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말감 전쟁(1835-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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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말감 전쟁(1835-1850)
  • 강신익
  • 승인 2004.0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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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 치료에 아말감이 사용되었다는 기록은 7세기경 중국에서 발간된 의서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유럽에서 아말감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19세기 들어서였다. 현재 아말감은 가장 보편적인 충전 재료로 인정되고 있지만, 이것이 안전한 치료법으로 인정되기까지는 엄청난 윤리적 소용돌이를 통과해야만 했다.

이 재료를 치과임상에 사용하기 시작한 사람은 크로코(Crawcours)형제로 알려진 떠돌이 치과의사들이었다.
그들은 유럽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미국에 진출해 선정적인 광고를 통해 많은 고객을 끌어들인다. 그러자 그들의 상업적 성공에 자극된 많은 치과의사들이 그들의 시술법을 모방한다.

하지만 그들의 시술법은, 은화를 갈아서 수은과 혼합하며 많은 양의 수은을 아무런 보호조치 없이 사용하는 매우 조잡한 수준의 것이었다. 이 시술법의 위험성을 알고 있던 교육받은 소수의 치과의사들은 뉴욕치과의사회(Society of Surgeon Dentists of the City and State of New York)를 결성하고 아말감 반대운동을 전개한다.

그들은 모든 회원들에게 이 재료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도록 요구한다. 이에 따라 크로코 형제는 미국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이 값싸고 간편한 치료법을 배운 많은 치과의사들은 여전히 아말감을 사용했다. 1839년에는 미국치과의사회(ASDS: American Society of Dental Surgeons)가 결성되어 학식과 기술을 겸비한 도덕적인 치과의사와 파렴치하고 비윤리적인 돌팔이 치과의사를 구분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아말감 반대를 주요 의제로 설정한다.

1846년에는 아말감을 사용하는 회원을 적발해 제명하는 조치를 취한다. 그러나 많은 수의 치과의사들은 여전히 이처럼 간편하고 저렴한 치료법을 포기하지 않았고, 어떤 사람은 오히려 이 치료법을 적극 받아들여 금니를 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더 윤리적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격렬한 내분에 휩싸인 ASDS는 1850년에 아말감 반대 입장을 공식 철회하고 아말감 전쟁은 막을 내린다. 아말감전쟁의 여파로 최초의 치과의사단체 ASDS는 1856년 정족수 미달로 총회를 열 수 없어 해산하고 만다.

1895년 블랙(G.V. Black)이 새로운 아말감을 개발함으로써 이제 아말감은 가장 보편적인 치과치료술식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20세기 말에 이르면 또다시 아말감 유해논쟁의 불이 붙는다. 이번에는 입장이 완전히 뒤집혀서 미국치과의사회(ADA)는 아말감의 열렬한 옹호자가 되고 일부 치과의사들과 생태론자들이 그 반대편에 서게 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치과의사회의 공식 입장과는 달리, 많은 치과의사들이 아말감의 유해성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 같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하여 잘 기능하고 있는 아말감을 제거하고 합성수지나 금으로 대체하는 치과의사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유해성에 대한 과학적 근거는 매우 불충분하다. 합성수지의 유해성에 관한 논란은 이제 비로소 시작 단계에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의 치과의사가 전문직의 지위를 지키려면 이 사안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는 너무도 분명하다. 전문직은 자신들의 소관분야에 관한 전문적 지식을 공유하며 공중의 이익을 자신들의 이익에 우선해서 생각하기 때문에, 거기에 합당한 대우와 존경을 받는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며 대중의 정서이다.

따라서 윤리적 치과의사라면, 아말감의 유해 여부에 관해 과학적 사실에 근거한 소신을 가져야 할 것이며, 기존의 아말감 충전물을 제거하기 전에 그 행위가 과연 환자의 이익에 부합하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만 할 것이다.

강신익(인제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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