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문학관’과 ‘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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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문학관’과 ‘토지’
  • 김다언
  • 승인 2018.08.03 10:5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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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언’s 문학 B급 살롱] 김다언 작가

2017년 김다언이란 필명으로 『목마와 숙녀, 그리고 박인환』이란 시 해설집을 펴내며 데뷔한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인천지부(공동회장 김영환 주재환) 이창호 회원. 그가 올해부터 1940년대~1960년대의 한국문학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를 본지에 ‘김다언’s 문학 B급 살롱’이란 코너를 통해 연재키로 했다. 여덟 번째 이야기에서는 이름만 들어도 '아…'하는 탄식을 자아내는 『토지』의 작가 박경리 문학관(館)을 따라, 박경리 선생의 문학관(觀)을 엿본 것 같은 필자의 솔직한 감상을 담았습니다.

편집자

여러 ‘박경리 문학관’ 중에서 원주에 있는 <박경리 문학의 집>을 처음으로 가봤다. 이곳은 박경리 선생이 1980년부터 1998년까지 토지 4,5부를 집필 완간한 집필실이자 텃밭을 일구며 살던 집이다. 박경리 선생의 손때가 묻어있는 곳으로 오랜 시간 원고지와 씨름했을 집필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잠시 숙연함을 느꼈었다.

두 번째로 간 <박경리 문학관>은 통영에 있는 곳이다. 통영은 작가 박경리가 나고 자란 고향이다. 통영에는 박경리 생가가 있고, 문학관은 바닷가 한적하고 경치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원주나 통영에 있는 문학관은 각각 문학공원, 기념관 등으로 이름이 조금씩 다르다. 혼동을 피하기 위한 목적이겠지만 일반 관람객 입장에선 명칭이 비슷비슷하고 돌아서면 잊어버리기 쉽고 대개 <박경리 문학관>으로만 기억된다.

<박경리 문학관>으로 검색하면 원주, 통영 지명이 앞에 붙어 있는 상태로 쉽게 찾을 수 있으며 토지문학관, 최참판댁 등이 추가로 검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박경리 선생은 우리나라에서 문학관, 기념관 등의 형태로 기념되는 곳이 많은 작가 중 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만해 한용운 선생님도 고향 충청도 홍성의 생가와 오랫동안 수도했던 백담사가 있는 강원도 인제의 문학관, 서울의 심우장 등 기념관이 많다. 한용운 선생님이 승려로 시인으로 애국지사로 많은 사회활동을 하며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것에 비하면 박경리 선생은 상대적으로 조용히 글만 쓰신 분인데도 기념관이 많고 다른 작가에 비해 이례적이라고 할 정도로 규모도 크다.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으나 『토지』라는 대작의 작가라는 것이 주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토지는 1969년 『현대문학』을 시작으로 여러 문학 잡지 신문 등에 연재되며 5부작으로 1994년에 완간된 대작이다. 나는 토지를 20대 후반에 읽기 시작해서 2부 중간쯤 읽다가 중단한 상태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포기한 상태나 다름없다. 사실 다시 읽을 엄두가 잘 나지를 않았다. 토지를 처음 접하면서 노벨문학상을 받은 펄벅의 『대지』와 이름도 비슷했고 『대지』를 감명 깊게 읽어서 내심 비교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동에 있는 <토지문학관>에서 한시 강좌를 들었다 (제공 = 이창호)

그러나 토지가 혼란스런 시대를 살아가던 다양한 등장인물의 삶의 애환을 통해 나의 시계를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로 되돌려 마치 가까이서 등장인물들과 호흡하는 감정을 느끼며 나는 『토지』라는 대작에 압도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토지』를 다 읽지 못했다. 당시 『토지』가 완간된 상태가 아니기도 했었지만 내가 책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책의 내용에 일제강점기 만주를 배경으로 활동하던 인물 중 일본 경찰의 앞잡이가 나오는데, 그는 천민의 자식으로 가난과 멸시 속에 자란 인물이다. 그가 일본의 앞잡이고 매국노라는 말에 대꾸한다. “나라가 양반과 상놈으로 나뉘고 군림하던 양반은 나라를 말아먹고 이제 독립을 운운하며 애국지사인양 떠드는데, 나는 천민으로 태어나 괄시 받으며 짐승처럼 살아왔다. 천민인 나를 일본은 대접해주며 살만하게 해주는데 왜 나더러 과거로 돌아가라고 요구하지!” 대략 이런 취지의 말이었다고 기억한다.

