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연기(緣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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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연기(緣起)
  • 송필경
  • 승인 2018.02.19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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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 송필경 논설위원

민족해방전선의 ‘설날대공세’·‘68 운동’·‘촛불 집회’·‘촛불 탄핵’

2016년 말에서 2017년 초까지의 ‘촛불 탄핵’은 밀실에서 소통을 거부하고 권위만 앞세운 완고하고 어처구니없는 대통령을 내쫓았다. ‘후하고 불면 꺼질’ 촛불을 초등학생까지 들고 집회와 시위를 하여 대통령을 감옥에 보낸 사건을 ‘혁명’이라고 못 부를 이유는 없다. 피의 희생이 없었던 권력 타도는 세계사에도 그 유례를 쉽게 찾을 수 없는 새로운 상상력의 결과였다. 어떻게 그런 독특한 사건이 가능했는가?

“혁명이든 화산이든 아무런 까닭 없이, 또한 아무런 과정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폭발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눈에는 놀랍도록 갑작스런 사태로 보일지 모르나, 대지의 밑바닥에서는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힘이 서로 작용하고 많은 화력이 한데 모여 지각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화산은 거대한 화염을 하늘 높이 뿜어 올리고, 용암은 산허리를 따라 흘러내린다” 1932년, 네루가 감옥에서 15세 딸 간디에게 쓴 편지에 있는 구절이다.

역사의 무대에서 인간이 연출한 행위는 사상, 감정, 편견, 미신 그리고 희망과 절망이 결합해서 나타난 결과다. 원인을 알지 못하고 행위 자체만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방금 우리가 경험한 촛불 혁명도 마찬가지다.

2008년에 광우병 논란이 있던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정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하자, 국민들은 값싼 것보다 안전한 쇠고기를 원하며 미국과 쇠고기 수입 재협상을 요구했다. 정부는 ‘재협상 불가’를 내세우며 국민의 요구를 묵살했다. 그러자 먼저 학생들이 촛불을 들고 청계천 주위에 모여 들었다. 여기에 시민들이 합세하여 정치 사안 해결을 정당에 의지하지 않고, 거리에서 모인 사람들끼리 민주주의 가치에 대해 토론했다. 시민들과 학생들은 친미 언론을 비판하고 정부와 경찰의 권위적 태도에 촛불을 들고 비폭력 저항을 했다.

청와대로 향하는 시위대를 막기 위해 정부가 광화문 앞에 ‘명박산성’을 쌓자 여고생들은 “집 앞이야 얼른 나와! 소통 좀 하자! 누나 무서운 사람 아니야!”라고 우스개를 쏟았다.
물대포로 시위대를 해산하려 하자, “물 뿌리지 마! 어렵게 장만한 옷이야! 세탁비 청구한다.”로 경찰 진압에 익살을 떨었다.
수구 언론과 정부는 이 시위에 배후가 있다고 단정하자, “우리 배후는 양초 공장”이라고 재치로 맞받아쳤다.

2008년 촛불 집회는 당시에는 아무 소득이 없이 끝났지만, 위대한 ‘촛불 탄핵’의 밑 그름이었음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운동의 양상에 있어서 ‘68운동’을 연상하게 했다. 

억압적인 모든 권위에 대한 부정 ‘68운동’

정치 체제 변혁보다도 기득권의 의식 전환을 요구한 1968년의 전 세계적인 움직임을 ‘68운동(혹은 혁명)’이라 한다. 올해가 50주년이다.

68운동의 성격을 프랑스 대혁명이나 우리의 4.19 혁명처럼 뭐라고 딱 꼬집어 이야기 하기는 당혹스럽다. 인간의 보편적인 주제들을 미국, 유럽, 아시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에서 동시에 쏟아내며 갖가지 불만을 분출한 것은 인류사에서 처음이었다. 그 보편적인 주제는 억압적인 모든 권위에 대한 부정이고, 대신에 기존 권력과 질서에 창의성과 상상력을 불어넣자는 구호를 내걸었다. 남성이 여성에게, 교수가 학생에게, 정치인이 국민에게, 백인이 유색인에게, 강대국이 약소국에게 강요한 질서 그리고 억압과 차별에 대한 저항이었다.

68운동에서 학생들은 전체주의와 전쟁에 반대했다. 또한 소비사회를 비판하고 욕망의 해방을 주장했고, 특히 낡은 세계에서 소외했던 흑인과 여성, 사회적 소수자의 권익을 위해 노력했다. 68운동은 이러한 주장을 새로운 개념과 상상력을 통해 생생하게 제시한 말과 구호의 혁명이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역사 의미를 지닌다.

격렬한 시위도 있었지만 우스개와 익살과 반짝이는 재치가 운동을 이끌었다. ‘불손하고 파렴치하다는 것은 새로운 혁명이다’, ‘바리게이트는 거리를 차단하지만 길을 연다’, ‘파괴의 열정은 창조의 희열이다’, ‘혁명적 사고란 없다. 오직 혁명적 행동만 있을 뿐이다’,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경찰을 없애야 한다’, ‘우리가 파괴하지 않는 한 폐허는 남아 있을 것이다’

노동운동에 있어서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를 ‘만국의 노동자여 즐겨라!’로 바꾸면서 구속과 터부에 저항하며 성해방을 외쳤다. 여성운동에 있어서는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란 구호를 외치며 여성 차별을 사회 정치적인 차원에서 비판하고, 여성들의 성에 대한 죄의식을 없애는 것으로 연결했다.

