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필경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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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필경을 만나다
  • 전민용
  • 승인 2018.11.29 17:42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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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이 만난 사람들 시즌 2-1] 수원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새날치과의원 송필경 원장

오늘 시작하는 ‘전민용이 만난 사람들 시즌2’는 지금까지보다 더 깊고 넓게 인간과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에 대한 탐구를 하려고 한다. 첫 번째로 뚜렷한 자기 관점을 가지고 글쓰기를 왕성하게 하고 있는 송필경 선생을 인터뷰했다. 가을비 내리는 날 저녁 1차 베트남 음식점부터 3차 맥주집까지 네 시간 동안 정말 많은 얘기를 들었다.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인터뷰이의 말을 최대한 가감 없이 전달해야 한다는 원칙과 신문으로서 가독성 높은 글이어야 한다는 원칙 사이에서 갈등해야만 했다. 앞으로 송 선생과 의미 있는 대화를 이어갈 누군가에게 기초적인 참고글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녹취록 작성에 협조해 준 안은선 기자에게 감사드린다

-인터뷰어 전민용

 

(좌) 전민용 대표 (우) 송필경 원장

-베트남에 관심 가지신지 오래 되셨다.

건치의 베트남 진료봉사는 19년째다. 2000년에 처음 갔고 2004년 사스 때 빼고 18번 갔다. 나는 2001년 처음 갔고 진료활동은 10번 참가했다. 그동안 진료 활동을 포함해서 26번 베트남에 갔다.

-최근 쿠바에 다녀오시면서 쿠바에 관한 글을 쓰고 계시는데 베트남과 쿠바의 가장 큰 공통점은 무엇인가?

승리한 경험이다. 이번에 쿠바에 대해 공부하고 보니까 독특한 혁명의 역사가 있다. 왜 쿠바만 유일하게 라틴아메리카에서 승리했을까? 그건 베트남의 역사처럼 나름의 아주 탄탄한 혁명적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베트남과의 공통점은 확고한 정신적 지도자, 정치적 지도자가 있다는 점이다. 보통 쿠바하면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를 떠올리는 데 실제로 쿠바인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19세기의 위대한 인물인 호세 마르티다.

쿠바의 카스트로체제는 49년 동안이나 독재를 하면서도 모범적인 것은 카스트로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체 게바라를 내세웠다는 것이다. 쿠바에 가보니 체 게바라 사진이 카스트로보다 10배 정도 많다. 카스트로는 의도적으로 자신을 우상화 하지 않았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권력을 행사했다.

베트남에서는 모든 기준이 호 아저씨다. 베트남은 모든 것이 호치민으로 귀결하고 호치민을 내세운다. 그 점이 쿠바와 다르지만 그렇다고 호치민도 스스로 본인을 내세우진 않았다.

우리는 정신적 지주라고 할 만한 인물이 없다. 남북한을 통틀어 생각하면 말할 나위도 없다. 북한은 당연히 김일성부터 시작하지만 그 윗세대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를 안 한다. 그나마 남북한에서 공통적으로 존경받는 자는 신채호 선생이라고 하는데 우리들의 일상적인 정신 속에 들어와 있지 않으니까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라고 부르기 어렵다. 정신적 지주가 아예 없거나 있더라도 우상화하는 우리 민족은 이들 나라와 차이가 크다.

- 한 사회에 대다수가 합의할 수 있는 영웅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고 그 사회 집단의 역사적인 성과라 볼 수 있다.

영웅이라기보다는 정신적 지주다. 베트남에서는 영웅시 되고 우상화되는 게 아니라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말 그대로 정신적 지주, 존경의 대상이다.

- 이렇게 한 사회에서 한 인물을 부각시키거나 부각되는 것이 갖는 단점은 없나?

베트남에서 양심적 지식인들이 그걸 많이 지적한다. 호치민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생기면 호치민 뒤로 숨거나 호치민을 이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다. 일본 천황제와 비슷하다. 일본 정치가 발전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국민들이 반발하거나 불리하면 천황을 내세우고 그 뒤로 숨는다. 천황제는 세습권력이지만 호 아저씨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권력인데, 호치민을 앞세우고 그 뒤로 정치인들이 숨는 게 문제다.

