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ntal Antonia's line] 여신 아테나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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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ntal Antonia's line] 여신 아테나를 만나다
  • 신순희
  • 승인 2004.11.08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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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 여성치과의사, 김찬숙 전 청아치과병원장

지혜와 공예의 수호신, 그리스 아테나 여신

▲ 품 넓은 여신의 미소
가을이 깊어지는 어느날, 테헤란로의 청아치과병원에서 Dental Antonia's line의 첫번째 인터뷰 대상인 김찬숙 선생을 만나고 돌아오는 내 마음에는 문득, 그리스 신화에서 영웅들의 수호신이며 전략가로 추앙받는 처녀여신 아테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당당하며 아름다운, 지혜의 여신 모습 그대로의 여성리더를 보았기 때문이다.

1937년생인 선생은 56년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서울치대 14회로 입학, 대학을 졸업한 그해 서독 큇팅켄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7년 반만에 교정학 박사로 귀국했다. 당시 교정학 연구자로는 거의 독보적인 존재였으며, 연세대에서 2년간의 교수직을 역임한 후 충무로에 김찬숙 치과의원을 개원, 현재까지 청아치과병원으로 이어오고 있다.

71년부터 지금까지 30년이 넘게 개원의로 살아온 선생은 그동안 대한여자치과의사회 발기회 회장 및 12대 회장, 대한치과의사협회 국제이사, 경기여고 총동창회장, 서울대 총동창회 부회장, 치정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며, 개원의로서의 삶외에도 활발한 사회활동을 해왔다.

일견 단순해 보이는 치과의사의 이런 성공 스토리에 '여성'과 '시대상황'이라는 두가지 억압 변수를 넣으면, 삶이 얼마나 치열하고 드라마틱해지는지를 나는 선생의 삶을 통해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1937년 식민과 시대의 억압이 한창일때 6녀 중 둘째딸로 태어난 똑똑한 소녀 김찬숙에게도, 1956년 막 전쟁을 끝낸 사회에서 치과의사가 되기 위해 대학에 입학한 여자신입생 김찬숙에게도, 슈바이처를 존경하고 스포츠를 좋아하는 선생의 자아가 자연스럽게 실현될 수 있는 환경은 결코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억압은, 때로 세상과 맞서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스포츠를 좋아하셨던 부모님의 지지속에, 딸만 여섯인 집안의 패기 넘치는 둘째딸은 어릴적부터 남자 못지않게 살리란 포부를 키워왔고, 당시 정원 100명 중 여성은 고작 1~2명이던 치대에 유독 12명의 여성이 입학했던 서울치대 14회의 신입생, 김찬숙은 학생때부터 더 넓은 세상으로의 유학을 준비했다.

부모님께 받은 초기 종잣돈 미화 $900을 손에 쥐고 독일로 향한 가난한 유학생은, 당시 유럽 치과의사의 1/3 정도가 여성이라는 사실에 감명 받으며, 첫 학기 등록금으로 종잣돈을 거의 다 써버린 후 무작정 독일내 장학 재단을 찾아가 장학금을 신청하여 받아 내기도 했다.

또 유학하면서 observation하던 독일 병원에서 근면성실한 모습으로 인정받아 환자를 보고, 월급까지 당당히 요구하는 위치를 차지하기도 했다. 어린 동양 여성에게 진료자체를 거부하던 환자들이 나중에는 오히려 지정진료를 원할 정도의 상황은 오로지 선생 스스로 만들어낸 성과물이었으리라.

그런 선생에게도 '육아'만큼은 쉽게 넘기 힘든 큰 산이었다고 한다

독일에서 화학을 전공하던 유학생과 결혼, 가사와 육아를 병행하며 통과되기 어렵기로 유명한 독일 박사 논문을 써야했던 선생의 육아 이야기는, 두돌이 가까운 아이를 둔 나에게 가장 큰 공감과 울림으로 다가왔다.

베이비씨터를 구할 수 없어 아이를 안전띠에 묶어놓고 9시에 병원으로 뛰어갔다가 다시 12시에 뛰어 돌아와 젖먹이고 기저귀 갈고, 다시 2시에 병원에 뛰어 갔다가 6시에 뛰어 돌아올 때 아이 울음소리가 나면 오히려 '아, 살아있구나'하며 안도했다는 기억들...

한번은 아이가 안전띠의 끈을 목에 삼켜 캑캑거리고 있을 때 뛰어들어가 겨우 살려내도 했고, 또 한번은 당시 유일한 난방기구였던 난로에서 연기가 새어나와 연기 자욱해진 집안에서 아이를 구해내 밖으로 뛰쳐 나가 신선한 공기를 쏘이면서 울기도 했던, 그렇게 힘든 시절을 살아낸 선생의 경험담은 역설적으로 그 시대에 아이를 둔 여성이 유학하여 학위를 따내는 것이 결코 일반화될 수 없는 경험임을 느끼게 해주었다.

퇴근후 집안 살림과 아이를 보살피고, 밤새 기저귀를 빨고 논문을 쓰면서, 고국의 음식이 그리워 찾아온 남편의 친구들까지 음식을 해먹이며 지낸 유학 생활은 선생의 안토니아같은 넓은 품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지금의 내가 짐작은 커녕 감히 상상도 안될 정도의 고된 삶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그런 악조건들에도 선생은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당당하게 학위를 취득해 국내에서 독보적인 교정전문가로 입지를 이루었다. 억압의 무게는 이렇게 웨이트 트레이닝용으로 쓰이기도 하는가 보다. 억압의 무게를 바벨삼아 키운 근육의 힘으로 선생은 오히려 그 억압을 하나씩 뚫어냈으니 말이다.

