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피해자 그리고 실제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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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피해자 그리고 실제 피해자
  • 한국여성의전화 기자
  • 승인 2018.08.16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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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전화-사소하지 않은 이야기』 ⑰ 가정폭력 정당방위를 둘러싼 불편한 진실

 

본지는 한국 사회 최초로 폭력피해 여성을 위한 상담을 도입하고 쉼터를 개설한 한국여성의전화와 정기연재에 관한 협약을 맺고, 지난해 6월 16일부터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본 연재에서는 뿌리깊은 여성 차별과 폭력을 폭로하는 #미투운동을 '역사적 필연'으로 규정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의 시작, 그 이야기를 다뤄나갈 예정이다.

우리사회의 비폭력과 평등을 향한 이야기에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 주

 

살인의 무게

1990년대에 ‘여성의전화’가 구명운동을 펼치면서 가정폭력 가해자인 남편을 살해한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6년 3월 아내 구타 사위를 살해한 할머니 사건 등 비슷한 사건들이 같은 시기에 이슈화되었다. 약 30년이 지난 지금, 법원이 가정폭력 피해자의 가해자 살인사건을 정당방위로 인정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다. 즉, 달라진 것은 없다.

2018년 초 SBS의 시사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싶다>는 여자친구를 살해한 남성에게는 집행유예, 가정폭력에 수년간 시달리다 남편을 살해한 여성에게는 징역 4년을 선고한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문제를 제기했다. 두 사건을 통해 아직 한국사회는 가해자 그리고 남성에게 동조하는 시선을 견지하고 있고, 검찰, 경찰을 비롯한 사법시스템 역시 이에 맞춰 작동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상이 비슷한 두 사건의 판결이 이토록 달라지기까지, 어떤 불편한 진실이 작용했을까?

2010년 9월 9일 '외롭게 두어 미안해' 거리행진 (ⓒ한국여성의전화)

‘남편’을 살해한 ‘여성’

피해자-가해자가 친밀한 관계에 있을 때, 여성에 대한 폭력은 교묘하고 모호해진다. 실제 2013년 여성가족부의 가정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아내폭력 발생률은 50.8%로 매우 높은 수치를 기록했지만, 정작 피해를 본 여성의 신고율은 매우 낮았다. 피해여성은 ‘베개를 던지는 것’, ‘칼로 위협하는 것’, ‘팔을 거세게 잡는 것’ 등 다양한 형태의 심리적·신체적 폭력을 경험하지만 이를 가정폭력으로 ‘인식’하기도, 누군가에게 ‘알리기’도 쉽지 않다. 집안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가정폭력을 사적인 일로 여기고, 이 공간에 피해자인 여성을 위치시킬수록 남성 혹은 가해자는 유리한 입지를 점한다. 한국사회는 가정 내의 여성에게 ‘어머니’ 혹은 ‘아내’의 역할을 부여한다. 그리고 여성이 폭력의 피해자가 되었을 때 여성의 평소 행실과 역할 수행을 문제 삼으며, ‘진정한’ 피해자임을 증명할 것을 요구한다. 성역할과 피해자다움의 신화가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는 사회에서 아내가 남편을 ‘죽인다’는 것은 그동안 여성에게 요구되어 온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성규범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일로 여겨진다. 남성의 고통에 쉽게 분노하며, 비난의 화살을 쉽게 여성에게 돌리는 사회에서 피해여성들이 폭력에서 벗어나려 노력한 지난한 시간은 사라지고, 남편을 ‘살해’하기까지 수많은 폭력에 시달렸을 삶의 맥락들은 쉽게 삭제된다.

(ⓒ한국여성의전화)

죽거나 죽여야 끝나는 이야기

정당방위는 형법 제21조 제1항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행위는 상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벌하지 아니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또한 정당방위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형법적 개념으로 ‘정당방위 상황’과 ‘방위행위’가 있어야 하며, 상당성이 충족되어야 한다. 그리고 정당방위 상황은 침해가 진행 중이거나 급박한 상황일 경우에 인정된다.

이러한 구성요건을 살펴보았을 때 가정폭력 피해여성의 가해남편 살해는 정당방위로 인정되기 매우 어려운 조건에 있다. 여성단체를 비롯한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사건을 단순히 ‘살인사건’이 아닌 폭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필수적이고 절박한 행위로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법에서 명시한 대로 ‘공격당한 만큼만’ 방어한다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 역시 강조하였는데, 현실적으로 가해자가 변화하고 폭력이 사라지는 것은 매우 어렵고, 여성들은 길게는 평생 지속해서 피해를 보기 때문이다. 즉, 남편이 잠을 잘 때, 술에 취해 있을 때 등 급박하지 않은 상황에서 가해자를 제압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상황과 맥락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정당방위에 대한 법적규정이 신체 사이즈와 힘의 세기가 비슷한 남성들 간의 대치상황, 즉 남성의 경험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비판하면서, 여성행동의 합리성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법의 납작한 적용은 엄격한 법리적 해석이라는 이름에 가려져 피해 여성을 남편을 살해한 ‘범죄자’로 만들어왔다.

최소한의 보호막, 정당방위 인정

현행 가정폭력처벌법의 목적조항은 ‘가정보호와 회복’으로 설정되어 있다. 또한, 가해자의 상담참여를 조건으로 기소를 유예하는 ‘상담조건부 기소유예제도’도 존재한다. 목적조항을 보면 ‘사회에서 안전히 보호되어야 할 화목한 가정’의 가장을 ‘죽인’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시선을 짐작할 수 있다. 일반인 간의 성폭력 혹은 상해사건은 둘 사이의 회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가해자가 상담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기소가 유예되는 일도 없다. 이러한 양상은 가정폭력이 많은 통념과 착각 속에 둘러싸여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며, 가정폭력 가해자에게 많은 권력을 허용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듯 피해자의 목소리를 반영하지 못하는 제도들이 존속된다면 실질적으로 피해자를 구제하고, 삶의 맥락을 이해하는 태도를 견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가정폭력’의 관점에서 정당방위는 재구성되어야 한다. 직선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들을 해체하고, 피해자 구제에 대한 구체적 방안과 정당방위의 기준을 어떻게 제시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더 심각한 후속 폭력을 막기 위해서 폭력의 특수성을 인지하고 있는 전문가를 양성하고 제도적 보완을 해야 한다. 법의 모양은 화려하게 바뀌지만, 피해자를 위한 변화가 없는 악순환을 이제는 끝내야 할 때다.

※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을 위한 서명운동에 동참해주세요
   온라인서명 주소 ▶ bit.ly/가정폭력처벌법개정

글쓴이 희진 (한국여성의전화 8기 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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