쿠바는 미국과 대립관계로 소련의 도움을 받아서 혁명의 기초를 마련했다. 인간다운 삶의 조건에서 의식주 다음으로 중요한 게 교육과 의료다. 국가에서 책임지고 교육과 건강을 책임진다면 가장 위대한 국가가 될 수 있다고 보는데 잘 살고 못 살고를 떠나 쿠바는 무상교육 무상의료를 이루었다.

베트남은 전쟁 승리 후 소련하고 협력이 원활하지 못했고 중국하고는 원수 관계가 됐다. 이런 상태에서 90년대까지 미국에게 철저하게 봉쇄를 당했다. 80년대 말 도이모이 정책을 시행하자 타락한 자본들이 들어와서 국가가 뭔가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의료는 말할 것도 없고 교육도 보장이 안 된다.

- 베트남 관련 책을 여러 권 썼다.  

송필경 원장

세 권이다. 『제국주의 야만에 저항한 베트남 전쟁』, 『지난밤 나는 평화를 꿈꾸었네』는 베트남 진료단 멤버들에게 자료로 나눠줄 목적이 있어 쉽게 빨리 썼다. 『왜 호치민인가』는 10년 걸렸다. 처음에 멋도 모르고 쓴 책이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읽기에는 좋다고 한다.

- 최근에 관심이 베트남에서 쿠바로 옮겨 간 특별한 이유가 있나?

결국은 2가지인데, 쿠바는 적어도 GDP 3만 불인 우리나라도 해결 못하고 있는 의료와 교육 문제를 해결했다. 예를 들면 쿠바는 임신을 하면 상담해서 낳을 것이냐 묻고 기본 진료하고 필요하면 상급 병원으로 옮기고 모든 것이 무료다. 교육과 의료가 다 무료다. 내가 손녀를 보고 나니 감성적인 것이 생겼다. 우리 교육과 의료의 문제를 볼 때마다 손녀 얼굴이 떠오른다.

우리도 미래 세대를 위해 쿠바에게 배워서라도 꼭 해결해야 할 과제다. 그래서 쿠바를 공부하고 이론적으로 정리하고 글을 쓰고 있다. 일단 건치신문에 연재하고 책으로도 낼 생각이다.

(-쿠바의 무상의료제도와 현실에 대해 상당히 많은 얘기를 들었지만 생략한다. 자세한 것은 건치신문의 쿠바 의료 관련 기사를 참고하기 바란다.)

- 자료는 어떻게 구하나?

일단 도서관을 이용하고 쿠바 관련 책 40권 정도를 샀다. 그 중에 일본인 농업전문가가 쿠바에 생태농업 공부하러 갔다가 의료와 교육을 보고 감명 받아 쓴 책이 있는데 제일 많이 영향을 받았다. 『교육천국 쿠바를 가다』, 『의료천국 쿠바를 가다』등 시리즈로 있다.

이걸 볼 때 전교조나 인의협이 뭐했나하는 생각이 든다. 교육운동 의료운동 한다는 우리가 얼마나 이론이나 지식이 얕으냐는 것이다. 전교조가 지금까지 거의 30년 싸워오면서 감동을 주는 책을 한 권이라도 냈느냐? 인의협도 마찬가지다. 전문인만 읽을 수 있는 글이나 책만 냈다. 나도 소화하기 힘든 이야기다. 전교조나 인의협이라면 쿠바가 이룬 의료와 교육에 대한 성과의 우리나라 버전 정도는 책으로 만들어 내야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책 보면 “아! 우리도 하고 싶다. 이런 교육(의료)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나도록 말이다.

- 베트남과 쿠바를 다루다보면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측면이 주로 부각되는데 미국의 좋은 점을 꼽는다면?