프랑스에서 68운동을 이끌었던 다니엘 콘 벤디트는 이렇게 물었다. “학교와 직장에서 자율과 민주주의를 꿈꾼 것이 우리 죄인가? 여성과 남성이 자유로이 자기 몸에 대해 결정할 수 있고, 여성들이 낙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세상을 만든 것이 우리의 죄냐?”
그 말과 구호는 공허한 메아리로 그치지 않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함으로써 이후 사회 운동의 방향을 제시했다.

68운동의 발단은 1968년 3월 22일 낭테르 대학의 소요사태였다. 그 전날 프랑스 대학생 8명이 미국의 베트남 침공에 항의하여 아메리카 익스프레스 사무실을 습격하고 미국 국기를 불태웠다가 체포됐다. 미국의 명분 없는 베트남전쟁은 학생들의 정치의식을 한껏 민감하게 했다.

미국에서는 베트남전쟁 반대와 흑인 민권 운동이 운동의 핵심주제였으며, 체코, 유고, 폴란드에서는 스탈린의 권위주의 체제와 이에 동조한 좌파 정권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일본의 전공투(전국학생공동투쟁위원회)는 대학생의 권리 회복을 위한 투쟁에서 점차 베트남 전쟁 반대 투쟁으로 노선을 바꾸기 시작했다.

'설날대공세'에서 영감 얻은 ‘68운동’

68운동에서 모든 권위에 과감하게 도전케 한 용기는 1968년의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설날대공세에서 영감을 얻은 결과다. 미국은 베트남전쟁 3년 동안 당시 우리나라 예산 100년 치도 훨씬 넘는 천문학적 전쟁 비용과 52만이라는 대군을 파병했음에도 전쟁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 미군 총사령관 웨스트 모얼랜드는 ‘터널 끝에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터무니없는 거짓으로 미국 언론과 정부에 전비와 병력 증강을 요청했다.

미국이 이렇게 조바심을 내자 북베트남 총사령관 보 응웬 잡 장군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과 함께 베트남 최대 명절인 설날을 기해 남베트남 미군기지 전역을 공격했다. 미군의 반격으로 미군보다 10배가 넘는 사상자를 내고 공격은 완전 실패했다. 단 하나의 소득은 베트콩 19명이 설날 새벽 3시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을 점령했다. 날이 밝자 미군은 헬기를 동원한 공격으로 베트콩 전원을 사살하고 오전 9시에 대사관을 탈환했다.

탈환 과정이 TV 생방송으로 미국 전역에 방영되자 미 국민은 경악을 했다. 미국은 단 한 번도 자기 영토를 점령당하지 않았다. 미국은 재외 대사관을 자신의 영토라 생각했다. 베트콩의 대사관 점령을 자신의 영토 점령으로 생각했다. 비로소 미 국민들은 비루하다고 생각한 게릴라들의 강인한 실체와 베트남전쟁의 실상을 확인했다.

반전 운동이 불을 뿜었다. 워싱턴 광장에서는 봅 딜런, 존 바에즈 같은 대중 가수들이 리드하는 반전운동의 메아리가 장엄하게 울렸다. 그리하여 베트남 반전운동은 미국만 아니고, 세계 여러 나라들이 전개했으며, 국제적인 연대로 발전했다.

“우리는 왜 투쟁하는가? 외국의 침략자와 사이공의 압제자들이 우리를 억압하고 착취하기 때문이다” 설날대공세에 나선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전사들의 외침은 전 세계 양심인들과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하여 1968년에 ‘68운동’이 전 세계로 번졌다.

한 사건의 원인을 알지 못하고 행위 자체만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한 원인이 결과를 낳고 그 결과가 다시 한 원인이 된다는 사유 방식을 연기(緣起)라 한다. ‘68운동’의 발단은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했다. 다시 말해 베트남전쟁의 진정한 의미는 서양이 왜곡한 동양에 대한 인식을 바로 잡은 동시에 동양을 왜곡한 주체인 서양 자신에게 반성을 촉구한 계기였다.

(ⓒ송필경)

인류 보편사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의 ‘촛불 탄핵’도 억압적 권위에 저항한 ‘68운동’이란 세계사적 경험과 무관하다 할 수 없을 것이고, 억압적 권위를 실제 타도한 점에서 세계사에 남을 빛나는 쾌거라 할 수 있다. 연기적으로 보면 ‘촛불 탄핵’과 베트남의 ‘설날대공세’는 원인과 결과의 인연을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주 가난했던 베트남은 자신들보다 1,000배 이상 강한 미국이 억압을 하려 하자 한 치 물러섬이 없이 저항했다. 설날대공세를 통해 ‘인간의 정신은 인간이 지닌 무기보다 강하다’는 호찌민 주석의 신념을 확인했다. 이 신념은 자신들을 억압했던 서양의 제국주의 행태를 반성하게 했다.

독일 시인 브레히트의 시는 아직 미국의 패권주의에 시달리는 한반도에 교훈하는 바가 크다고 나는 생각한다.

“학대 받고 낙담한 사람들이
머리를 치켜들고
지금까지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압제자들의 힘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될 때
가장 훌륭한 의심이 생겨난다”

**
이 글을 다 쓴 시각이 50년 전 설날대공세를 취한 바로 설날 새벽이다.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1968년 ‘설날대공세’ 의미를 서술하려면 웬만한 책 한 권으로 양이 차지 않는다. 나는 경외의 시선으로 미국의 억압에 저항한 이 사건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있다. 분단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가 촛불 탄핵에 성공했기에 나는 그나마 위안을 받는다.

이 글을 다 읽어 주신 분들, 정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글은 본지의 논조와 다를 수 있음을 알립니다. (편집자)

 

송필경 (수원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새날치과,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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