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민용의 북카페 -98]생각의 바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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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의 북카페 -98]생각의 바다에서~~~
  • 전민용
  • 승인 2014.06.09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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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김우창, 돌베개

 

 
‘한국 지성계에서 가장 장중한 아우라를 거느린 사상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학자’, ‘한국이 낳은 세계적 석학’, ‘보편적 인문주의의 거장’….

김우창을 설명하는 문장들이다. 이런 찬사를 받는 사람의 생각을 안 들여다 볼 수 없었다. 이 책은 성공이나 행복을 위한 자기 개발서나 무의식적 억압을 깨고 진짜 자신을 찾아 즐겁고 행복하게 살자는 심리학 책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에 비해 매우 불완전한 상태로 태어난다는 것은 상식이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비로소 완성되어가는 존재인 것이다. 육체와 정신의 성장은 부모를 포함한 사람들, 넓게는 사회의 도움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사회의 도움이 쌓인 것이 문화의 전통이고 보통 교육을 통해 전달된다.

이런 성장의 상당 부분은 일정하게 주어진 틀에 따라 저절로 이루어지지만 개체적이고 독립적으로 형성되는 부분도 있다. 더구나 사람은 어른이 되고 성장이 끝난 후에도 끊임없이 달라져가는 존재이다.

이런 인간의 특징을 들어 저자는 인간을 일생에 걸쳐 스스로를 형성해가는 존재라고 정의한다. 저자는 ‘자기 형성’에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 개인, 사회, 자연에 대한 생각을 전개하기 위해 동서양을 넘나들며 역사적 인물들의 생각과 경험을 소개한다.

그런데 자기 형성의 마지막은 이런 누군가의 도움을 넘어 알 수 없는 낯선 바다에서 홀로 항해하는 기이한 노정이 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책의 제목이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인 이유일 것이다.

생물학적이고 사회적인 존재로서 사람은 주어진 본능과 충동과 욕망 그리고 내적인 소망에 따라 사회가 다져놓은 삶의 길을 따라 간다. 삶을 배우는 것은 대체로 사회화의 과정과 일치하고, 자기 형성의 과정도 일차적으로는 사회화의 과정이다. 생물학적인 것들은 반드시 사회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그것도 사회와 역사와 문화에 의해 형성된 형태로 사람의 삶에 내재한다는 것이다.

교육이 대표적인 사회화의 수단이지만 교육은 대체로 자기 형성보다는 별로 반성되지 않는 정형화를 지향한다. 보통 교육은 개인과 가족에게는 입신양명이나 부귀영화가 주된 동기가 되고 사회적으로는 이것이 공익과 대의에 봉사한다는 명분을 제공한다.

결국 개인의 성장, 이익, 도덕주의, 사회와 국가의 요구 같은 것들이 혼합되어 움직이는 것이 교육을 포함한 우리 사회 ‘동역학’의 특징이라고 저자는 파악한다.

이런 ‘동역학’은 개인이든 사회든 이익의 논리가 중심이다. 이익은 개인의 경우에도 무의식적인 동기로 작용하기 쉽지만 사회적 필요에 의한 집단적 이익과 일치할 때 그것은 더 반성되기 어려운 형태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세속적 의미의 이익 추구를 넘어서는 가치를 지향하고 있는 ‘자기 형성’은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물론 이익의 관점에서의 개인과 사회의 통합은 개인 이익의 각축이 전부인 사회에 비해 한단계 발전한 사회일 수 있다. 이런 사회성의 강조는 국가나 사회가 도덕주의적인 심리적 강요로 강제할 수도 있고, 개인이 얻고자 하는 사회적 재화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도덕적 시장 원리를 따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저자가 보기에 개인에 비해 사회를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도덕과 윤리에 관계된 인간 심리를 이중적이거나 위선적으로 만들 수 있다. 개인의 동기에 의해 추구되는 것이 사회 전체 이익에 기여하는 것으로 위장되기도 한다. 전체주의 국가의 독재자들이나 국가적 명분으로 위장된 토목, 건설 사업 등도 이런 예들이다.

