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왔어! 해고는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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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왔어! 해고는 갔어!
  • 김랑희
  • 승인 2013.04.02 13:5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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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랑희, 인권활동가

해고노동자들에게 봄날의 희망과 삶의 미래를

3월 30일은 전국해고자의 날이었다. 해고자들의 날이라니...축하하거나 기념할 날은 아니다. 우리 주변 해고자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들을 위로하고 함께 응원하는 날일 테다. 해고자들은 서로 격려하고 힘차게 투쟁하자고 결의를 다지기도 하겠지.

너무나도 오래 싸운 노동자들이 투쟁의 결의를 다지는 것은 어떤 마음일까? 무엇으로 이들은 다시 힘차게 싸울 기운을 낼 수 있을까? 내 주변의 해고자들. 기타를 만들던 콜트․콜텍 노동자, 자동차를 만들던 쌍용차 노동자와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 자동차를 판매하던 대우자동차판매 노동자, 배를 만들던 한진중공업 노동자, 아이들과 다시 만나고 싶은 재능학습지 노동자, 9년째 싸우고 있는 코오롱 노동자... 이들에게 우리는 어떤 미래를 약속할 수 있을까?

나이 든 한 노동자가 말했다. 옛날엔 100일이면 참 오래 싸운 것이었다고. 오늘날 해고노동자들의 투쟁은 100일을 훌쩍 뛰어넘어 1,000일, 2,000일을 맞이한다. 또 누군가 그랬다. 그 시간이면 연애를 3번이나 하고도 남았겠다고. 사랑을 해도 모자랄 시간에 찬바람에 얼굴은 트고 아픈 곳이 늘어나고 슬픔과 분노는 쌓여만 간다. 해고되기 전에 그들은 노동하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미래를 꿈꿨을 것이다.

해고는 이들이 꿈꿨던, 계획했던 미래의 시간들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렸다. 그런데 상실한 미래와 박탈된 삶의 조건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해고에 맞서 싸우면서 어마어마한 손해배상과 폭력적인 공권력까지도 견뎌야 한다. 그 절망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노동자들과 그의 가족들이 스스로 삶을 포기하기도 한다. 해고노동자들의 삶의 고통은 그들의 탓일까? 그 무게를 그들만이 짊어져야 할까? 해고자들이 ‘해고는 살인’이라고 외친다. 이 무시무시한 구호는 단지 구호가 아니라 그들의 현실이다. 곳곳에서 일어나는 ‘살인’에도 이 사회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무서운 일이다.

해고된 노동자들을 보며 사람들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일까? 해고된 노동자들의 삶을 이대로 쳐다보기만 해도 되는 것일까? TV에서 스웨덴의 사브와 볼보의 해고노동자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파산한 사브의 해고노동자는 실업수당으로 생활하면서 모처럼 세 아이와 함께 보낼 시간을 갖게 되어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국가의 지원으로 재취업을 위한 교육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볼보의 정리해고 노동자도 마찬가지로 실업수당으로 생활하면서 재교육과정을 마치고 최근에 경영이 안정된 회사의 요청으로 다시 복직했다. 재교육과정으로 과거보다 직급이 높아졌다는 이 노동자는 볼보에서 일했던 시간이 행복했기 때문에 그 회사에 다시 일하게 된 것을 기뻐했다.

이렇게 복직된 노동자가 다른 기업으로 재취업한 노동자들을 제외한 1,500여 명에 이른다. 스웨덴 해고노동자들의 삶이 한국의 해고노동자들의 삶과 너무도 달라서 부럽기보단 슬프다. 스웨덴의 노동자들은 정리해고가 되어도 삶의 희망이 사라지지 않는다. 연필 하나로 250년을 유지한 독일의 파버 카스텔은 정보화시대를 맞아 필기구 생산의 위기를 겪었지만, 노동자들을 해고하지 않았다.

나이 든 노동자들의 노하우를 존중하고 그들을 더 배려하는 것,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환경보호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 기업은 노동자들 해고하는 것이 경쟁력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경제가 어려우니, 세계시장에서 살아남으려니 정리해고는 불가피하다고 말하는 한국의 기업과 정부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다.

