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part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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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part 2
  • 정준오 학부생
  • 승인 2014.01.09 16:0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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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정준오 치전원생

<지난 글에 이어>

하루 만에 동행이 된 미구엘, 호세와 알베르게를 나서 작은 카페에서 아침으로 빵과 커피를 먹고, 작은 마을 오르비고의 바에서 먹은 하몽이 든 샌드위치는 꿀맛이 따로 없었다.

오후 늦게 멈춘 작은 마을의 바에서도 바게트, 콜라와 함께 맛본 또르띠야는 더 없는 행복 그 자체. 출발할 때는 가는 길에 여러 마을이 있으니 쉬어 갈 곳이 많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가뭄에 콩 나듯, 둘째 날 25km를 걷는 동안 열린 곳은 두 군데였다.

하지만 우리에겐 충분했다. 머무는 곳도 나를 안아 주는 곳 하나면 족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이리저리 재느라, 너무 많은 걱정하느라 낭비하는 시간도 불필요하게, 시간과 공간을 온전히 채울 수 있는 그곳 하나면. 사랑처럼 말이다.

▲ 길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카미노의 상징 노란 화살표와 가리비 문양
‘이 길에서 당신을 만난 것이 내겐 가장 큰 행운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인연은 정말 멋지다.

내 동행들이 그랬다. 셋째 날 일정이 달라 헤어진, 세 번째 카미노 길에 들어섰다는, 큰 삼촌 뻘이지만 귀여운 미구엘.

그가 내게 ‘페페’라는 스페인 이름을 붙여주었다. 순수한 장난기를 머금은 멋진 미소를 가진 그가 만든 웃음은 모든 것이 어색했던 길을 나도 아주 오래전부터 걸었던 길인 것처럼 만들어 주었다.

그의 직업을 물었을 때, 교수라서 시간이 이렇게 난다고 했다가, 한번은 굴삭기를 운전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것을 가르치는 교수인지 알 길은 없지만, 소속이야 어쨌건 그는 내게 좋은 사람이었다.

실은 길 위의 인연이 아니라 서울에서 만났다면, 사회적 위치라는 묘한 개념을 고려했을 때 솔직히 굴삭기 운전기사님보다 교수님 만나는 것이 내게는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소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메인테마, ‘소속이 운명을 결정한다’는 말을 따르듯 나도 어떤 집단에 소속되기 위해 많은 애를 쓰기도 했고, 매의 눈으로 내게 좋은 것을 고르려 하기도 했다.

그러지 않으면 불안했고, 좋은 곳에 소속되지 않으면 실패자가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다. 물론 내 아이들에게는 절대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치지는 않을 것이다.

노력하고 무언가를 얻어가는 과정은 행복을 만드는 멋진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제는 내가 내게 물을 것이다. 넌 그렇게 누군가에게 어떤 소속과 자격 없이도 좋은 사람일 수 있었겠냐고. 네 껍데기로 어떤 자랑이 되어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 진짜 네가 누군가에게 의미가 될 수 있느냐고.

▲ 아담한 마을 아스토르가의 한 성당
산티아고 길 위의 밤이 깊어 가면 한국에는 아침이 온다. 침대가 오밀조밀하게 모인 방에서 코 고는 소리에 잠을 잘 이루지 못했던 밤,

여섯 침대를 빼곡히 채운 유럽 어르신들의 그것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소리는 항상 있었지만 이날만은 이러저러한 상념 속에서 잠들지 못한 탓인지 모른다.

깨어있던 새벽, 연말이라 친구들 송년회를 한다며 회사원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문득 길 위의 멋진 풍광들이 떠올라 풀어 놓았더니 친구가 말했다.

“난 지금 출근 중인데! 이 순간 니가 세상에서 제일 부러워!”

이 말에 자랑을 멈추고 진심을 토했다.

“아무리 좋다는 곳에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곳이 가장 멋진 것 같아.”

여행 중에 멀리 있는 내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은 항상 기분 좋은 힘이 되어준다.

군대에서 오히려 가족을 더 잘 느낄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움을 덜어내는 순간들은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들 중 하나였다. 소중한 것을 새삼스럽게 자각하기. 여기 행복의 비밀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 세 번째 날 저녁 무렵 도착한 안개가 자욱한 폰세바돈 마을 입구
구름 사이에 둥실 떠있는 듯했던 폰세바돈의 알베르게는, 자욱한 안개를 헤치고 찾은 꿈속의 집이었다.

작은 마을에 하나 열린 알베르게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더욱이 작은 가게 하나 없는 산중 마을에서 숙박, 저녁식사와 다음 날 아침까지 해결해 주고, 좋은 사람이 가득 모였던 따뜻한 집.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보이던 풍경은 보기만 해도 온기가 가득한 벽난로 앞에서 기타치고, 수다 떨고, 책 읽는 사람들이었다.

지난 밤 아스토르가 알베르게에서 만났던 익숙한 얼굴들. 소포를 보내느라 늦게 출발해서 앞서가는 순례자를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는데, 나만 힘든 길 꿋꿋이 잘 올라온 줄 알았더니 모두가 나보다 더 빨리 이 길을 걸어낸 것이다.

