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쿠바 여행기 『왜 체 게바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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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쿠바 여행기 『왜 체 게바라인가?』
  • 송필경
  • 승인 2018.09.04 17:5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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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재인 케어’ 실현을 위하여…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대구·경북지부 송필경 원장(새날치과)이 지난 7월 3일부터 15일까지 12일 간, 쿠바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짧은 기간이지만 서강대학교 정치학과 손호철 전 교수가 전문가의 손길로 직접 짠 쿠바 혁명의 '알짜배기' 코스를 따라간 이야기를 담았다.

송필경 원장은 연재를 통해 쿠바 혁명으로 이룬 '무상의료'의 내용을 낱낱이 짚으며,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열악한 쿠바가 어떻게 더 나은 의료제도를 구축할 수 있었는지, 우리나라 의료체계의 체질 개선을 시도하는 '문재인케어'가 제대로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이론적 근거를 나름대로 분석해 보일 예정이다.

『나의 쿠바 여행기, 왜 체 게바라인가?』는 격주로 연재될 예정이다.

- 편집자

수 개념이 가장 일찍 발달한 옛 인도에서는 아주 많은 수를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 라고 했다. 인도 북부를 유유히 흐르는 갠지스 강은 길이가 약 2,500km라 한다. 그 긴 유역에 깔려 있는 모래알 수는 얼마나 될까? 모래 알 하나하나 모두를 셀 수 있을까?

나는 중요한 역사 인물이 남긴 의미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 만큼의 정보와 지식을 동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류의 스승인 붓다, 소크라테스, 공자, 예수 같은 분들의 위대한 삶과 역사에 남긴 교훈과 영향력을 파악하려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 분들이 태어났을 때 시대 환경, 자라면서 부딪힌 사회 문제, 의식이 성숙하는 과정, 사회 활동, 남기신 말씀, 사후 그 분들의 영향력을 추적하고 분석해서 삶 내용과 말씀 의미를 담아내려면 나 같은 평범한 개인의 노력으로는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를 세는 어려움보다 더 어려우리라.

또한 옛 인도에서는 정말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상상조차 힘든 많은 수를 이렇게 표현했다.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만큼 갠지스 강이 있다 치자. 그 모든 강의 모래알의 수는 얼마나 될까?"

여기서 모래 한 알은 인간이 사는 세상을 뜻했다. 옛 인도 사람은 우주의 크기를 나타내기 위하여 이런 표현을 썼다. 이는 요즘 발달한 우주 천문학에서 바라본 개념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한다. 지구가 빙빙 도는 태양계조차 은하계 속에서 보면 어마어마한 모래 더미 가운데 모래 한 알에 불과할 뿐이다. 태양계가 속한 은하계조차 전체 은하계에서는 모래더미 속에 한 알에 불과할 뿐이며,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은하계조차 우주의 시야에서 보면 모래더미 속에 모래 몇 알일 뿐이라고 한다.

위대한 스승을 따랐던 수많은 민중들이 수 천 년 동안 이룩한 역사 역시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은 강의 그 모든 모래알을 합한 수'만큼의 사실을 모아야 그 전모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2018년 7월 초 2주일 동안 쿠바 여행에서 세계사적 의미가 있는 세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왔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인류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이 분들이 역사에 끼친 영향을 알기 위해 쿠바에 다녀 온 시간은 마치 하루살이가 코끼리의 발톱에만 붙어 있다가 수명을 다한 것처럼 짧았다. 더구나 쿠바 혁명이 20세기 세계사란 우주에서 차지하는 크기를 과장해서 비유하자면 한 은하계를 차지한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거대한 코끼리 발톱에 붙은 하루살이가 코끼리 전체를 파악한다는 것은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를 세는 것만큼 무모하다는 생각이다. 내가 알아야 할 지식은 큰 덩치의 코끼리만한 양이라면 내가 지닌 지식은 눈에 보일까말까 하는 하루살이 정도의 크기이기 때문이다.

쿠바는 다른 중남미(라틴 아메리카) 나라와 다르게 원주민이 아예 사라진 슬픈 섬이다. 스페인 통치가 얼마나 잔혹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스페인 정복자는 원주민이 사라진 땅에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사람을 많이 끌고 와 노예로 삼았다. 이 후손들의 피를 이은 사람들과 스페인계 사람들이 지금 이 섬의 주인이다.