애국은 당연하고 친일파는 나쁘다! 이것은 나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명제였다. 그러나 천민출신 친일밀정의 항변을 마주하며 순간 나는 당황했고 혼란스러움을 쉽게 극복하지 못했다. 국가라는 것에 대해서 차근차근 다시 생각해보게 됐고 내 생각이 아직 많이 어리다는 것을 실감했다. 작가는 작품 속에 작가 스스로의 고민과 수많은 시사점을 심어놓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책장을 쉽게 넘기지 못하고 페이지마다 번민했다. 곱씹으며 생각만 하면 좋았으련만 고민하면서 꼴짝꼴짝 술을 마셨다. 나중엔 고민이 돼서 마시는지 술을 마시려고 책을 잡는지 모를 지경이 되고야말았다. 결국 몸이 견디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이후로 책을 다시 잡는 것을 두려워하고 『토지』를 다 읽은 사람을 보면 사뭇 존경스러운 마음조차 갖게 됐다.

책은 다 읽지 못했지만 몇 년의 간격을 두고 원주와 통영의 문학관을 다녀오고, 올 초여름 『토지』의 배경이 되는 하동의 최참판댁까지 방문해서 기념관은 모두 방문하는 끈기를 발휘해 그나마 조금은 자존심을 세우게 돼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박경리 선생의 작품을 읽었거나 읽을 분들에게 짧지만 좋은 글을 소개한다.

박경리 선생이 1956년 8월 『현대문학』에 추천작이 실리면서 쓴 소감문이 있다. 문학사상 1975년 8월호에서 특집으로 중견 작가들의 신춘문예 등단 소감 글과 문예지 추천작 소감 글을 묶었는데 여기에 박경리 선생의 오래전 글이 실렸다. 쉽게 말해서 유명작가 새내기 시절의 글로 싱그러움과 작가로서의 방향과 고뇌를 조금 엿볼 수 있고 두 번씩은 쓰지 않는 귀한 글이다.

추천완료소감을 쓰려고 펜을 들고 보니 소설을 쓰는 일보다 퍽 어려운 일같이 느껴집니다. 길게 늘어놓았던 것을 압축하고, 그런데도 씨앗이 차 있어야 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마음에는 항상 간절하면서 부끄럼 때문에 인사를 잘 못하는 버릇입니다.
건방지지 않으려고 생각합니다. 건방지게 되면 자연히 공부를 게을리할 것 같습니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명심합니다. 모사(模寫)군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공부는 책 속에도 있고 생활 속에도 있는 것 같으니 책장을 뒤지고 생활을 들춰 볼 작정입니다.
나는 아직 세계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살면서도 모르는 것, 이것이 세계일진대 모르면서도 살아나가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모르는 걸 알고자 하고 가졌던 것을 잃지 않으려는 것이 사람의 버릇인 것도 같아서 나도 나를 버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웠고 싫었던 나였지만 미웁고 싫은 그대로 나를 적어 보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학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문학의 세계에 있어 벗도 스승도 없는 나는 서투른 그림장이가 자화상을 그리듯이 그저 나를 그려 본 것이 소설 같은 얘기를 쓰게 된 시초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나에게 소설을 쓰게끔 타이르고 가르쳐 주신 선생님의 간곡한 지도를 잊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도 배워야 하겠고 또 배우는 대로 써봐야 할 나는 어디까지나 인생과 문학에 겸허하려고 합니다.

 

김다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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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kj 2018-08-11 14:05:46
오랜 기억이시다보니. 그 밀정은 김거복. 만주에선 김두수로 활동하는데. 천민은 아니고. 무반의 자식입니다. 아버지가 최치수의 죽음에 공모하여 탄로가 나며 처형을 당하고. 어머니는 중인 출신으로 가난하지만 길쌈해가며 체면을 지키려하나. 끝내 그 사건으로 목매어 줏습니다. 거복은 아비의 성품을. 동생 한복이는 어미의 성품을. 어릴때 헤어져 잊고살다가 만주에서 조우하게되는데. 그것이 한복이가 독립군자금을 만주에 전달하게되는데 등잔밑이 어두움을 이용한 계책이었습니다. 저도 아직은 절반쯤 따라가는중입니다.

파랑새 2018-08-04 17:55:25
작가님,좋은글 감사합니다.
토지는 꼭 읽어보려했는데,,이게 웬일입니까?
아직 책꽂이에 사다놓은 1권이 먼지만 먹고있네요.
부끄럽습니다.
문단에 등단소감글을 이렇게 직접읽어보니
언제나 문학과 인생에 겸허하려고 하셨던 고백이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귓가에 생생히 울리는 느낌이 전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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