게다가 빨래나 샤워를 이미 다 끝내고서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순례길 베스트 파트 중 하나를, 자만했던 나보다 일찍, 미소를 잃지 않고서.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모인 세계의 순례자들은 말 걸기를 좋아하고, 유쾌한 웃음을 가진 행복한 사람들이었다. 저녁 시간이 7시로 정해져 이곳에 머무는 10여 명의 순례자들이 한곳에 모여 식사를 하게 되었다.

빵집도, 슈퍼마켓도 없어 알베르게에서 모든 것을 다 해결해야 했는데도, 모든 것이 충분한 것을 넘어 푸짐했다. 반나절 만에 다시 만난 큰 호세, 세비야에서 온 작은 호세, 사제 요한, 어제 이곳에 도착했지만 발이 좋지 않아 하루 더 쉬고 있다며 어딘가에 편지를 쓰시던 프렌치 할머니, 어린 미국 꼬마 커플, 음식 솜씨 좋고 유머 넘치는 주인장, 에스파뇰로는 수다쟁이지만 영어로는 말수가 없던 아저씨, 프렌치 할아버지, 브라질에서 온 시로가 있었다.

▲ 아늑한 알베르게에서의 만찬

▲ 아늑한 알베르게에서의 만찬

▲ 몇 년 전 한국인 순례자와 동행하는 동안 한글로 자신의 이름 쓰는 법을 알았다며 써 보인 사제 요한 아저씨. 거꾸로 보고서야 알아보았다

와인과 샐러드를 곁들인 새우볶음밥을 함께하는 동안 프렌치 할아버지가 문득 “넌 지금 이 길이 좋니?” 물으시기에 빛의 속도로 “지금 이곳에 있을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합니다”라고 답했다.

길도 좋고, 이곳도 좋고, 당신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도 좋다고. 피곤함과 뻐근함, 내일 또 저 짐을 들고 움직일 것을 생각하면 조금은 아찔하지만 불평할 시간도 없이, 이미 나는 내게 이 길이 너무 좋은 길이라고 믿어 버리고 있었다. 여행이 가르쳐 준, 행복해지는 방법이다.

벽난로가 있는 작고 아늑한 알베르게에 도착한 이후, 갑자기 눈발이 세차게 날리기 시작했다. 전날 잠을 못 자 피곤했던 탓에 침대에 일찍 누웠는데, 요한이 도미토리로 뛰어올라와 흥분된 목소리로 내 이름을 소리쳐 부른다.

눈이 많이 내려 아주 멋지게 쌓여 있으니 나가서 사진을 찍자며 한껏 신난 이 순수한 아저씨. 모두가 추운데도 밖에서 눈을 맞으며 얼싸안았다.

사는 동안 눈이란 것을 실제로 처음 맞아 본다는 스물다섯 시로는 새로운 세상을 만난 어린 아이가 되어 눈 내리는 풍경에서 기념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실로 오랜만에, 눈밭에서 마냥 신나게 뛰어 놀았다. 그렇게 깊어갔던 아늑했던 밤.

▲ 매일같이 만나는, 아름다운 길

▲ 매일같이 만나는, 아름다운 길

“삐~익”

순례길을 걷다보면 종종 듣게 되는 경적소리. 무단 횡단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사람을 놀래키나 했는데, 알고보니, 지나가는 차들이 걷고 있는 순례자들을 응원하는 거란다. 

이 길은 걸음이 축복받는 행복한 길이다. 나를 붙잡고 뭐라고 한참을 설명해주시는 할머니의 손짓에 가슴이 따뜻해지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의 포근한 미소에 따라 웃게 되기도 한다.

길을 건널 땐 파란불이 아닌데도 차들이 모두 멈추어준 적도 있었다. 마주치는 동네 주민들은 모두 “부엔 까미노(Buen Camino)!”, 응원의 메시지를 전한다. 무언가 다른 말도 건네지만, 그러면 알아듣지 못하는 나는 오로지 “그라시아스(Gracias)!”

이 길을 만끽하는 데는 하루 3만 원 정도면 충분하다. 숙소 알베르게 5유로, 한 끼 식사는 7유로면 해결이 가능하고, 마음이 열려있는 넉넉한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다. 순례길에 모여든 이들은 한 가지 목표를 공유했다는 이유만으로도 만나기도 전부터 끈끈하다.

카미노 길을 세 번이나 걸었던 미구엘이 말했다. “이 길을 걷다가 먹는 보통 음식과 알베르게에 도착해 가지는 평범한 여유는 완벽하고 환상적인 것이 된다.”고. 평소에 집이나 어디서든 할 수 있어 큰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그런 사소한 것들이 특별해지는 카미노 길이 좋다고 했다. 그의 친구들은 왜 카미노를 그렇게 세 번씩이나 가느냐고 묻지만, 그들은 모를 거라고 한다. 와보지 않았기 때문에.

▲ 산티아고까지 222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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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 2014-01-18 09:53:28
사랑하는 누군가와 걷는 것도 좋겠지만 사랑하는 자신을 느끼고 생각하며 걷는 것도 좋겠네요~~~ 동행은 저절로 생기는 것 같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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