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 ‘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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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 ‘김진’
  • 신순희
  • 승인 2018.07.31 12:4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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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중국거주위안부후원회 신순희 회원

오래전 그때, 중국거주위안부후원회 후원회비가 한 달에 3만원이었다.
그 3만원을 내고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다.
얼마 전 아들과 영화 ‘허스토리’를 보면서
“엄마도 한때 저 분들을 후원했던 적이 있는 사람이야”라며 자랑도 했고,
무엇보다 김진 교수와의 인연을 얻었다.
제자도 아니고 그 어떤 이해관계도 없는 내게 그는 ‘어쩐지 의지가 되는 사람’이다.
연구실에 찾아갈 때마다 직접 차를 우려내어 따라주던 그 격식 없이 따끈한 찻잔의 온도만큼 그의 곁에 있으면 늘 속이 따끈하고 편안했다.

물론 아주 가끔은 고집도 세보이고, 투덜거리듯 힘든 내색도 스스럼없이 했다.
2014년 여름 스리랑카 고산지대의 차 농장에서였다.
“오늘은 좀 일찍 끝내고 내려갑시다.”
며칠째 날이 더웠고 스리랑카는 더 더워서 진료팀 모두 진이 빠져있었다.
그때도 이미 환갑이 지난 나이였던 김진 역시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지
진료시간을 한 시간이나 남겨두고 일찍 내려가자 재촉했다.
나는 속으로 ‘진료단 총대장이 저래도 되나?’ 싶었다.
힘들어 하는 모습, 힘든 걸 내색하는 모습, 심지어 진료시간을 단축하자 하는 건 내가 기대하는 대장의 모습이 아니어서 조금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그 다음 날에도, 그 다음 해에도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 고산지대를 올랐고
모두가 관심을 가질 때나 모두의 관심이 식었을 때나
여전히 스리랑카 고산지대에 홀로 서 있는 사람은 바로 ‘김진’이었다.
스리랑카에, 말레이시아에, 중국에
자신을 필요로 하는 그 모든 곳에 늘 그렇게 있었다.
어느 날 문득 뒤돌아봐도 역시 그곳에 있었다.
힘들 땐 힘든 내색을 건강하게 내보일 정도의 단단함으로
연구를 하고, 제자를 기르고, 연구소를 꾸리고,
건치대표를 맡고, 여성치과의사회를 이끌고, 중국거주 위안부할머니 후원회를 이끌고,
참선을 하고, 요가를 하고, 경전공부, 마음공부를 하고,
구강병소에 관한 지인들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 책까지 쓰면서 말이다.

그 많은 자리에 그가 있어줘서 참 좋았다. 다행스럽고 고마웠다.
단단하면서도 딱딱하지 않게
반짝이면서도 너무 눈부시지 않게
등대처럼 북극성처럼 빛나줘서 든든했고 큰 의지가 됐다.

스마일 스리랑카 2014 힐링캠프에서

그런 김진의 정년퇴임을 맞아
그 어떤 선물도 사양하는 그에게 ‘어울리는’ 선물을 하고 싶다.
주머니에서 다시 3만원을 꺼내어 쌀 10kg짜리 한 포대를 사들고
그가 후원하는 장애아동 보호시설에 그의 은퇴를 기념하는 ‘쌀보시’ 기부를 하고 싶다.
마치 아이돌 스타의 팬클럽들처럼 말이다.
한 포대, 한 포대 모아져 여러 포대가 된다면 더 좋겠다.
좋은 녀석들은 다 떠나버리고 아름다움이 점점 사라져 가는 삭막한 시대에
이 기회를 틈타 향기로운 추억을 다시 한 번 만들어보고 싶다.
전형성을 전복한 비전형성의 아름다움을 한껏 흠모해보고 싶다.

 

신순희 (중국위안부후원회·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 회원, 김진 교수 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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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울타리 2018-08-01 15:35:20
아, 메인에 있던 그 분이 이런 분이셨군요!
잠시 동안 섣부른 판단을 했던 내가 부끄럽군요.
또한 동남아- 하면 싼맛에 다니는 여행지- 정도로 생각했던 천박함이 ㅋㅋ

따뜻한 글 잘읽었습니다.

거 참, 이 거...말을 잃었습니다...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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