사회성의 지나친 강조는 사회의 다원적인 가치를 왜곡하기도 한다. 과학이나 문학, 스포츠 자체의 성취보다 외적인 명예나 보상을 중시하는 현상이나 문화가 문화 산업 또는 콘텐츠로 변화하는 것도 왜곡 또는 변화의 한 모습이다. 선이나 진리, 아름다움 역시 그 자체보다 사회적 인정과 그것이 가져올 명예와 보상이 중요해지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네 개의 우상(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을 통해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가 왜곡되고 이중화되어 있는 배경을 분석한다.

예컨대, 상품 시장의 한 특징인 과시 소비는 사용 가치나 교환 가치가 아니라 사회적 인정에 매개되는 가치인 그 상품이 표현해 주는 사회적 지위에 의해 자극되는 것이다. 개인이 사회적으로 추구하는 많은 것들 역시 이와 유사하다.

이런 왜곡과 이중성은 자기다운 자기의 형성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므로 우상의 반성적 인식을 통해 편견을 극복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개인과 사회는 긴장과 길항 관계를 통해 개체의 개체성과 사회의 사회성이 반성적으로 상호 융합되는 삶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저자는 개인이 이익이나 가치라고 생각하는 돈이나 명예 같은 것들이 실제로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도 평가해 보자고 말한다. 사회에서 인정하는 가치가 나름 의미는 있지만 부풀려진 것들이 많고 자신의 평가가 아니라 어떤 외부의 힘에 휩쓸린 선택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개인이 선택하는 가치의 독자성은 인간의 독자성을 구성하는데 중요하며 개인의 자유의 표현이기도 하다. 인간의 자기 형성은 일종의 자기실현인데 이 자기실현은 총체적인 삶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의미 있는 특정한 가치 창조의 행위로도 나타난다.

결국 의미 있는 독자적인 가치의 추구가 자기실현이고, 그것이 사회적인 의미와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개체와 진정한 사회는 서로 의존한다. 한 개인의 실존적 삶과 사회의 구성과 진리의 드러남은 따로 뗄 수 없는 관계다. 인간의 자기 형성은 현실적인 자신의 삶을 살고자 하는 노력이면서 그것을 사회와 문화가 개입하는 보편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고 형성하려는 시도라고 저자는 정의한다.

많은 경우 성장한다는 것은 독자적 인간으로 자기를 형성한다는 뜻보다 주어진 사회적 요구에 합치되는 인간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인간이 다른 사람이나 그것의 총체인 사회적 규범에 민감하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은 윤리적 존재(homo ethicus)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압력 이전에 본능적으로 일과 놀이를 배우고 즐기는 공작하는 존재(homo faber)이자 유희하는 존재(homo ludens)이기도 하다. 이런 요인들이 개인의 성장과 사회화를 자연스럽게 매개하고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갈수록 분업화가 다양해지고 직업 훈련 등이 강화되면서 이런 인간 존재에 대한 의미가 복잡해졌다. 보통 개인의 선택에 작용하는 것은 일 자체의 흥미 이 외에는 개인적인 이익에 대한 관심이고, 이 이익은 물질적인 것과 사회적 지위와 존경으로 표현되는 사회적 인정이다.

그런데 일의 전체적인 의미는 보통 집단의 추상적인 이익으로 정당화되는 윤리적 요구와 도덕주의를 통해 부여된다. 이때 일이 삶의 전체성으로부터 유리되어 있으면 있는 만큼 도덕주의가 강화되고, 개인의 자기 형성이나 사회 전체 속에서의 의미는 뒷전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다.

자기 형성에 핵심인 개인과 사회와 자연은 각자의 독자성을 가지면서도 순환적인 변증법적 관계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순환 회로의 바탕이 되는 것이 자연이다. 자연은 사람의 삶의 환경적 조건이면서도 사람의 내면에 생물학적 자질로 이미 들어가 있다.

▲ 김우창 교수
이것이 본능이나 정신적 요구로 인간의 생존방식에 표현된다. 이 요구들 중 가장 신기한 것은 아름다운 자연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심미적 갈구이다.

