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광장] 폭력의 세기를 주먹으로 살다 간 깡패 김두한(1918~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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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광장] 폭력의 세기를 주먹으로 살다 간 깡패 김두한(1918~1972)
  • 편집국
  • 승인 2002.1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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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장군의 아들(?)
어느 날 아들놈이 갑자기 두 손을 허리에 얹더니만, “나, 김두한이다∼!”고 소리친다. 김두한을 알 턱이 없는 5살배기는 제 딴에 자기 힘을 과시하는 주문이라도 되는 냥 생각하겠지만, 김두한을 힘의 상징으로 여기는 이런 유아적 정신 상태는 얘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제 김두한은 단지 깡패가 아니라 일제시대 거리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이다. 김좌진의 아들임을 밝혀줄 근거는 김두한의 주장밖에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들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김두한이 ‘장군의 아들’임을 계속 강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김두한의 이미지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김두한을 ‘주먹’이 아닌 ‘항일’로 색칠하기 시작한 것은 김두한이 자신을 ‘장군의 아들’로 주장하면서부터라고도 할 수 있다. 김두한의 주장은 그를 조선상인들을 일본 깡패로부터 보호해주는 ‘협객’으로 화장하는 기초가 되었고, 이는 10∼20년을 주기로 재 포장되어 왔다. 2002년판 김두한 일대기인 ‘야인시대’는 이런 전설을 굳건한 역사가 되게 하면서, 다시 현실 속의 신화가 되게 만들고 있다.

김두한의 친일행적
보통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김두한은 ‘입뽕’이라는 이름으로 서울 주먹계에 진출한 이래 약관의 나이로 구마적, 신마적을 물리치고 주먹계의 왕자가 되었다.

이후 일제 말기 조선청년들이 전쟁터로 끌려나가는 위기 속에서 그는 주로 전과자들로 조직된 경성특별지원청년단을 결성한다. 그는 총독부 경무국장에게 자신이 김좌진의 아들임을 밝히고는 “청년들을 내게 맡겨주면 군사 훈련뿐 아니라 정신 훈련도 잘 시키겠다”고 언약했다.

이를 두고 김두한이 “거짓으로 경무국장을 감쪽같이 속였다”고 동아방송 대담에서 얘기한 바 있지만, 이를 읽는 독자는 감쪽같이 속아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총독부는 김두한이 조직한 1만여 명의 청년단원들에게 건물뿐만 아니라 피복, 교재, 음식물을 제공했고, 총독부 관리들과 일본인 장교들이 나와 군사교육을 시켜가며 성전(聖戰)에 대비했다. 얼마 뒤 ‘반도의용정신대’로 개칭한 이 단체는 일제에 몸바치기를 결의한 청년들의 폭력정치조직이었다.

김두한의 주장처럼 과연 이 정신대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한 ‘트로이의 목마’였을까? 만약 그렇게 주장할 수 있다면, 조선 청년들에게 징병을 권유한 김성수, 이광수도 참 할 말이 많을 것 같다. 왜 나를 독립운동가로 대우해주지 않느냐고….

하야시는 조선인
‘야인시대’에는 김두한과 앙숙관계인 일본인 오야붕 하야시가 등장한다. 민족 영웅에게는 피가 다른 악한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매일 니뽄도(日本刀)를 신중히 닦는 충무로 하야시는 사실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었다. 하야시는 권력에 가까워지기 위해 일본인 행세를 하고 고위 관리들과 친하게 지냈던 것이다.

영역싸움이 거세지면서 김두한은 하야시패와 결전을 치루게 되었지만, “너, 훌륭하다”는 하야시의 말 한마디에 즉각 무릎을 꿇고 그 길로 그냥 형님 동생 사이가 되었다. 그 뒤 하야시는 한 달에 1천 원씩 김두한에게 보내줬다고 한다. 당시 물가로 인사동에 집 한 채를 사고도 남는 돈이었다.

하야시는 한국건설업회 이사를 지내다가 1960년에는 대한건설협회 부회장을 지냈는데, 이른바 주먹과 건설업계의 고리는 이미 1948년 모든 청년단을 통합한 대한청년단 창설 때부터 시작되었다. 대한청년단이 건설사업에 참가하면서 정부는 그 경비를 지불했고, 대한청년단은 1949년 6월 영월탄광·섬진강발전공사 등을 비롯한 총예산 130여 억에 달하는 엄청난 건설사업을 인수했다.

왜 건설업계에 주먹이 그렇게 활개치는지 의문을 가질 분들이 계실 터이지만, 이때부터 엮인 주먹과 건설업의 끈끈한 결합이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해방 후엔 백색 테러리스트로
해방 후 김두한은 좌익을 때려잡는 우익의 ‘백색 테러리스트’로 등장했다. 김두한은 대한민주청년동맹의 행동대 격인 감찰부장을 맡았는데, 대한민청은 서북청년단과 더불어 타공(打共) 전선의 제일선에 선 청년 전위대였다.

미군정과 경찰이 직접 나서지 못하고 은밀히 해야만 하는 일에는 꼭 청년단이 나섰고, 그 뒤에는 조병옥 경무부장과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이 있었다. 청년단의 운영자금은 한민당 계열의 실업계 인사들이 후원했으며, 때로 강도와 강탈로 보충하기도 했다.