미국의 좋은 점 많다. 역사적으로 제국주의가 가장 발달한 모습이지만 그걸 견제할 양심적 세력, 다시 말해 뉴욕타임스(?) 같은 언론, 하워드 진, 노암 촘스키 같은 진보적인 지식인이 건재한 나라가 미국이다. 우리가 제대로 갖지 못한 정말 부러운 부분이다. 미 라이 학살, 관타나모 형무소에서 고문 그리고 CIA의 죄악 같은 폭로를 수많은 미국 지식인들이 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 미국이 독보적이다. 이렇게 자기반성이 가능한 것, 미국 수정헌법 1조의 표현의 자유, 독립적인 사법권 등은 우리가 소중하게 배워야 한다. 미국 지성이 인류에 남긴 어마어마한 유산이다.

- 베트남과 쿠바의 문제점도 한두 가지 말해 달라.

베트남은 역사를 보니 원래 평소에는 이기적이고 좀 얍삽하고 그렇다. 국가적 위기가 닥치면 단결하고 수많은 영웅이 탄생했다. 앞에서 말했지만 지금 베트남은 부패, 부조리가 만연하다. 베트남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은 우리가 이러려고 청춘을 받쳐 혁명을 했냐고 자조한다. 자본이 들어오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부분이 아쉽다.

쿠바는 인간의 행복을 어디까지로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준다. 교육비 의료비는 안 들지만 물자는 계속 부족하다. 생필품 사려면 몇 시간이고 기다려야 한다. 미국과 가깝고 친척들도 많이 사니까 자본주의의 유혹에 흔들리는 것도 있다. 교육, 의료 등 지금 누리는 게 다른 나라에선 누릴 수 없는 행복이라는 걸 못 깨닫는 게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다.

- 혁명의 시대는 갔다고 하는 사람들 많은데 새로운 세상을 만들 새로운 방식이 있는가?

우리나라만 해도 위대한 혁명을 3번 했다. 419, 610, 촛불, 30년 주기마다 혁명을 했다. 문제는 혁명 주체가 정권을 잡지 못했다는 점이다.

프랑스 역사가 혁명의 속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를 보면 박애를 강조한 대혁명을 하고나서도 19세기 중반 베트남에 쳐들어간다. 혁명 정신과 정반대인 식민지 정책을 폈다. 1954년 베트남에서 패배한 후 그 패배한 군대가 바로 알제리로 갔다. 반성을 전혀 하지 않았다. 68혁명은 미국의 힘에 저항한 베트남전쟁에서 영감을 얻어 프랑스에서 불붙었다. 68혁명은 성평등까지 요구하며 모든 권위에 도전했다. 이렇게 68혁명 겪고 난 뒤 70년대 들어 프랑스가 비로소 반성한다. 1980년대 미테랑이 집권하며 사회주의 정권을 세운다. 그 때서야 톨레랑스(관용) 정신이 나온다.

프랑스에 2006년, 2010년 파리에서 대규모 소요사태가 있었다. 2006년에는 대학 입시제도 변경에 항의해 고등학생들이 거리에 있는 자동차들을 방화하며 폭동 수준으로 시위를 했다. 2010년에는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에 반대하며 파리 시내에 주차한 차들을 불태운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정부는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것이 아니라 반성하고 정부가 잘못했다, 정책을 바꾸겠다고 한다. 이런 것이 민주주의다.

이제 우리에게 이런 가능성을 보여 준 게 촛불혁명이다. 바로 다수의 민중이 원하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보았지 않은가?

전민용 대표

- 촛불이 결정적이었지만 국회 탄핵 의결, 헌재 판결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촛불이 없었으면 가결했겠나?

- 물론이다. 그렇지만 제도가 없었다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이번에 제도 속에 있는 타락한 사람들 다 보지 않았나? 촛불혁명을 경과하면서 보니까 사법부가 더 음흉한 놈들이었다. 일반 법관부터 대법관까지. 검찰은 어느 정도 보이게 했지만 법원은 숨어서 했다. 보이지 않는 건 고치기 더 힘들다. 그게 드러난 것이 촛불이 있었기 때문이다. 촛불혁명의 주체들이 집권해야 이런 것들 모두 개혁 가능한데 그게 우리의 한계다.