민족이나 성이나 연령 같은 생물학적 요인은 그 자체로 보다 그 시대에 형성된 사회적 범주로 삶에 개입한다. 순수한 사회적 범주 중에 삶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것은 계급이나 신분 같은 것이다.

그런데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큰 영향력을 가진 이런 사회적 범주보다 자연이 인간의 삶에 더 직접적으로 개입한다는 점이다. 사회화된 범주를 넘어 여러 인간관계와 연대가 생기는 것은 모든 인간이 자연적 조건을 공유하는 보편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개인의 자질과 능력을 발전시킨다고 말할 때도 민족적, 사회적으로 한정된 자질과 능력이 아니라 자연이 원래 부여한 인간적 자질과 능력을 발굴해낸다는 것을 말한다. 자기 형성에 중요한 자아의 총체적인 모습에 대한 반성(대상을 그것을 넘어가는 관점에서 본다는 의미)적 의식은 이렇게 개인을 넘어 사회와 자연과 더 큰 초월적 차원의 대상까지 사고를 계속 확대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자기 형성의 모델로 동양의 공자와 서양의 푸코를 내세운다. 이 둘은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중시하고 개체의 의지로부터 시작하여 사회적 윤리로 까지 나아간다는 비슷한 점이 있다.

공자에게 즐거움(樂)은 삶의 근본이었고, 즐김 속의 조화 또는 조화 속의 즐김을 추구했다. 정치에서 국력보다는 분배와 화합을 중시했고, 사람들을 화합하게 하는 예(禮)를 강조했다. 예가 외적인 표현이라면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내적인 힘이 인(仁)이다.

푸코는 ‘자기를 돌보는 일’ 또는 ‘자기의 기술’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이것은 침묵, 명상, 글쓰기, 신체 단련, 금욕 수행 등의 수단을 통해 자기의 몸과 영혼과 생각과 행동과 존재의 방식을 변용하여 행복과 순수성과 지혜와 완성 또는 불멸의 상태에 이르고자 하는 기술이다.

저자가 보기에 공자나 푸코는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과 돌봄으로 시작하여 윤리적 인간이 되고 그에 기초해 조화된 사회가 성립 가능하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개인의 삶과 사회 질서의 조화가 정말 가능할까? 라는 쉽지 않은 질문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이 질문을 풀어 가기 위해 개인의 행복의 추구와 사회와의 관계에 대해 아렌트의 공적 공간과 공적 행복의 개념, 루소의 자애와 애기의 개념, 야스퍼스의 이성과 실존의 변증법 등을 검토한다.

자연이나 사회의 질서를 개인의 실존적 각성을 통해 늘 검증하고 수정해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는 것, 이 연속적인 과정을 통해 개인의 행복과 좋은 사회의 조화가 가능하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맛의 차이는 생물학적인 차이일 수도 있고, 습관과 문화의 차이일 수도 있다. 기호(嗜好)는 직접 작용하는 생물학적인 반응 안에 인격과 문화 전체가 개재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감각적 경험은 일정한 정보와 판단과 결합하여 어떤 확고한 확신(카탈렙시스)으로 가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강한 감각적 또는 지각적 확신은 삶의 진실에 대한 중요한 증거이기도 하다. 또한 단순히 타고난 감각을 넘어 이성적으로 다듬어지고 경험으로 훈련된 감각이 중요하다.

저자는 하이데거를 인용해 ‘진정한 인간’에 대한 생각을 전개한다. 사람은 자기의 삶을 선택해 사는데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자신의 존재 방식에 맞는 것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열중과 흥미와 즐김이 진정성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진정한 삶은 찾기는 어렵지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성 속에 있다.

그런데 일상성은 여러 사람 사이에 사는 것이라 다른 사람들에 휘둘려 삶이 평준화되기 쉽다. 이런 공중성은 인간 존재의 개체성과 책임을 말살해서 진정성을 흐리게 하지만 사는 부담을 덜어주고 편안함을 확보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공중으로서 그들의 일부로 존재하는 것은 자기로서 바로서기에는 실패하는 것이다.

