명소가 포함된다."

쿠바의 건축 역사 보존 정책은 우리가 귀감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건물을 투기의 대상으로 삼는 우리 투기꾼의 눈에는 낡은 건물은 무조건 파괴하려는 고루함으로만 볼 것이다.

쿠바 여행을 가려는 분에게 아래 사진의 두 책을 권하고 싶다.

도서 『쿠바, 혁명보다 뜨겁고 천국보다 낯선(아카넷)』(좌)과 『쿠바(론리플래닛)』(우)

대규모 아파트 단지 부근 기존 학교를 장애인 학교로 바꾸려 하자 집값 하락을 우려하는 주민의 반발이 도를 넘어선 예가 있다. 장애인 부모가 아파트 주민에게 무릎 꿇고 절규에 가깝게 애원해도 모르쇠 하는 인심이 우리 서울이다. 입시에 유리한 특수학교를 세워 집값 상승에만 눈독이 올라, 사회 약자에 대한 연민은 도무지 꽝이다.

스페인 식민지 쿠바는 16세기 초 중반 동쪽 끝 산티아고 데 쿠바에 있는 수도를 16세기 후반 서쪽에 위치한 아바나로 옮겼다. 16세기 말 스페인 국왕이 이곳을 수도로 승인하면서 "아바나는 신세계를 여는 열쇠다."라고 했다. 아바나는 17세기부터 현재까지 수도인 동시에 유럽과 중남미의 입구 역할을 했다.

쿠바 어디에서나 흔한 것은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에 생산된 미국 대중 승용차가 천지에 널려 굴러다니는 모습이다. 늘씬한 차체 길이는 요즘 미니버스만 하다. 그 당시 유럽의 대중차는 딱정벌레란 별명이 붙은 ‘폭스바겐 비틀’과 같은 소형차가 주류였다. 유럽 차는 미국 차에 비해 길이가 반이나 됐을까?
 
낡은 차가 신기하게 잘 다니는데 운전석과 그 옆 좌석에 목 받침이 없는 게 불안해 보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에 생산된 미국 승용차. 쿠바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다(제공 = 송필경)

당시 노예적인 삶을 살았던 쿠바 대중이 미국의 대중차를 소유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 했으리라. 지금 이렇게 많은 미국 차는 대부분 미국인이 소유했을 것이고 그만큼 많은 미국인들이 여기 쿠바에서 얼마나 흥청망청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쿠바의 중심지인 이곳은 영화 『대부』에서도 나왔던 마피아 갱들이 마약과 도박과 매춘으로 돈을 긁어모아 희희낙락 춤춘 퇴폐 놀이터였다.

그 당시 아바나 법대를 다닌 피델 카스트로는 미국의 갱단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조국의 실태에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1959년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피델은 모든 퇴폐업소를 폐쇄하고 미국 갱들을 미국으로 쫓아냈다. 많은 호텔들을 쪼개서 가난한 서민들에게 집으로 무상 분배했다. 덕분에 아바나는 1960년대부터 전 세계적으로 광풍처럼 불던 투기 개발을 피할 수 있었고, 지금의 세계문화유산으로 관광객을 모으고 있는 것이 아닐까?

7월의 아바나는 뜨거웠다. 천천히 걷는데도 땀이 줄줄 흘렀다. 중앙공원에서 오비포스 거리를 주위를 구경하고 다시 중앙공원으로 되돌아 왔다.

만약 문화에 대한 미학에 안목이 있고 글 솜씨가 좋은 유홍준 교수 같은 분이 내가 간 곳만 샅샅이 훑더라도 책이 몇 권 나올 수 있는 그러한 곳이었다.

이제부터 사진으로 글을 대신하겠다.

거리에 공중전화기가 제법 띤다(제공 = 송필경)
번잡한 시내에도 호세 마르티 초등학교가 있다. 호세 마르티 벽화가 있는 집도 있다. (제공 = 송필경)
시가를 문 노인들 (제공 = 송필경)
돈키호테 동상 (제공 = 송필경)

허름한 건물의 정원 같은 공간에 돈키호테의 시종인 산초 판사(Sancho Panza)의 모형이 있다. 스페인어로 쓴 최고의 문학인 『돈키호테』는 여기 쿠바에서도 인기가 높다.

카스트로의 『카스트로 아바나 선언』이란 책 서문을 쓴 타리크 알리(Tariq Ali)는 다음의 간결한 표현에 쿠바 혁명의 전말이 모두 담겨있다고 했다.

“종이 순순히 처벌에 응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주인의 무릎을 꿇린다면 그는 얼마나 놀랠까? 세르반테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돈키호테; 그래서 너는 지금껏 먹여준 주인에게 감히 저항하려는가.
산초; 나는 왕을 추대하지도 폐위하지도 않는다. 단지 스스로 서려할 뿐이다. 왜냐하면 나의 주인은 나이기 때문이다.“

오비포스 거리(제공 = 송필경)
어딜 가나 체 게바라 초상이 가장 많다 (제공 = 송필경)
식당은 물론 거리나 광장의 한 편에는 반드시 연주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제공 = 송필경)
아바네라 약국 박물관 (제공 = 송필경)

아바네라 약국 박물관, 존슨 약국이라고도 한다. 정면 벽에는 오래전 사용하던 약재의 그릇들을 그대로 전시했다. 2006년 화재로 불타 새롭게 만든 것이다. 유리진열장 안의 오랜 책자에는 당시 조제하던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1931년 지은 암보스 맘보스 호텔 (제공 = 송필경)
암보스 맘보스 호텔 내부 모습 (제공 = 송필경)

헤밍웨이가 1932년부터 1939년 쿠바에 머무는 동안 투숙한 호텔이다. 호텔 로비에는 헤밍웨이 사진이 많이 걸려 있다.