▲ 그 손을 잡을 수 있어 후배들은 행복하다

100m달리기의 세계 신기록 경신이, 비록 나는 그렇게 빨리 뛰지 못하더라도 인간영역의 확장이라는 면에서 나에게도 의미가 있듯, 1세대 여성치과의사로 선생이 넓혀온 삶의 영역은 후배여성들에게 선택가능한 지평의 확장이라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힘든 조건을 뚫고 이뤄낸 선생의 엄청난 사회적 성과는 여성 100m 달리기의 10초벽 격파와 같은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나는 선생의 삶이 매우 존경스럽고 자랑스럽고, 또 그 삶을 통해 내가 고무되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막상, 내가 그렇게 할 자신은 없다. 내게 선생의 삶은 슈퍼우먼과 같아 보인다. 고로 난 슈퍼우먼이 될 자신이 없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첫째와 둘째 아이를 한국의 시어머님께 맡기고 독일로 돌아가 공부해야 했던 선생의 선택이 귀국후 초등학생이 되어 있는 아이의 엄마에 대한 낯설음으로 돌아왔듯이, 또한 남편이 외동아들이었기에 바로 5년전까지도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며, 언제나 안방은 시부모님이, 햇볕이 잘 드는 방은 아이들이 쓰고, 선생은 늘 뒷방이나 골방을 써야했듯이, 아무리 성공한 여성이라도 결코 남성과 같아질 수 없는 지점은 가정에서의 위치와 경험이 아닌가 싶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슈퍼우먼 정도의 각오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일들이 있고, 또 아무리 슈퍼우먼이라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는 건, 여성 개인적으로는 억울한 일이요, 사회적으로도 손해나는 일이다. 훌륭한 능력이 있으나 슈퍼우먼 정도가 아니라면 사장되고마는 여성의 능력은 개인과 사회 모두에게 억울한 손해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나도 선생처럼 훌륭한 삶을 살고 싶으나, 여성이라는 억압까지 혼자서 깨뜨릴 능력은 없으니, 늘 발칙한 위반을 꿈꾸는 나는, 사회가 기준을 좀 낮춰주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묻고 싶다. 문턱을 낮춰 장애인의 휠체어가 지나갈 수 있게 하듯, 내게만 혹은 여성에게만 있는 문턱은 낮춰달라고, 그래야 서로서로 좋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선생은 여성리더들의 어머니이다

선생에게는 다섯명의 딸들이 있다. 그것은 외동아들을 남편으로 둔 여성에게 또 하나의 억압이었겠지만, 선생은 모든 딸들을 당당하고 아주 훌륭한 여성으로 키워냈다. 5녀 모두, 사회 각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다. 선생 자신이 여성 리더이자 또한 여성 리더들의 어머니인 셈이다.

이점은 치과계에서도 역시 그렇다

1971년 대한여자치의학사회의 발기회 회장을 맡았던 선생은, 대한여자치과의사회의 모태를 세웠고, 그 정열은 현재까지도 대여치에 대한 강렬한 애정으로 남아 있다. 최근 10년간의 침체기를 벗고, 대여치가 새롭게 발돋움하고 있는 이때, 대여치 무주 워크샾에서 선생이 여성치과의사의 리더쉽에 대해 강연한 것은 우연이 아니지 싶다.

선생은 현재, 청아치과병원의 원장직에서 물러나 고정팬(?)들의 진료만 담당하고 있으며, 스마일 재단 이사직을 맡아 은퇴후 봉사하는 삶을 계획하고 있다 한다.

치과의사로 성공하는 것은 기본에 충실할 때 가능하다며, 젊은 여성 후배들이 가정과 직장을 병행하다 보면 힘들 때가 많지만 열심히 하면 다 이겨낼 수 있으며, 치과의사라는 직업을 감사히 여기고 늘 노력하면서 살 것을 당부하는 선생은 일흔이 가까운 나이에도 여전히 아침 6시에 기상하고, 8시 전에 출근하여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인생을 대하는 성실한 태도가 느껴진다

인터뷰가 끝나고 나는 선생에게 쿠키를 선물하고 선생은 나에게 저녁을 사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손을 내밀었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어떤 음식을 잘 하느냐고 물었더니 어떤 음식이든 밖에서 먹어보면 집에서 비슷하게라도 해 보는 편이라 요리를 이것 저것 다 잘한다고 말을 잇는다.

올림푸스산에서 갑옷을 입고 있는 여신은 아테나가 유일한데, 아테나는 전쟁시에는 전략을 짜고 평화시에는 집안에서의 여러가지 기술들을 관장한다. 패기 넘치던 둘째딸이 꿈꾸었던 대로, 남자못지 않은 성공의 인생을 살아온 선생이 지금까지도 진료를 하는 것은 나를 찾는 환자팬들 때문이라며, 부군의 저녁상을 위해 총총히 집으로 향하는 모습은, 선생의 빨간색 스웨터만큼이나 인상적이었다.

첫 인터뷰 성공을 축하해 주는 남편에게 저녁을 얻어 먹고나니, 내가 보고 싶던 그들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이제 조금씩 보이는 것도 같다. 시간을 내어준 김찬숙 선생께 감사드린다. 정말 유쾌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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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공 2004-11-10 19:24:00
축하드리고,
잘 읽었습니다.
다음을 기다릴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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