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를 다시 펼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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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를 다시 펼치며
  • 송필경
  • 승인 2014.12.22 11:03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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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송필경 논설위원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는 속담이 이젠 일상이다. 굵직한 뉴스마다 상식적인 판단으로는 ‘설마’ 하는 의외의 일이 다반사다.

이 정권의 출발 전부터 비정상적인 사건이 불거졌다. 설마 정보기관이 선거에 개입했겠느냐, 설마 저런 철면피 인사가 요직을 맡겠느냐는 하는 의구심이 현실로 나타났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설마에 많은 아우성이 있었지만, 권력이 이에 대해 해명 없이 시간을 질질 끌면서 여론을 묵살했다.

‘시간은 이성보다 더 많은 개종자를 만든다’는 토머스 페인의 말을 우리 권력은 잘 활용했다. 이는 그른 것이 습관으로 굳어지면 나중에는 그른 것을 생각 없이 옳다고 믿는 인간의 속성 때문이리라. 설마 하는 사이에 권력은 참사에 대한 원인 규명도 하지 않은 세월호의 재앙을 망각의 늪에 빠뜨리고 있다.

지금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다. 왕조 시대가 끝난 지 한 세기가 넘었다. 그런데도 권력은 스스로 ‘지고의 존엄’이라 우기며 왕조 시대 언어와 사고방식을 폭력적으로 남용하며 민주주의 윤리와 상식인 ‘사상의 자유’를 파괴한다. 그리하여 권력이 사슴을 보고 말이라 하면 언론이 고스란히 받아 적어 사회의 언어가 되는 왕조 시대가 되었다.

2014 12월 19일, 조선 시대에나 있을 법한 설마 같은 ‘사화(士禍)’가 기어코 터졌다.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이다. 나는 이를 21세기 ‘갑오사화’라 규정하고 싶다. 사화란 왕조 시대에 권력을 잡거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다른 생각을 가진 자에게 가한 무자비한 처형이었다.

 

사화의 일종인, 17세기 숙종 시대 환국(換局)의 주역이었던 송시열(1607-1689)은 ‘풀을 제거하려면 반드시 뿌리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편협한 송시열은 후배였지만 한 때 지극히 존경했던 정치적 숙적인 윤휴(1617-1680)를 사문난적(斯文亂賊: 교리에 어긋난 언행으로 유교 질서를 어지럽힌 사람-당시의 국가보안법사범)으로 몰아 그의 사상을 탄압하고 처형했다.

18세기 프랑스 대표 지성인인 볼테르(1694-1778)와 루소(1712-1778)의 주장은 서로 매우 달랐다. 부유한 보수주의자 볼테르는 이성을 신뢰했고, 가난하게 자란 루소는 급진 과격 주장을 하며 행동을 원했다. 그래서 볼테르는 루소를 “보시는 것처럼, 원숭이가 인간과 비슷하다는 의미에서, 루소는 철학자와 비슷하오”라고 비꼬았다. 루소를 요즈음 용어로 극좌과격주의자로 보았다. 그러나 스위스 정부가 루소의 저서를 불태우자, 볼테르는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 않지만, 그 말을 하는 당신의 권리는 죽을 때까지 옹호하리라”고 외치며 스위스 당국에 도전했다.

1971년에 뉴욕타임즈가 베트남전쟁 발발은 미국방성이 조작했다는 기밀문서를 폭로하려 하자, 국방성은 국익을 앞세워 언론 보도를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미국 연방 대법원은 수정 헌법1조의 정신에 따라 국익이 아무리 손상 받더라도 언론의 자유를 지켜야 한다고 판결했다.

대한민국 헌법재판관 9명은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을 제외한 최고위층이며 최고의 지식 엘리트다. ‘통합진보당해산심판’을 보면서 설마 이런 분들이 고리타분한 17세기 왕조시대 사고로 판결하겠느냐는 안일한 생각을 했다. 그러나 설마가 사람 잡았다.

헌법 재판관은 21세기 지식인이다. 그러나 그 중 8명은 18세기 지성인인 루소에 대한 볼테르의 ‘사상의 자유’라는 가치를 외면했다. 대한민국이 하늘처럼 떠받드는 미국, 그 미국의 가치인 수정 헌법 1조 정신까지 외면했다. 8명의 머리에는 인류 보편적인 가치는 없고 17세기 당쟁의 찌꺼기인 사문난적 같은 시대착오적인 사고만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이번 판결에서 보였다.

직위가 아무리 높고,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그 직위와 지식에 걸 맞는 고귀한 기품과 위엄이 없으면 시장 바닥의 장삼이사에 불과하다는 것을 헌법재판관 8명이 증명했다. 고리타분한 위선, 자기 배반적인 거짓투성이 지식, 최고 권력에 스스럼없이 무릎 꿇는 비겁함이 21세기 대한민국 최고 지위의 지식인 모습이었다.

『숙종실록: 3년 12월19일』에 실린 윤휴의 절규다. 이렇게 생각해서 처형당했다. 21세기 우리 상황이 17세기와 어찌 비슷하지 않은가.

“가혹한 정치에 얼굴 찡그리고 가슴 치는 괴로움과,
놀고먹는 선비나 운 좋은 백성들이 부역을 피하여 편하게 지내는 자의 투정 가운데,
어느 쪽이 원망이 더 크겠습니까?
어느 쪽이 명분 있는 것입니까?
어느 쪽이 진정 백성의 원망입니까?”

지난 12월 19일, 헌법재판소의 사상의 자유를 말살한 설마 같은 판결을 듣자 자연스레 93세에 쩌렁한 사자후를 울린 스테판 에셀의 책 『분노하라』를 다시 펼쳤다.

“저항의 기본 동기는 분노다.”
“젊은이들은 ‘분노할 의무’가 있다”
“저항하면서 새로운 창조를 꿈꿀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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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사화 2014-12-22 14:01:22
장사꾼은 그래도 고객눈치보는 습관이라도 있었는데,
공주님은 노예들따위 전혀 안중에도 없으신 듯.
언제쯤 왕정이 가고 공화제가 다시 도래할까요...

갑오사화 2014-12-22 13:51:23
김이수 재판관의 기각문 못지않은 명문입니다.
속이 시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최고권력 내부의 정상인 비율이 9분의 1뿐이어도 우리에게 희망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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