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민용의 북카페 -59]화제의 책 ‘피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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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의 북카페 -59]화제의 책 ‘피로사회’
  • 전민용
  • 승인 2012.05.29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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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문학과지성사

 

21세기의 주요 질병은 신경성 질환이다.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행동장애, 소진증후군 등으로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반면 지난 세기는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성 질환이 대세인 면역학적 시대였다. 안과 밖, 친구와 적이 뚜렷한 경계선으로 구분되어 낯선 것(타자성, 이질성)은 무조건 제거의 대상이 되었다.

새로운 구도는 이질성과 타자성의 소멸이 특징이다. 면역 반응을 일으키는 ‘이질성’은 면역학적으로는 같은 것인 ‘차이’로 대체되었다. 가시 빠진 이질성처럼 타자성 역시 날카로움을 잃고 상투적인 소비주의로 되었다. 이를테면 낯선 것은 이국적인 것으로 되어 여행객의 향유의 대상이 된다. 이민자나 난민 역시 위협이라기보다 짐스러운 존재로 여겨진다.

세계화는 경계선을 특징으로 하는 면역학과 양립하기 어렵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난교 상태나 혼성화 경향 역시 면역화와는 정반대이다. 면역은 부정성의 변증법이지만 이 신경성 질환들은 긍정성의 과잉이 원인인 긍정성의 변증법이다. 과잉 생산, 과잉 가동, 과잉 커뮤니케이션이 초래하는 긍정성의 폭력은 면역학적이지 않다. 이에 대한 반발도 면역 저항이 아니라 소화 신경적 해소 내지 거부 반응으로 나타난다. 과다에 따른 소진, 피로, 질식 역시 면역 반응이 아니다.

보드리야르의 폭력 이론은 이질성이 아닌 긍정성 내지 동질적인 것의 폭력을 면연학적으로 서술하려고 시도하는 바람에 혼란을 주고 있다. 보드리야르가 구성한 적의 계보학에 따르면 적은 최초에 늑대의 모습, 다음은 작은 쥐의 모습, 해충의 모습, 마지막으로 바이러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전 지구에 퍼지고 모든 틈새와 시스템을 파고드는 바이러스성 폭력의 경우에도 시스템 자체가 아니라 면역학적인 타자일 뿐이다.

세계의 긍정화가 낳는 새로운 폭력은 시스템 자체에 내재한다. 적대성을 전제하지 않음으로 오히려 관용적이고 평화로운 사회에서 쉽게 확산한다. 긍정성의 폭력, 내재성의 테러는 면역 저항이 아닌 심리적 경색을 유발한다. 박탈이 아니라 포화시키고, 배제가 아니라 고갈시킨다. 따라서 직접적으로 지각되지도 않는다. 우울증 등 신경성 질환들은 긍정성 과잉의 징후이다. 소진증후군은 자아가 동질적인 것의 과다에 따른 과열로 타 버리는 것이다. 과잉행동의 과잉은 긍정적인 것의 과다를 의미할 뿐이다.

병원, 감옥, 공장 등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는 사라졌고, 21세기는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 빌딩,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 등으로 이루어진 성과사회이다. 사회의 주민은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이다. 규율사회는 금지, 명령, 법이 규정하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해서는 안 된다’나 ‘해야 한다’가 지배적이다. 성과사회는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규정하는 긍정성의 사회이다. 무한정의 ‘할 수 있음’이 지배적이다. 규율사회는 광인과 범죄자를 낳고,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나 낙오자를 만든다.

규율사회와 성과사회의 동질성은 생산을 최대화하려는 열망이다. 생산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금지의 부정성은 걸림돌로 작용하고 능력의 긍정성이 더 효율적이다.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보다 더 빠르고 생산적이다. 그는 규율에 단련된 상태는 유지한 채 능력은 더 발전시킨다.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그는 ‘노동만 하는 최후의 인간’이다.

긍정성의 과잉상태에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성과주체는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하고 스스로를 착취한다. 그는 가해자, 착취자인 동시에 피해자, 피착취자이다. 우울증은 그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고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 이어진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 우울증환자는 이런 내면화된 전쟁에서 부상당한 군인이다.