19세기에 들자 노예 생활을 하던 아프리카계 사람들은 물론 의식 있는 스페인계 사람들조차 가혹한 스페인 제국주의 착취 체제에 항거했다. 그 선봉에 섰던 사람이 19세기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깨어 있었고, 새로운 라틴 문학을 창조했고, 혁명 투쟁의 선봉에 섰던 호세 마르티(1853-1895)였다. 이 영웅은 자신이 이끈 혁명전쟁에서 전투를 시작하자마자 사망했다.

20세기에 들어오자, 세계사의 기류에 따라 초강대국으로 성장한 미국이 늙어 지친 스페인을 쫓아내고 라틴 아메리카에서 새로운 제국주의 맹주 자리를 차지했다. 미국은 스페인에게 뺏은 식민지에 민주주의라는 겉모습이 그럴듯한 정치체제를 이식했지만, 경제 착취는 스페인 제국과 다를 바 없는 미국 자본주의 기업이 담당했다.

20세기 쿠바 민중은 호세 마르티의 후예답게 라틴 아메리카에서 자본주의 착취에서 벗어나서  독립하려는 열정이 가장 뜨거웠다.

19세기 스페인 식민주의에 저항한 호세 마르티는 혁명의 거대한 봉우리에 오르는 길을 발견했다. 그 봉우리에서 혁명의 불을 밝히면 온 세상에 빛이 퍼지는 그런 우뚝한 봉우리였다. 1895년 호세 마르티가 혁명전쟁에서 사망한 곳은 자신은 몰랐지만 자신이 개척해서 발견하려고 했던 바로 그 거대한 봉우리였다. 봉우리 정상이 바로 자신의 무덤이었다.

반세기가 지난 20세기 중반, 젊은 후배들인 피델 카스트로(1926-2016)와 체 게바라(1928-1967)는 호세 마르티가 발견하고 묻혔던 그 봉우리를 찾아 갔다. 풍운아들은 그 정점에서부터 수많은 깊은 계곡을 만들었다. 자연 현상이 흔히 그렇듯 계곡 상류에는 작은 물줄기가 생기게 마련이다. 계곡들의 수많은 작은 물줄기들이 한데 모여 한 줄기 강을 이루어 평야를 관통했다. 봉우리에 폭우가 쏟아지자 수많은 계곡을 따라 흐른 물은 강으로 모여 거대한 물줄기를 만들어 미국이 통치하는 평야를 단숨에 휩쓸었다.

1959년 1월 1일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동지들은 독재자 바티스타가 황금 궤짝을 비행기에 싣고 도망쳐버린 수도 아바나에 당당히 들어갔다. 당시 아바나는 물론 농촌 구석구석까지 쿠바의 거의 모든 땅은 미국 마피아의 놀이터였고 미국 기업의 안마당이었다. 혁명 세력은 마피아의 놀이터와 기업의 안마당이 된 땅을 본래 주인인 쿠바 민중에게 되돌려 주겠다고 공언했다. 쿠바 혁명 세력이 만든 이 역사가 20세기에서 미국 제국주의를 완벽하게 패배시킨 첫 순간이다.

쿠바는 200여 년이 넘는 제국주의 타도 투쟁 역사에서 선각자 호세 마르티와 뒤를 이은 후배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라는 3명의 흔적이 뚜렷했다. 그 천재들이 활동하게끔 확고히 뒷받침한 힘은 쿠바 민중의 각성과 민중이 혁명세력에 보내준 믿음이었다.

1959년 1월 1일에 쿠바에서 미국의 괴뢰 정권인 바티스타 정권을 몰아낸 것은 미국이 강요한 자본주의 질서를 거부한 최초의 세계사적인 혁명이었다.

미국은 자신의 콧잔등에서 일어난 혁명을 폭동 반란이라 규정했다. 애송이 반란자를 즉시 진압할 듯이 온 힘을 집중했다. 미국인이라면 당연하다고 여기는 자유를 쿠바 혁명정부가 억압했다고 미국은 전 세계를 향해 외치며 혁명 체제를 가혹한 독재라고 맹비난했다.