세계인권선언의 노동권에 관련된 조항 중 제23조 1항은 ‘모든 사람은 노동의 권리, 자유로운 직업 선택권, 공정하고 유리한 노동조건에 관한 권리 및 실업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를 가진다.’라고 명시한다. 우리 사회는 실업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전국해고자대회에 이어 쌍용차 대한문 분향소를 설치한 지 1년을 맞아 추모대회가 열렸다. 1년 전 3월 31일 22번째 희생자 고 이윤형 씨를 추모하기 위해 설치된 분향소는 그 뒤로도 2명의 동료를 더 떠나보냈다. 우리는 지난 2009년 5월 쌍용자동차 평택 공장에서 파업이 시작된 이후, 스물네 번째 죽음을 마주해야 했다. 8년째 자살률 1위를 놓치지 않는 국가이기 때문일까? 이렇게 높은 자살률을 심각한 사회문제로 인식하고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국가답게 한 공장에서 정리해고 이후 4년째 끊임없는 자살이 발생하는데도 아무 대책도, 책임도 없이 외면하고 있다.
 

스스로 삶을 포기한다는 것은 현재의 삶이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그 고통을 벗어날 탈출구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희망이 없는 삶,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삶을 맞닥뜨린 사람들의 선택은 죽음이었다. 그들의 죽음에 많은 사람이 가슴 아파하며 이제는 죽음의 행렬을 끝내야 한다며 사회적 해결을 요구했다.

지금도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걷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는 절망의 삶을 만들지 않기 위해 이날도 정부종합청사까지 행진을 진행하려 했지만, 경찰에 의해 저지당했다. 고인을 위한 국화꽃은 길바닥에 버려졌고 쌍용차 국정조사 실시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가로막혔다.

그들은 왜 정부종합청사로 가려 했을까? 국정조사를 하겠다던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약속을 지키라는 요구를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해고 문제는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차원에서 다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해고노동자들은 알고 있다. 이 싸움이 자신들의 복직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함부로 해고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임을. 이 역시 기업들도 잘 알고 있다. 지금 복직을 시키면 앞으로 해고가 쉽지 않을 것임을. 정부도 알고 있다. 해고자들의 문제를 사회가 책임을 진다는 것은 기업이 해고를 함부로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고 해고노동자들의 삶에 대해서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이 싸움은 서로가 끈질겨질 수밖에 없다. 힘을 가진 기업과 정부를 상대로 싸우는 노동자들에게는 끈질김밖에 없다. 이제 그 끈질김으로 너무 오랜 세월을 버틴 해고노동자들에게 평화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게 해야 한다.

며칠 전 서울시청 인근의 재능교육 노동자들의 천막농성장을 구청에서 철거했다. 그전에는 대한문의 쌍용차 노동자들의 천막을 철거하려고 했었다. 구청은 쌍용차 노동자들과 재능교육 노동자들의 천막농성장에 화분을 가져다 놓았다. 천막을 치워버리고 그곳에 초록식물을 놓아 다시 천막 칠 자리를 내주려 하지 않은 것이다.

오랜 시간 거리의 매연과 소음 속에, 때론 눈살 찌푸리는 사람들의 냉대 속에도 그 자리를 버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쫓아내고 식물을 채워놓는 것이 서럽다. 자신의 이윤을 위해 가차 없이 어제까지 묵묵히 일한 노동자들의 내쫓는 기업과 다를 것이 무언가. 천막이 보기 싫다고 부숴버리기 전에 그들이 그곳에서 떠나지 못하는 이유부터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해고노동자들에게 자신의 몸을 뉘 울 천막 하나도 허락하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는 함께 살 수 있을까? 지금 우리는 인간에 대한 예의도, 연민도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전국해고노동자대회의 제목은 ‘봄날은 왔어! 해고는 갔어!’이다. 천막에서, 길거리에서, 철탑에서 삶을 보내는 해고노동자들의 계절은 꽁꽁 언 공기가 뼛속까지 스미는 겨울이다. 이 겨울이 끝나면 봄은 반드시 온다고 믿으며 찬바람을 견디고 있는데 아직 오고 있지 않다. 마른 가지에 물이 오르고 새 생명을 잉태하는 봄, 찬란한 미래를 기대하며 두근두근 설레는 공기를 품은 봄, 따사로운 햇살과 촉촉한 빗소리에 미소 짓는 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흙과 풀, 꽃향기에 취하고 싶은 봄, 해고노동자들에게도 그런 봄을 맞이하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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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양호 2013-04-04 16:21:29
대한문 앞 농성장도 철거가 되었네요...도대체 어디로 가라는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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