쇠창살 형태의 구형 엘리베이터가 아직 운용중이다 (제공 = 송필경)
헤밍웨이는 이곳 511호실에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했다 (제공 = 송필경)

헤밍웨이는 이곳 511호실에서 자신의 최고 대작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했다. 지금은 투숙객을 받지 않고 헤밍웨이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미리 예약한 관람객이 많아 방안 구경은 하지 못했다. 방안 관람료가 무려 5CUC, 약 6달러 하였다.

호텔 8층에 위치한 오픈 레스토랑 (제공 = 송필경)

호텔 8층은 오픈 레스토랑이다. 그 유명한 모히또를 한 잔 하면서 여행 중 처음으로 느긋한 휴식을 취했다. 설탕에 박하 잎을 넣은 달콤새콤하고 시원한 모히또에 더위를 식히다가 깜박 졸았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바라본 비에하 지역 풍경 (제공= 송필경)

호텔 레스트랑에서 바라본 비에하 지역. 이 정도 낡은 건물들이면 우리나라에서는 투기꾼들이 재개발하려고 닦달할 것이다.

아시아 박물관. 그밖에도 아프리카 박물관, 아랍 박물관 등이 있다. (제공 = 송필경)
현대 미술 박물관 (제공 = 송필경)
산프란시스코 교회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는 쇼팽(좌)과 호세 마리아 로페스 동상(우) (제공 = 송필경)

산프란시스코 교회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는 쇼팽과 파리의 신사. 일행인 손호철 교수가 쇼팽의 동상 옆에 앉아 있다. 사람 손이 닿은 곳에는 빤질빤질하다. 

1950년대 노숙자였던 호세 마리아 로페스(Jose Maria Lopez Lledin;1899-1985)의 동상이다. 뜨거운 여름에도 늘 검은 색 정장 차림으로 자신의 포트폴리오가 있는 종이를 지니고 다녔으며 아는 것이 많고 이야기를 즐기던 사나이였다. 어디를 가든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고 사람들과 대화를 즐겼다. 사랑하는 여인이 죽은 후 결혼하지 않고 그녀와 약속을 지켰고 한때 TV출연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수염이나 손을 만진다거나 혹은 발을 밟으면 행운이 온다는 이야기가 있어, 사람 손이 탄 곳에는 역시 빤질빤질하다.

총독관저 (제공 = 송필경)

총독관저. 1770년대 지은 건물로 쿠바 바로크 양식의 전형이다. 아르마스 광장의 서쪽 한 면을 모두 차지하고 있다. 이후엔 미국 총독의 본부로 사용하다가 대통령 궁으로도 이용했다. 안마당에는 콜럼부스의 석상이 있다.

옛 도시의 길은 모두 돌을 깔았는데 마차가 지나가면 소리가 요란했다. 낮잠을 즐겼던 한 스페인 총독은 그 소리가 듣기 싫어 총독 관저 주변에는 모두 나무를 깔았다고 한다.
나무 길 위에 개가 상팔자 자세로 누워있다.

산크리스토발 대성당(La Catedral de San Cristobal) 풍경 (제공 = 송필경)

1777년 완공되어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꼽히는 ‘산크리스토발 대성당(La Catedral de San Cristobal)’은 콜럼버스의 유해를 100년 간 안치하기도 했다. 건물 좌우 비대칭이 눈에 뛴다.

카드로 점을 치는 여인들이 있어 사진을 찍으려 하니 손사래를 친다.

거리의 벽화들. 지저분한 것 같으면서 정감이 간다. (제공 = 송필경)
그림 파는 집. 돈키호테의 그림도 있다. (제공 = 송필경)
시몬 볼리바르(Simon Bolivar;1783~1830) 청동상(좌)과 스피데스(Carlos Manuel Cespedes;1819~1874) 대리석 석상(우) (제공 = 송필경)

메르카데레스 거리와 오브라피아 거리가 만나는 지점에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자인 시몬 볼리바르(Simon Bolivar;1783~1830) 청동상이 있다.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중앙에는 1868년 쿠바 독립을 이끈 세스피데스(Carlos Manuel Cespedes;1819~1874)의 대리석 석상이 있다.

쿠바 어디를 가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광장, 공원, 네거리 등)에는 반드시 애국지사의 동상이 있다. 베트남도 마찬가지다. 현대사에서 자랑스러운 선조를 언제나 기억하는 전통은 몹시 부럽다.

(제공 = 송필경)

너무나 많은 것을 보았고, 지금 설명한 것보다 더 중요한 역사 흔적을 보았으나 일일이 설명할 수가 없어 아쉽다.

어느 주택의 새장을 매단 창틀에서 자애로운 엄마의 눈빛과 관광객을 바라보는 아이의 모습이 내 가슴을 무척 따뜻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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