진정성 있는 삶을 위해서는 전체적인 자기 인식을 결단하는 ‘단호한 결심’이 중요하고, 자기의 여러 특징을 바르게 이해하고 자기의 삶을 기획해야 한다. 진정한 자기로 산다는 것은 제 마음대로 사는 것은 물론 아니고, 진리에 대한 확신에 따라 사는 것이다. 이 진리는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개체의 실존적인 자각에 달려 있는 진리를 진리로 견지하려는 개인의 결심의 소산이다.

이런 주관성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때문에 진리에는 확신이 따른다. 이 진리나 확신은 광신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든 새로운 사실에 따라 취소할 수 있는 자유 속에 있다. 또한 진정한 자아가 형성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진정한 자아를 생각하며 진정한 공존으로도 나아가게 된다.

이런 하이데거의 진정한 삶을 위한 결심도 앞에서 언급한 푸코의 수련도 그 종착역은 다시 안정되는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다양한 층위가 있다. 개인적으로 자동적인 습관의 삶도 있고, 결심의 삶도 있고, 득도와 같은 더 심층적인 경험도 있다. 사회적으로도 아렌트가 말한 인간의 정치적 욕구와 관련된 통상적 사회 정치적 현상이 있고, 하이데거의 진정한 공존 같은 더 깊은 존재론적 고민이 담긴 층위가 있다.

저자는 자기 형성의 더 심층적이고 다양한 세계를 플라톤의 동굴의 허상 속에서 빛을 본 사람, 데카르트의 꿈, 퇴계의 정신 수양, 선승 쑤친의 수행와 깨달음, 유학자 후지나 가오판룽의 깨달음, 중국 가오싱젠의 소설 ‘영산’, 릴케의 시 등의 사례를 통해 펼쳐 보인다.

저자는 멀리 보는 것이 삶의 문제들을 저절로 풀어주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우주와의 일체감을 얻었던 수행자들 역시 그들의 일상으로 되돌아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넓어진 시야는 모든 것에 더 초연하고 세상을 자신감을 가지고 살게 하는 것은 분명하다고 한다.

저자는 오늘날 보통 사람들의 자기 형성의 구체적 방법에 대해 일상의 삶을 문화적 자기 개발과 지적 관심 속에 살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가까이 두는 것이 하나의 길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한 시간적 경제적 여유를 위한 사회적 조건의 확보가 좋은 사회의 전제라고도 말한다. 좋은 사회는 사람들이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고 그 자유를 통해 공존의 윤리적 규범을 실현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넓은 생각의 바다에 풍덩 빠지는 느낌이었다. 중요하다고 생각한 부분에 밑줄을 치고 읽다가 몇 번 반복하면서 나중에는 줄치지 않은 곳이 별로 없을 정도로 의미심장하고 압축적인 책이다. 다른 사람들의 사상이나 작품에 대한 해석이 대단히 탁월하다. 다만 개인의 삶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고 있지만 좋은 사회에 대한 상과 실천방법에 대해서는 약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주와의 일체감 같은 수행자들의 큰 깨달음은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생각할 때 신경전달물질과 호르몬이 어우러진 뇌의 큰 착각일 수도 있다. 큰 깨달음 후에 모두가 일상으로 되돌아왔다는 것 역시 일상의 세계만이 유일한 세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심층적인 큰 깨달음의 영역은 배제하고 처음부터 일상의 세계에 집중한다면 훨씬 더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논의가 가능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호 참사 49제가 지났다. 유족들은 잊지 말아달라고 세월호 참사가 우리 사회의 변곡점이 되어 다시는 이런 허망한 죽음을 반복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단기적으로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을 묻고 국가적 대안을 마련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고 어떤 사회를 지향해 가야 하는지 같은 더 근본적인 논의도 필요하다. 이 책에서와 같은 논의가 더 많이 더 깊이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다.

전민용(건치신문 대표이사, 안양 비산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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