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민용의 북카페 -85]소설 ‘28’과 영화 ‘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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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의 북카페 -85]소설 ‘28’과 영화 ‘감기’
  • 전민용
  • 승인 2013.09.09 10:5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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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정유정, 은행나무

 

 
영화 ‘감기’(감독 김성수)를 보면서 정유정의 소설 ‘28’과 이야기 전개가 너무 비슷해서 깜짝 놀랐다. ‘28’이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으니 물론 표절은 아닐 것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상상만 하던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지니 영화에 대한 이해와 몰입도가 훨씬 커졌다.

치명적 바이러스의 출현, 엄청난 감염 속도, 고열과 출혈 증상, 단시간 내 사망, 서울 인접 도시(분당과 가상도시 화양)의 폐쇄, 방치되고 버려지는 시민들, 대규모 시위와 시위대를 향한 발포 등 비슷한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감기’는 블록버스터 흥행 공식에 맞게 대통령과 미국과 폭격기가 등장하는 등 스케일을 키우고, 영웅과 해결사를 내세우고, 해피엔딩까지 이어진다. 잘 만든 전형적인 재난 영화다. 그런데 ‘감기’는 사건을 그리는 것은 그럴 듯 했지만 사람을 그리는 것은 어설펐다.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관계와 에피소드는 개연성 없이 따로 놀았다. 지구(장혁 분)도 인해(수애 분)도 딸 미르(박신하분)도 각각의 연기는 훌륭했지만 설정된 캐릭터와 행동은 공감하기 어려웠다.

이런 면에서 ‘28’은 ‘감기’와 정반대다. ‘28’은 개와 인간에게 함께 걸리는 ‘붉은 눈’이라는 전염병에 의한  28일 동안의 재난을 그린다. 하지만 ‘28’은 재난이 중심이 아니라 재난을 배경으로 한 인간들(과 개들)이 중심이다. 재난의 원인인 바이러스에 대한 규명은 물론 해결책도 없다. 어떤 결말도 없다. 그저 완전히 질서가 붕괴된 곳에서 벌어질 수 있는 온갖 끔직한 일들이 묘사될 뿐이다. 인간은 극도로 이기적이거나 무기력하거나 너무 쉽게 죽는다.

‘28’은 인간의 소설이기도 하지만 개의 소설이기도 하다. 쉽게 볼 수 없는 개와 개, 개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압권이다. 남녀 주인공인 수의사 재형과 기자 윤주보다 개들인 링고와 스타가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저자는 구제역 파동으로 생매장당하는 돼지들의 동영상을 보고 이 소설을 구상했다고 한다. 그 돼지들이 반려동물인 개라면? 아니 인간 자신이라면?
‘감기’나 ‘28’을 보면서 인간 스스로 곱씹어봐야 할 질문일 것이다. 

수의사 재형의 개사랑은 남다르다. 심지어 인간보다 개를 살리기 위해 더 애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애착의 대상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개를 위해 목숨을 거는 재형을 새로운 전형으로 그리고자 했다면 인간과 인간 아닌 동물의 관계에 대한 다른 질문이 필요할 것이다. 이 책에서 강조하려고 보이는 동물권은 역시 보편적 인권이 전제될 때 균형 있게 보장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동물권을 주장하면서도 인간의 정서가 중심인 경우가 많다. 포유류나 그 중에서도 인간처럼 얼굴이 있고 표정이 있는 동물들에 대한 권리 주장이 일반적이다. 이 소설도 인간을 공격하는 야성을 가진 개와 인간과 통하는 개에 대한 묘사가 확실히 구별된다. 당연히 인간화된 개들이 주인공이다. 동물권에 대한 다각적인 논의가 필요한 대목이다.

‘28’에는 공익요원 동해라는 독특한 싸이코패스가 등장해서 소설의 긴장을 증폭시킨다. 재형이 선의 화신이라면 동해는 악의 화신이다. 두 사람은 인간의 보편적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고, 현실의 인간은 두 사람 사이의 어느 지점일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동해가 될 수도 재형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저자는 인간이 재형 쪽으로 다가갈 수 있기를 강력하게 소망하고 있다.

공권력은 시민을 고립시키고 방치하고 살해하는 나쁜 존재다. 하지만 권력이 사라진 화양은 말 그대로 지옥이 된다. 억압도 주지만 질서도 주는 권력의 양면성이다. 동물들을 포함해 집단이 사는 사회에는 권력이 있고 필요하기도 하다. 인간만이 그 권력을 모두를 위한 좋은 권력, 착한 권력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억압과 지배의 권력이 아니라 질서와 소통의 권력을 만들어야 한다. 좋은 정치가 중요한 이유이다.  

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말이 없는 사람보다 말이 많은 사람이 때로 구박을 당하는 것을 보면 말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 때로 말하는 자와 듣는 자는 권력 관계의 반영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야기 문화를 통해 적응 능력을 키우고, 윤리와 규범을 확장시키고 문명을 만들었다. 이야기가 자유롭게 흐르는 사회는 희망이 있는 사회이다.  

정유정의 전작 ‘7년의 밤’도 즐겁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28’에 공감하고, 특히 동해라는 캐릭터에 흥미가 있는 독자라면 ‘7년의 밤’도 대단히 재미있을 것이다. 두 작품 다 세밀한 묘사와 경계 너머를 보여주는 묘미가 있다. 다만 치밀한 구성면에서는 나만의 주관적인 생각일 수 있지만 몇몇 허점들이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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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호 2013-11-15 11:49:43
감기라는 영화를 먼저보고 이책을 접한다면 모두 표절은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갖고 책을 보게된다. 하지만 링고와 스타의 묘시력은 정말 작가에게 박수를 드리고싶다. 그리고 인물들의 사소한 행동묘사또한 너무 세밀해서 캐리터의 얼굴이 그려질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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