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의 아름다운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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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의 아름다운 키스
  • 강재선
  • 승인 2003.01.0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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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밝았다. 다시 한 살을 추가해 정말 과년한 처자가 되어 버려 주위 분들께 심려만 끼치고 있다. 생각 같아서는 골치 아픈 결혼보다 맘에 맞는 동성친구들과 함께 등 맞대고 사는 건 어떨까 싶기도 하다.

도무지 마음 맞는 이성을 찾을 수가 없고, 나이는 나이대로 먹고, 집에서는 돈 잘 버는 늙수그레한 사람을 소개시켜주려 하고, 어딘가 있을 내 님에 대한 환상을 저버릴 수는 없고… 그때, 누군가가 나타나고… 이러저러한 오해로 투닥거리며, 사랑에 빠진 이들은 아름답게 변화하고… 여자와 여자의 연애라는 걸 제외하고는, 발랄한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을 따르는 영화다.

하지만, 그 딱 한 가지 다른 점이 영화를 새롭게 만든다. 보수적인 사랑과 결혼의 신화를 반복 재생산하는 장르와, 진지해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마련인 주제-동성애와 여성의 성욕문제-의 묘한 어울림은 할리우드 기성품과 색을 달리한다. 성적취향보다는 자아찾기에 방점을 찍고 있으며, 자신의 다양성에 대해 마음을 열라는 것이 주된 메시지이다.

이 영화는 두 주연배우가 직접 각본을 썼다. 뉴욕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는 동안, 식사준비중인 엄마, 단정한 아내, 수다떠는 친구들 등, ‘시시하고 보람 없는 배역에 지친 나머지’ 직접 아이디어를 내 오프 브로드웨이 연극을 거쳐 저예산 인디영화에 이르렀고, 2001년 LA필름페스티벌에서 여러 상을 휩쓴 후 미국 전역에 확대 개봉되었다.

이들은 ‘성적인 동향에 대한 거창한 규정이나 정치적인 이야기는 관심이 없었다’고 말하지만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고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펼치는 것에 대해 치밀하게 고려했고 영리한 성공을 거두었다.

언젠가 한 친구가 내게 조언을 했다. 그 녀석이 릴케를 알고 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또한 이 말은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했던 말이며, 누구나 알고 있는 말이며, 앞으로도 가끔씩은 되뇌어 줄 만한 말이다.

‘새로울 것 없는 관계를 맺는 것은 타성 때문만은 아니다. 새로운 경험에 앞서오는 두려움과 수줍음 때문이다. 모든 것을 감수할 준비가 된 자만이 살아있는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강재선(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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