- 세상을 개혁하고 바꾸어야 한다는 인생관을 만든 계기가 있었나?

사회 개혁 쪽인 내 성향이 왜 이렇게 됐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아버지를 통해 사회 부정을 일찍 접했다. 아버지가 교직에 있었고 형제는 많다보니 집안 형편은 늘 어려웠는데 경북 교육청의 인사권을 쥐게 되자마자 수많은 선생들이 돈을 들고 왔다. 1970년대 공무원 힘 중에 가장 막강한 게 인사권이다. 아버지가 그 자리에 들어가자마자 우리 집을 괴롭히던 빚쟁이들은  사라지고 갑자기 부자가 됐다. 당시 집 한 채 200만원 할 땐데 6개월 만에 3천만 원이 뇌물로 들어왔다. 그래서 내가 서울까지 유학 가서 연세대에 갈 수 있었다. 재수해서 75학번인데 재수하면서부터 서울 합정동 전셋집에서 살았다. 그 시절 방 세 개에 가스레인지를 놓고 살았다. 내가 누린 부를 보면서 이 사회에 부정이 만연하다는 것을 알았다.

내 생애에 또 하나 충격을 준 것은 형이 멋도 모르고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것이다. 같이 간 동료 900명 중에 자기 혼자 대학생이었다고 한다. 좀 고지식한 사람인데 뇌물 10불만 주면 통역관 같은 비전투병으로 가는데 전투병으로 갔다. 베트남에 함께 참전한 형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와서 베트남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미국에서 항생제가 엄청 들어오는데 부상병들에게도 돈 안주면 약을 안주고, 여러 고가 약을 베트남에서 빼와서 국내 일반 병원에 팔았다는 것이다. 미국이 전비를 10배 100배 더 써도 베트남을 못이길 것이라는 얘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베트남전쟁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시각이 생겼다. 그 당시에 일반적이었던 반공 편견을 깬 계기가 됐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나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으면서 도 나는 남들보다 감동하지 않았고 오히려 시시해 보이기까지 했다. 형 이야기의 10분의 1도 못 미쳤다. 대학생의 눈으로 직접 베트남전을 본 형의 경험이 더 와 닿았다. 한참 더 지나서 리영희 선생의 탁월함과 그 책들의 진가를 알았다.

75년 학교에 입학했을 때 데모는 해도 낭만이 있었다. 데모하면 교수가 수업에 안 나오기도 하고, 어떤 교수는 백양로 저 뒤에서 우리를 보고 있거나 데모를 방임하는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연세대는 기독교 개론이 교양 필수 과목이었다. 담당은 서남동 교수였다. 해방신학 계통의 신학자로서 우리나라 민중 신학의 개척자이셨다. 아무튼 수업시간이 5교시라 점심에 막걸리 한 잔하고 오면 출석도 안 부르니 그냥 엎드려 자고 그러면서 한 달쯤 지나가는데, 나른한 봄날, 4월 20일 경쯤 인데, 곤하게 자는 데 교수님이 칠판을 꽝 때렸다. 깜짝 놀라 깨서 보니까  ‘희망’이란 두 글자가 칠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볼트만 교수(독일의 진보신학자)가 오는데 교내 게시판 곳곳에 강연 소식을 붙였더니 2시간 뒤에 형사가 나를 찾아왔다. 떼라고. 아니 이럴 수가 있느냐” 며 분노를 내뱉으셨다. 그리고는 “우리는 희망이 있기에 투쟁을 합니다.”는 사자후를 남기고 교실 문은 나선 교수님을 학교에서 다시 볼 수 없었다. 그 뒤 4월 30일에 베트남이 통일되고 박정희는 이를 핑계로 5월 13일에 긴급조치 9호라는 극악한 조치를 발동했다. 서남동 교수는 그 때 해직당하고 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구속당하셨다. 당시에는 “희망이 있기에 투쟁을 한다.”는 말의 의미를 몰랐지만 나중에 본 훼퍼 목사를 읽으며 이해되었다. 히틀러에 저항하다 감옥에서 죽은 그가 희망의 신학을 만들었고 이것이 남미로 가서 해방신학이 되고, 서남동교수의 민중신학이 되었다.
긴급조치 9호 이후 휴교했다가 복교하니 학교를 백골단이 점령해서 데모를 원천 봉쇄 했다.