그런 자세로 미국은 66년간 쿠바에 대해 경제 봉쇄와 군사 위협을 가했다. 미국의 태도는 2015년에 쿠바와 다시 수교할 때까지 초지일관이었다. 미국의 철저한 봉쇄와 어마한 위협 속에서도 쿠바는 ▲무상 교육 ▲무상 의료 ▲생태 유기 농업 확립이라는 놀라운 후속 혁명 과업을 달성했다.

비행기에서 본 쿠바 동쪽에 있는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이 산속에서 게릴라 투쟁 근거지를 련했다. 이 혁명의 성지는  우리 지리 산맥과 너무나 닮았다는 느낌이 일어났다. (ⓒ 송필경)

콜럼버스가 쿠바 땅을 처음 밟은 1492년부터 시작된 쿠바 역사, 가혹한 노예제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 혁명에 대한 각성 그리고 1959년 이후 성취한 혁명성과를 서술하려면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만큼의 갠지스 강 모두를 합한 모래알 수‘만큼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손에는 모래알을 세기 위해 모래를 담을 수 있는 도구라고는 작은 찻잔 숟가락 밖에 없다.

그럼에도 나는 돈키호테 같은 무모함으로 쿠바 혁명의 역사와 과정과 의의를 설명하겠다. 차 숟가락에 담긴 모래알을 세기도 힘든 능력으로 갠지스 강 모래알 수를 셀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을 많은 사람들이 가지는 게 당연하리라.

나는 지난 17년간 베트남 전쟁사(=혁명사)를 혼자서 공부했다. 내가 볼 수 있는 관련 서적이나 자료가 많이 부족하여 오랜 기간 많이 애를 먹었다. 그러나 쿠바에 대한 서적은 베트남에 비하면 아주 풍부했다. 관련 자료와 서적이 많다는 것은 모래알 수를 파악할 수 정교한 도구,  다시 말해 첨단 과학 장비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공위성은 갠지스강 전체 유역을 1cm 오차 없는 정밀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강 유역의 모래더미 면적을 계산할 수 있다. 이걸 고등 수학인 적분을 이용하여 총 모래 밭의 부피를 계산할 알 수 있을 것이다. 단위 부피당 모래알 수를 평균해서 전체 모래알의 수를 수학적으로 짐작 할 수 있다. 전문가의 도움을 이용한다면 내 혼자서 아예 불가능한 일도 그 전모를 나름대로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총량을 구하는 이런 물리적인 분석을 정량분석(定量分析;quantitative analysis)이라고 하고, 분석 대상의 내용을 밝히는 화학적인 분석을 정성분석(定性分析;qualitative analysis)이라 고 거칠게 정의를 해보자.

역사라는 사회과학 또는 인문학에서는 자료를 모은 뒤 ‘정성분석’이 꼭 필요하다고 본다. 요즘 인터넷을 보면 역사에 대한 관련 자료가 넘쳐난다. 뛰어난 전문가들도 많아 관련 서적도 풍부하다. 이런 자료와 서적의 내용을 일관한 시각으로 분석하는 역할이 역사를 평가하는 사람의 몫이 아닐까. 그렇지만 나는 역사가가 결코 아니다. 내 나름으로 역사를 요모조모 뜯어보는 평범한 취미가일 뿐이다.

자, 그럼 ‘왜 쿠바인가?’의 핵심은 무엇인가.

쿠바의 의료제도는 완벽한 예방제도와 완전 무상의료 제도를 구축했다. 1959년 쿠바 혁명 성공이후 미국이 쿠바에 가한 군사 위협은 끈질겼고 악마처럼 야비했다. 미국 CIA는 카스트로 암살을 수십 번 또는 그 이상 시도 했다. 1989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하여 경제 교류가 끊기자 소비에트 경제에 전적으로 의존했던 쿠바의 운명은 태풍 앞에 등불 신세였다.

그럼에도 쿠바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민중은 혁명의 등불을 몸으로 수많은 겹을 쌓아 태풍이 뚫고 들어올 틈을 주지 않았다. 혁명 세력은 민중의 복지를 위해 군사비 지출을 줄이면서까지 의료 정책 확대에 투자했다.