긍정성의 과잉은 자극, 정보, 충동의 과잉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지각은 파편화되고 분산된다. 멀티태스킹이라는 시간 및 주의 관리 기법은 문명의 진보가 아니라 오히려 퇴화라 할 수 있다. 수렵자유구역의 동물들은 먹이를 확보하면서 경쟁자, 포식자, 새끼, 짝짓기 상대 등에 대해 동시에 신경을 써야 한다. 멀티태스킹이나 컴퓨터 게임 같은 활동 역시 야생동물처럼 넓지만 평면적인 주의구조를 생산하고 당연히 깊은 사색 같은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인간사회는 집단 따돌림이 전염병처럼 확산하는 등 점점 더 수렵자유구역과 유사해져 가고 있다. 좋은 삶은 성공적인 공동의 삶을 포괄하는데 점점 생존 자체에 대한 관심에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철학 등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의 산물이다. 그런데 이런 깊은 주의가 과잉 주의나 산만한 주의에 의해 밀려나고 있다. 심심한 것에 대한 참을성이 없어지면서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성과주체는 개성이나 자아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수동적이지도 않다. 과도하게 활동적이고 신경과민 상태에 빠져있다. 또한 신과 피안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믿음마저 상실하면서 극단적인 허무 속에 빠져있다. 유사 이래 삶이 오늘날처럼 덧없었던 적은 없었다. 어디에도 지속과 불변을 약속하는 것은 없다. 이런 존재의 결핍 앞에서 초조와 불안이 생겨난다. 과잉활동, 노동과 생산의 히스테리는 극단적으로 허무해진 삶에 대한 반응이다. 성과사회는 모두 저마다의 노동수용소를 달고 다니는 강제사회이다. 이 수용소의 특징은 한 사람이 동시에 포로이자 감독관이며 희생자이며 가해자라는 점이다.

성과사회, 활동사회는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를 야기한다. 이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우리의 피로가 아니고 각자 나의 피로와 너의 피로가 있을 뿐이다. 이런 피로는 폭력이다. 모든 공동체, 친밀함,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한다.

한트케는 이런 말 못하는, 보지 못하는, 분열시키는 피로에 대한 대립자로 말 잘하는, 보는, 화해시키는 피로를 내세운다. 보고 보여지는 피로, 만지고 만져지는 피로를 통해 파괴된 이원성을 복구할 수 있다고 본다. 매일 저녁 꼬마 녀석들이 놀면서 노곤해 지는 피로 같은 이런 무위의 깊은 피로는 깊은 우애와 공동체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막간의 시간, 쓸모없는 것의 쓸모, 놀이의 시간이 있는 그 날은 피로의 날이다. 성과사회와 이에 기인한 피로사회와 정반대의 의미에서 도래할 미래사회 역시 피로사회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2010년 가을 독일에서 출간되자마자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간략히 요약해 보았다. 이 책에는 ‘피로사회’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 강연 원고 ‘우울사회’와 한병철 사상의 해설과 한국 사회에 대한 적용을 포함한 역자후기가 첨부되어 있다. 120쪽 정도의 문고판이지만 여러 번 읽어야 할 책이다. 한겨레신문(5월15일) 특집판도 참고하시기 바란다. 21세기, 후기근대사회의 특징을 잘 드러내주는 대단한 역작이다. 근대사회를 분석한 많은 철학자들의 관점을 비판하거나 재해석하는 부분들도 대단한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몇 가지 점에서 논쟁거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저자는 한국 역시 성과사회이고 그에 따른 여러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보지만 그렇게 단순화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의 분단과 정치경제사회적인 후진성은 성과사회의 특징들보다 규율사회적인 특징들을 더 많이 보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MB정부를 겪으면서 금지, 명령, 법적 지배가 역주행적으로 강화되기도 했다. 선망의 대상이 되고 가장 발전된 조직인 대기업조차 노동조합 활동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기도 하고 승진을 위해서는 금연을 해야 하는 등 규율이 결코 약하지 않다. 학생은 정규 수업뿐 아니라 방과 후까지 갖은 규율에 시달린다. 전형적인 규율사회의 특징들이다. 물론 역자의 주장처럼 성과사회의 특징들도 보이고 이행하고 있다고 주장할 여지는 있지만 여전히 규율사회 측면이 강하고 최소한 성과사회와 병립하는 이중사회라는 생각이다.

서구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성과사회는 규율사회와 분리할 수 없는 현대자본주의의 양 면이 아닐까 생각한다. 서구의 성과사회는 비서구의 규율사회에 대한 불공정한 관계를 바탕으로 성립한 사회이다. 심지어 서구의 성과 사회조차 같은 사회 내의 규율사회를 전제 하고 있다. 웰빙과 자아실현과 더 높은 성과를 추구하는 성과주체들은 불건강과 실직과 낮은 임금을 감수하는 복종적 주체들이 있기에 존재하며 이들 사이의 간극은 양극화라는 현상으로 더 확대되고 있다. 2008년의 세계적 금융위기는 이런 모습을 더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세계는 성과사회와 규율사회의 동시적 극복이라는 이중과제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최대의 미덕은 이중과제 중 하나인 성과사회, 피로사회, 우울사회라는 측면에 대해 최초로 깊이 있는 해석을 제공하고 있고 그 나름의 대안까지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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