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민용의 북카페 -89]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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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의 북카페 -89]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
  • 전민용
  • 승인 2013.11.25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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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 문성원, 알렙

 

 
소설가 구보 씨가 철학자 구보 씨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소시민적 지식인의 이미지를 갖는 몇몇 소설 속의 구보 씨가 사색적이고 현실 비판적인 철학자로 변신한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접근하기 쉬운 철학이 되기 위해 소설의 형식을 빌리고, 현실적인 철학이 되기 위해 삶의 문제를 중심에 두고, 사변을 넘어 세상을 바꾸는 역할을 하기 위해 현실 참여적인 지식인으로 변신을 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영화나 소설, 시 같은 예술 작품들을 많이 등장시킨다는 점입니다. 딱딱한 논리의 전개 대신 영화 포스터와 영화 장면들이 등장하고 이야기나 시가 결합되면서 보기도 읽기도 이해하기도 쉽고 즐겁습니다. 물론 쉬운 듯 술술 넘어가면서도 가끔은 주제의 심각함과 ‘경계’ 너머를 건드리는 움찔함에 ‘깊은 생각의 구덩이’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책에는 구보 씨의 연인으로 추정되는 여성 Y가 등장합니다. 구보 씨가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사변적으로 흐른다고 생각할 때마다 현실과 느낌을 일깨우며 딴지를 겁니다. 정곡을 찔린 구보 씨는 쩔쩔매기도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자기주장을 이어가는 우직한 모습은 귀엽기도 합니다. 구보 씨와 Y는 우리가 사물을 보는 대표적인 두 가지 태도를 보여줍니다. 상대적으로 구보 씨가 이성과 직관형이라면 Y는 감성과 감각형으로 보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두 가지 모습이고 균형 있는 사유를 하는데 도움이 되는 장치입니다.               

인문학의 위기, 철학의 위기인 시대에 철학 또는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구보 씨는 철학의 중요한 문제들 중에는 이미 해결되었거나 다른 분야로 넘겨진 것들이 많다고 진단합니다. 이를테면, 우주가 무엇인가의 문제는 천체물리학이나 미립자 물리학이, 인식론의 많은 부분들은 심리학과 생리학이 다루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에 관한 문제들은 진화심리학이나 뇌생리학 등에서 많은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철학에 남아 있는 것들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나 규범의 문제들일 것입니다. 구보 씨는 사고의 규범을 다루는 논리학이나 행위의 규범을 다루는 윤리학이 남아있는 철학 고유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유를 무기 삼아 삶의 의미나 세상의 존재 의미 같은 것들을 추구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철학자 구보 씨는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삶 속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다양한 가치나 규범들을 꺼내놓습니다. 누드모델이나 뱀파이어 등 철학과 무관한 듯 보이는 재료들 까지 함께 버무려 건강하고 맛있는 사유의 식탁을 차립니다.

구보 씨는 누드모델을 꿈꾸면서 벌거벗음, 수치심, 허무주의, 슬픔, 진실한 말하기, 새로움과 낯섬, 초월에 대해 말합니다. 소통을 말하면서는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 자연과의 소통, 만드는 문명과 기르는 문명, 이분법과 이해관계, 오세훈과 무상급식 문제 같은 현실적이고 철학적인 소통의 문제를 다룹니다. 뱀파이어를 자본 또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상징으로 생각하면서는 욕망, 경계, 두려움, 탈주, 중독, 비겁함, 우리 안의 악, 수평성과 도약과 초월, 욕망과 가치, 사랑과 아름다움 등에 대해 논합니다.

‘구보 씨, 크기를 생각하다’에서는 북중 관계, 국가의 속성, 먹는 행위와 배설, 유전자와 환경, 안철수 현상과 정치에서의 도덕성, 집단의 크기 문제의 중요성 등을 얘기합니다. ‘구보씨, 잠에서 깨어나다’에는 경쟁과 승부, 아우라와 숭고, 아름다움의 다면성, 동물 다시보기, 꿈꾸는 잠과 마비의 잠, 즐기는 삶 등이 등장합니다. 구보 씨와 함께 즐거운 생각여행을 떠나보시기 바랍니다.

이 책은 저에게 이창동 감독의 ‘시’라는 영화를 다시 생각나게 해 주었습니다. 남학생들에게 성폭행당하고 자살한 희진을 진정으로 생각하고 아파하는 사람은 꽃을 좋아할 뿐 세상살이에는 서툰 미자 뿐입니다. 끝내 자기 죄를 진심으로 느끼지 못하는 손자를 대신해서 강물에 몸을 던지는 미자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쓴 시(제목 ‘아네스의 노래’)가 책에 실려 있습니다. 책에 수많은 영화들이 나오지만 특히 박찬욱 감독의 ‘박쥐’에 대한 분석은 백미입니다.

최근 대중적인 철학서들이 ‘철학 쉽게 설명하기’를 너머 구체적인 삶의 현장으로 들어오고 있어 기쁩니다.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훨씬 다양하고 넓은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게 해주고, 나와 우리와 사회의 바람직한 삶의 균형에 대해서까지 사고의 크기를 키워주는 것 같습니다. 개인의 삶이나 욕망 따로, (사회)운동 따로의 불균형을 바로잡는데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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