그 결과 2000년대 들어서부터는 가난한 나라 쿠바는 완벽한 무상의료제도를 실천하고 있다. 쿠바의 유아사망률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미국의 유아 사망률보다 낮다. 평균 수명은 미국과 비슷하다.

‘문재인 케어’는 보험 혜택을 늘려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덜어주려는 문재인 정부의 대표적인 복지 확대 정책이다. 의사협회에서는 이 ‘문재인 케어’를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보험을 확대하면 상대적으로 수가가 높은 비보험 진료비가 줄어들게 마련이다. 의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오랜 공부 기간과 공부에 투자한 비싼 비용을 생각하면 많은 의사들이 느낄 경제 불이익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문재인 케어를 실현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는 의사들의 경제 수준은 다른 직종보다는 높을 것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내가 아는 통계로는 우리나라 개업 의사의 평균 월수입은 1천3백만 원이라 한다. 쿠바 의사는 많아야 10만 원 정도다. 수입 비율이 130:1이다.

사회 조건을 비롯한 여러 가지를 고려하더라도 쿠바 의사의 수입은 우리와 비교가 안 된다. 그럼에도 의사로서 자부심은 오히려 우리와 비교할 수도 없이 강하다. 2008년 SBS에서 방영한 다큐 『맨발의 의사』는 쿠바의 의료 체계와 의료 교육제도 그리고 의사의 윤리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정말 귀감으로 삼아야 할 내용이었다.

우리 보다 훨씬 못사는 쿠바가 우리 보다 더 나은 의료체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호기심과 함께, 의료인의 한 사람으로써 ‘문재인 케어’가 실현할 수 있도록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어떤 의무감이 밀려 왔다.

그 호기심과 의무감이 하루살이에 불과한 나로 하여금 코끼리 전모를 밝히겠다는 무모함으로 이끌었다.

쿠바에서의 이동경로 (ⓒ 송필경)

 지난 7월 3일에서 7월 15일까지 쿠바 여행에서 내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많은 생각할 거리를 챙겼다. 미국 LA에서 하루, 멕시코에서 하루, 그리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약 이틀을 빼면 쿠바에서는 9일 밖에 머물지 못했다.

이 여행을 기획한 분은 서강대 정치학과에서 막 퇴임하신 손호철 교수님이셨다. 예전에 쿠바에 다녀오셨고, 라틴 아메리카 여러 정치 상황에 대해서도 전문가답게 지식을 축적하신 분이시다. 손 교수께서는 일반 여행객들을 위한 여행사 스케줄과는 다르게 계획을 짰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1955년 멕시코에서 우연인지 필연인지 어쨌든 만나자마자 의기투합했다. 쿠바 해방을 위해 1956년 12월 2일, 멕시코에서 작은 배 그란마호를 타고 쿠바 동쪽 시에라 마에스트로 산맥으로 들어가 게릴라 활동을 벌였다. 2년 조금 넘게 서쪽으로 세력을 넓히며 투쟁한 결과 1959년 1월 1일에 쿠바 서쪽에 있는 수도 아바나에 입성함으로써 혁명에 성공했다.

그 혁명의 길을 우리는 따라갔다. 먼저 비행기를 타고 서쪽 아바나에서 동쪽 산티아고로 날아갔다. 거기서부터 버스를 타고 천 수백km 되는 여러 도시에서 혁명의 흔적을 훑고는 아바나로 되돌아왔다.

비록 수박겉핥기에 불과한 턱도 없이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찌 보면 혁명의 핵심만 둘러 본 알짜배기 시간이었다.

쿠바 혁명 의의와 성과를 내 나름대로 다각적으로 보면서, 우리가 귀감으로 삼아야 할 의료제도에 대해 여러분에게 내 의견을 제시하겠다. 많은 조언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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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섭 2018-09-05 08:29:11
쿠바의 영혼
우린 지금 영혼이 있는 국가일까란 생각이 늘 저자에게 물어보곤 합니다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명진 2018-09-05 08:28:07
의(의료),식,주를 국가가 책임지는 세상
을 기대하며 쿠바를 다녀오신 고난의 행군 !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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