김두한의 타공(打共)활동 중에서도 가장 눈부신 활약은 1946년 9월에 일어난 총파업을 진압한 일이었다. 철도노동자들이 파업을 시작하자, 대한민청은 경찰과 함께 장총과 수류탄을 들고 현장인 용산공작창을 습격했다. 대한민청은 8시간에 걸친 ‘작전’ 끝에 2천 여명을 ‘포로’로 잡아 창고에다 쳐 넣은 다음, 전평 간부 8명을 생매장시켰다.

김두한의 반공투쟁은 선혈로 물든 것이었지만 그가 처음부터 우익 백색 테러의 선봉장으로 나선 것은 아니었다. 해방 직후 김두한은 친구 정진룡(丁鎭龍, ‘야인시대’에서는 丁鎭英이라고 나온다)과 함께 좌익에 가담하고 있었다. 정진룡은 이미 수표교 시절부터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였다.

정진룡은 원래 종로패에 속해 있던 사람이고 해방이 된 뒤에는 명동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세력이 날로 커져 종로 5, 6가를 장악했고 드디어는 김두한의 부하들조차도 정진룡 쪽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정진룡은 좌익단체인 조선청년전위대의 행동대장이었다.

정진룡이 자기 영역을 침범하자 위기를 느낀 김두한은 부하들을 이끌고 우익에 가담했다. 주먹패에게 자기 구역에 대한 침범은 꼭 피를 부르는데, 이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두한은 정진룡과 그의 부하들을 납치해 남산동에 있는 대한민청 사무실에 감금한 채 두들겨 팼고, 결국 정진룡은 김두한 패가 휘두르는 곤봉 등에 맞아 죽었다.

김두환의 정계 생활
한국전쟁 뒤인 1954년 김두한은 대한노동총연합회 최고위원을 맡았다. 노동자 파업을 깨는데 살인도 마다하지 않던 자칭 ‘백색 테러리스트’가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한다며 최고위원이 되었던 것이다.

1950년대 대한노총은 노동자 권익을 옹호하는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대한노총은 해방 직후 우익세력이 전평이라는 노동자 조직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노동자 생존권도 신경 쓰지 못할 만큼 이승만의 정치적 목적에만 이용하였다.

김두한은 자신의 텃밭인 종로 을구에서 무소속으로 나와 당선되었다. 김두한은 김성수를 따르면서, 이승만을 친일파 반역자들의 두목이라고 비난하는 등 주로 야당 생활을 했는데, 그것은 그가 해방 후 주먹패 활동을 했을 때 맺은 인적 관계가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에 등을 돌리면서 김두한은 여당의 주먹패였던 이정재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이 민주주의에 대한 투철한 의식 때문에 이승만 정권에 반대했던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김두한이 이정재 패와 격돌한 것도 영역에 대한 패싸움일 뿐이었다.

반도의용정신대 시절부터 김두한 밑에 있었던 이정재는 동대문시장을 주름잡으며 이승만 정권의 충실한 주먹으로 활약했는데, 두 사람은 1957년 야당의 장충단 집회에서 충돌했다. 야당의 경호는 김두한이 맡고 있었고, 이정재는 이 집회를 무산시키기 위해 동원되었다.

김두한은 4대 국회의원 선거와 4월혁명 뒤에 치른 제5대 의원 선거에 입후보했으나 두 번 다 낙선했다. 그 뒤 그는 용산에서 보궐선거에 나와 당선돼 다시 제6대 국회의원 뱃지를 달았지만, 한국독립당 내란음모사건에 걸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이 사건은 김종필이 김두한과 가까워지자, 그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김두한은 무죄 판결을 받고 출소했다.

그런데 몇 달 뒤 김두한은 국회 의정석상에서 정부 각료에게 똥물을 뿌리는 일대 해프닝을 연출하게 된다. 이른바 한비 밀수사건 때문이었다. 이병철의 한국비료는 공장 건축자재를 수입한다며 사카린 원료를 밀수해, 이 돈을 공화당의 정치자금으로 제공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었다.

김두한은 의정단상에 나와 자신의 반공투쟁을 길게 늘어놓은 뒤, “이 내각은 고루고루 맛을 보여야 알지, 똥이나 처먹어 이 개새끼들아!”고 외치며 장관들을 향해 똥물을 퍼부었다. 이 사건으로 김두한은 의원직을 사퇴했고, 이 사건 이후 공적인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정치깡패의 전형, 김두환
정계 은퇴 이후 김두한은 광산업에 손을 대기도 하다가 1972년 고혈압 등으로 생애를 마감하고,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 신세계공원 묘지에 묻혔다.

정치인들은 김두한 같은 주먹패를 거느리면서 이들을 하나의 도구로 취급하고 주먹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오산이다. 또한 폭력의 세계가 어찌 눈앞에 보이는 ‘주먹’에만 한정되겠는가? 국가는 경찰과 군대라는 폭력조직을 홀로 배타적으로 소유하면서, 구조적, 법적, 상징적 폭력을 우리 생활 곳곳에 뿌려 놓았다.

20세기는 혁명과 전쟁의 세기이자 폭력의 세기였다. 과연 20세기만이 폭력의 세기일까? 거대한 ‘공적 폭력’ 앞에서 김두한의 주먹으로 이루어진 ‘사적 폭력’을 그 비인간성과 불법성의 잣대로만 평가하는 사족이 불필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김득중(역사학연구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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