요약하면 고교 시절 관행적인 사회 부정을 본 것, 형에게서 베트남 전쟁의 생생한 진실을 들은 것, 대학 1학년 때 서남동 교수의 칠판을 꽝 때리는 울림이 지금까지의 나를 규정한 강렬한 기억이었다.

-연대치대도 학생운동 조직이 있었는데….

본과 2학년 때 김영환 선배가 학생운동으로 제적당했다가 복학했다. 화려한 운동 경력에 말 잘하고 외모도 호감이 있어 많은 사람이 따랐다. 지금은 완전 변했지만 그때는 연대 운동권에서 스타 중에 스타였다. 복학한 그 선배와 실습실 맞은편 자리에 마주 앉아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날 미국을 어떻게 생각하냐며 나에게 반미 사상을 주입했다. 다시 말해 의식화 작업을 시도한 것이고 당시에는 많은 영향을 받았다.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하기까지의 김영환에 대한 얘기 속에는 큰 실망과 배신감이 드러났다.) 연대 치과대학 문학반이라는 서클에는 김진 선생, 권호근 선생 등 있었고, 존스홉킨스 대학의 사회주의 성향의 예방의학자인 빈센트 나바로의 『병원이 병을 만든다』 같은 책을 같이 읽고 토론했다. 전영찬 같은 친구들은 페다고지나 모리스 돕과 폴 스위지의 『자본주의 이행논쟁』 같은 책도 보았는데 난 오히려 볼테르나 맑스 베버, 톨스토이 등에 더 관심이 갔다. 그러다가 80년에 광주가 터졌다. 한번 낙제했으니까 본 3이었다. 5월 24일로 기억하는데 광주에서 문건이 왔는데 같이 운동하는 동료들과 보는 데 섬찟했다. 처음으로 군부에 대해 진한 공포를 느꼈다.

서울의 봄 이후 계속 휴교하다가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2학기가 시작됐는데 며칠 지나서 점심시간에 학생회관으로 나오라고 했다. 12시에 모 여학생이 학생회관 식당에서 전단을  뿌리면 안 잡히게 보디가드 역할을 하라고 했다. 그 때 전영찬 등 5명, 치대 3명과 타과 2명이 주동을 떴는데 도서관 본관 2층 창문을 깨고 “살인마 전두환을 죽여라”는 현수막을 걸었다. 나는 전단을 뿌린 여학생의 팔짱을 끼고 같이 도망 나왔다. 도서관에서 시위한 친구들은 다 잡혀서 감옥에 갔고 2년 살았다. (-주동했던 5명 중 전영찬 빼고는 나중에 다 뉴라이트 등 다른 길을 걸었다고 했다.) 난 그 이후로 의식화 관련 책들을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81년도에 졸업하고 바로 군에 갔다가 85년에 대구에서 개업했다. 개업하고 결혼하고 애도 놓고 돈도 잘 벌고 평생 그렇게 잘 살 줄 알았다. (웃음)

87년 4월 말에 누가 보자고해서 다방에 나가보니 두꺼운 안경을 쓴 이재용 선배였다. 서울에서 대구 출신 치대생 모임하면 서울대 연대 경희대가 같이 모였는데 여기서 이재용 선배를 만났었다. 73학번이고 고등학교 1년 선배인 이재용 선배가 보자마자 호헌철페 운동 하자고 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감옥에 갔던 친구들이었다. 그 부채의식 때문에 제안을 수락했다. 많은 치과의사들이 호헌철폐 직선제 개헌 운동에 함께 했지만 사실 서슬 퍼런 군사정부 하에서는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6‧10항쟁이 터지면서 상황이 싹 달라졌다.

이때부터 이재용 선배와 함께 대구에서 열심히 조직도 만들고 사회 문제에 대한 학습도 했다. 연세민주치과의사회를 청년치과의사회와 통합해 지금의 건치를 만들 때도 제일 앞장섰다. 대구에서 대표적인 재야단체로 전교조, 전농 등 7전이 있었는데 내가 이들과 연대 사업을 담당했다. 나중에 재용선배 정계 진출한 이후에는 환경운동연합 등 그가 하던 사회 활동을 거의 다 받아 일했다. 밥값 술값으로 돈도 많이 썼고 나중에는 감당이 어려워 빚내 큰 식당을 차렸는데 IMF 터지고 고스란히 수억 빚만 졌다.

평생 친구로 지내는 대구의 활동가 함종호도 만나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끈질기게 다루어 혁혁한 성과를 낸 최봉태 변호사도 만났다. 최 변호사는 나를 베트남 참전을 사과해야 한다는 문제에 집중하게 하는 큰 자극제가 돼 주었다.

송필경 원장

- 인생의 모토, 좌우명?

착하게 살자. 8만대장경을 3마디로 압축하면 바른 생각을 하고 악한 생각을 버리고 착하게 살아라, 인생에는 그 이상은 없다.

- 사진 많이 찍으시던데?

내 사진은 예술 사진이 아니라 그냥 마음 가는대로 찍는 기록사진이다. 디지털 좋은 점이  필름 분량을 생각하지 않고 마구 찍을 수 있다는 거다. 나중에 필요 없는 건 지우면 그만이고. 시간 순으로 저장되니 나중에 글을 쓸 때 도움이 많이 된다. 내 사진 2장이 다낭 전쟁박물관에 걸렸다고 누가 말해 줬다. 아마 베트남 진료단과 함께 간 참전군인 김영만 씨가 포로를 학살한 현장을 찾아 사죄한 사진과 2014년에 이정우 교수와 갔을 때 빈호아 학살 현장 무덤에서 무릎 꿇어 사죄하는 사진 일거다.

- 베트남, 쿠바 외에 다른 관심사는?

내 걸음이 마지막으로 가야하는 게 전태일 정신이다. 혁명의 보편사를 정리하기 위해 베트남과 쿠바에 가서 혁명의 시야를 넓혔다. 결국 우리 스스로를 알기 위함이다. 우리나라에는 정신적 지주가 없다고 했지만 사실 우리 세대에게는 전태일이 있다. 그리고 전태일을 기록해서 알린 조영래가 있다. 전태일이 대학생 친구를 그렇게 찾았었는데 전태일이 죽은 후에야 조영래가 전태일을 찾은 것이다. 우리 운동은 언제나 전태일, 조영래에게 돌아가야 한다. 내가 쿠바 전문 연구가도 아니고 쿠바를 내 나름대로 정리하고서는 전태일, 조영래에게 집중할 생각이다.

- 전태일에 집중할 때 다시 한 번 인터뷰 해야겠다. 늘 열심히 사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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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수종 2018-12-07 18:12:37
대단하시네요 건강하세요

김병무 2018-12-05 09:00:00
존경합니다.

이대윤 2018-12-01 14:55:17
고교선배이신 송원장님은 제가 고교동창산악회 총무같은 일을 할때 가끔나오신 선배로 선배로 알기시작하여 대구 김부겸선거로 환경운동단체 두목회 기타 진보운동의ㅈ소모임에서 적지않게 만났으나 개인적인 삶은 이기사로 처음 접했다. 앞으로 더자주 뵙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지와 연대 그리고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에 벽돌 한장놓으려 노력해봅니다. 선배님

전민용 2018-12-02 08:25:30
병원이 병을 만든다 는 찾아보니 이반 일리치네요 세월이 흘러 이것도 깜박했습니다

김영경 2018-12-01 08:30:33
응원하고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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